183. [외전] 깨달은 것 (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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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3. [외전] 깨달은 것 (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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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3. [외전] 깨달은 것 (完)
2023.01.28.
‘샴푸가 떨어졌네.’
정오는 벗어놓은 옷가지들을 다시 주워 입었다.
성가시지만 그럴 수밖에 없었다. 새 샴푸를 가지러 다용도실까지 가는 길엔 지헌이 있었다. 그녀가 옷도 안 입고 돌아다니는 걸 보면 이 남자가 가만히 있을 리 없었다. 그래서 그에게 샴푸를 갖다 달라는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욕실 문을 열고서 재빨리 움직이는 사이에 지헌과 마주쳤다. 바라보는 눈이 매서워 보였지만 정오는 무시하고서 달렸다.
다행히 그가 붙잡는 일은 없었다.
“후우우.”
욕실로 돌아온 정오의 입술 사이로 안도의 한숨이 흘렀다. 왜인지 알 수 없었다. 부부 사이인데, 때에 따라서는 그를 쩔쩔매게 할 수도 있는데 왜 여태 그를 상대로 긴장하게 되는지, 어째서 이렇게 안도하는지.
말끔하게 씻고 나온 정오는 머리를 말리고서 옷을 챙겨입고 거실로 나갔다.
“예준이는 아직 안 깼어?”
“응.”
정오의 물음에 대답한 지헌이 가늘어진 눈으로 그녀를 따갑게 바라보았다. 뭐가 문제인가 싶어 정오가 다시 목소리를 내었다.
“왜?”
지헌이 못마땅한 표정으로 정오의 옷 어깨에 나 있는 구멍에 손가락을 쑥 집어넣으며 말했다.
“옷이 야하다.”
지헌의 지적에 정오의 눈도 날렵해졌다.
오프숄더도 아니고, 그저 어깨에 포인트로 구멍이 나 있는 것뿐이었다. 기껏해야 지름 15cm 정도.
“이게 뭐가 야해. 어느 조선시대에서 오셨어요.”
“안 보이던 살이 보이잖아.”
“보이든 말든 오빠 말곤 쳐다보는 사람도 없어, 멍충아.”
찌릿.
순간 지헌의 눈빛이 돌변했다. 정오가 뒤늦게 입술을 말아 감추었지만 소용없었다. 색기가 흐르는 희미한 눈웃음과 함께 바짝 다가온 지헌이 밀어내려는 정오의 양손에 깍지를 끼고는 입술을 덮쳐왔다.
어떤 포인트에서 나사가 풀린 건지 알 수 없어 당황스러운 와중에 정오의 안으로 더운 숨이 흘러들었다.
내가 왜 욕실에서 옷을 주워입는 고생을 했을까. 정오는 잠시 후회했다.
*
지헌과 정오는 예준을 데리고 소아과를 방문했다. 예준이 예방접종을 하는 날이었다.
또래의 아기를 많이 본 소아과 의사는 예준의 남다른 발육에 감탄했다.
“아기가 크네요. 이 정도면 상위 10% 되겠어요.”
“네. 처음부터 크게 나왔어요. 4kg으로.”
“아이고, 엄마가 고생 많이 하셨겠네.”
의사와 정오의 대화에 지헌은 숙연해졌다. 더 육아에 신경 써야겠다고 생각하는 와중에 주삿바늘이 다가왔다. 반사 신경이 반응한 듯 아기를 안은 팔에 더욱 꽉 힘을 주며 어깨를 움츠리게 되었다.
“누가 보면 아빠가 주사 맞는 줄 알겠네.”
의사가 지헌을 놀리자 지헌이 어깨를 바로 세웠다. 하지만 바늘로 아이를 찌를 때는 역시 제 피부 안으로 주삿바늘이 들어간 듯 움찔했다.
으애애애앵!
새로운 환경에 눈을 말똥말똥 뜨고 있던 예준이 울음을 터트리며 몸부림쳤다.
“누굴 닮아서 이렇게 목청이 좋아.”
노련한 의사가 껄껄 웃으며 아이의 팔에 밴드를 붙였다.
“밴드는 30분 뒤에 떼시고요, 오늘은 목욕시키지 마세요. 미열이 있을 수도 있는데 심하면 내원하시고요.”
“네. 감사합니다.”
진료실을 나와서도 빽빽 우는 아기를 달래면서 간호사에게 꾸벅 인사하는 지헌을 보며 정오는 몰래 웃었다.
누가 봐도 초보 아빠 티가 나는데, 오늘 자신이 꼭 병원에 데려가야 한다며 고집을 부렸다.
그래도 남편과 함께 오니 편하고 또한 의지가 되었다. 남편은 함께 있을 땐 모든 궂은일을 자신이 하려는 경향이 있어서 오늘도 정오는 손가락 하나 까딱할 필요가 없었다.
울음을 겨우 그친 예준을 카시트에 태우고 운전석으로 와 진땀을 닦은 지헌에게 정오가 말했다.
“2년 전인가, 3년 전인가. 예나랑 같이 독감 예방접종을 하러 갔었어.”
시동을 켜려던 지헌이 고개를 돌려 정오를 바라보았다.
“진료실에 들어간 애들이 다 울면서 나오는 걸 보고 예나도 당연히 겁을 먹었어. 그래도 꼭 맞아야 한다고, 엄마도 맞을 거니까 같이 맞자고 설득해서 진료실로 데려갔거든.”
지헌은 알지 못하는 소중한 추억에 대한 이야기였다.
“여기서 문제. 주사는 엄마가 먼저 맞아야 할까, 애가 먼저 맞아야 할까?”
“엄마가 본보기가 되어야 하니까 엄마가?”
“아니지. 애는 몸부림이 심한데 엄마가 먼저 맞으면 애를 붙잡을 힘이 없으니까 애를 먼저 맞게 해야지.”
하지만 그건 엄마 기준의 대답이었다. 지헌이라면, 주사를 먼저 맞고도 아이를 거뜬히 붙잡을 수 있었을 것이다.
자신의 답에 이의를 제기할 거라고 생각했지만 남편은 그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튼 예나가 먼저 맞았어. 공포심에 짓눌려있다가 당연히 으엥, 하고 울었지. 나는 그런 예나를 달래느라고, ‘예나야, 그렇게 울면 안 되지. 엄마 맞는 거 봐. 엄마는 안 아프다. 엄마는 안 울어’ 그렇게 본보기를 만들어주려고 했지. 그런데 예나가 날 붙잡으면서 뭐라고 했는 줄 알아?”
“…….”
“엄마! 아니야, 맞지 마! 진짜로 아파! 엄마 주사 맞지 마!”
그날의 찡했던 마음을 기억한다. 그것이 사랑이라 가르쳐주지 않았는데 어느새 사랑을 알게 된 아이. 그래서 엄마가 행복해질 수 있게 만든 아이.
남편에게 이 사랑스런 아이에 대한 이야기도 다 하지 못했다. 소중한 추억이 떠오르는 대로 그에게 들려주고는 있지만, 아이와 함께한 기억의 대부분은 이토록 일상적인 것들이라 시간이 흐르면서 흐려질 수밖에 없었다.
지헌 또한 그것이 서운한지 이야기를 듣는 내내 눈을 빛내다가 토라진 표정을 지었다.
“왜 그 얘기를 이제야 해? 그런 중요한 얘기는 만나자마자 해줬어야지.”
“지금 기억이 나서 지금 하는 거야.”
“기억을 너무 못 하는 거 아니야?”
“정지헌 씨, 그런 걸로 심통 부리면 앞으로는 이런 얘기도 안 해줄 거야.”
“소중한 기억이 돌아왔으니 축하파티를 해야겠다, 여보.”
정오가 단호해지니 금방 태도를 바꾸는 지헌의 능청에 정오는 웃음을 삼켰다.
시간도 기억도 우리도 계속 흘러가고 있어서 어쩔 수 없이 놓게 되는 일상의 추억은 정말로 어쩔 수 없겠지만, 지헌 씨, 이제 당신도 당신만의 특별한 추억을 쌓게 되겠지.
“저기서 내려줘. 유모차 끌고 천천히 갈게.”
“왜. 집까지 데려다줄게.”
“아니야. 오빠는 빨리 회사로 돌아가야지.”
“날 그렇게 빨리 회사로 내쫓아버리고 싶어?”
“오빠는 할 일이 많잖아.”
불리한 지적에는 또 대답을 안 하지.
일주일에 한 번 예나와 플라잉 요가를 하고, 국순의 조수도 하고. 가족과의 시간을 보낼 때는 그토록 부지런하고 열정이 넘치는 남편은 여전히 일에 있어선 투정이 많다.
정오가 휴직을 하여 더욱 그랬다. 회사에 지킬 것이 없으니 출근하기 싫어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지헌의 능력과 추진력은 계속 좋은 평가를 받고 있다. 얼마 전 지헌은 맥스기획의 콘텐츠 제작 전문 자회사를 설립했다. 발전 가능성이 있는 동영상 크리에이터들을 고용하여 클라이언트의 상품 관련 창작 콘텐츠를 만들게 한 것이다.
TV 시청률이 예전보다 떨어지고 인터랙티브 매체들이 각광을 받는 시대라 지헌의 전략은 잘 통했다.
15초, 30초의 제한에서 벗어난 스토리텔링 콘텐츠들은 대중들의 사랑을 많이 받게 되었다. 신사업을 시작한 지 이제 겨우 한 달이 지났을 뿐인데 회사를 좋게 본 클라이언트들의 주문이 밀려들었다.
사실 이건 이국순 여사의 영향. 이제 구독자 1만 명의 인기 크리에이터가 된 국순에게서 지헌이 사업의 영감을 얻은 것이었으니 정오는 남편을 심하게 닦달할 수도 없었다. 집은 남편에게 휴식이자 에너지와 영감의 원천이니.
결국 정오는 오후의 미팅 스케줄 이전까지 할 일이 없다며 고집을 피우는 남편에게 지고 말았다.
그런데 집으로 돌아와 정오가 옷을 갈아입는 동안 예준을 지켜보고 있던 지헌이 정오를 급하게 불렀다.
“여보! 여보!”
“왜! 왜!”
정오는 무슨 큰일이 난 줄 알고 옷도 대충 입고서 달려갔다.
“왜 그러는데!”
“예준이가 뒤집기를 했어.”
“…….”
“진짜라니까?”
“어. 그래.”
“다시 보여줄까?”
“옷 갈아입고 와서 볼게.”
예준이 조만간 뒤집기를 하겠구나 하는 생각은 며칠 전부터 하고 있었기에 정오는 그다지 놀라지는 않았다. 오히려 지헌의 반응이 재미있었다.
나도 그랬지. 그때는 몰랐지.
“이제 시작이야, 오빠.”
“응?”
“뒤집기부터가 시작이라고.”
“뭐가 시작인데?”
“그건 경험해보면 알게 돼.”
정오는 피식 웃고는 돌아섰다.
지헌이 정오의 말뜻을 깨달은 건 한 시간도 채 지나지 않아서였다.
“예준아, 예준아! 정예준!”
지헌이 외치는 소리에 소파에 앉아 졸고 있던 정오가 또 달려갔다.
“왜! 무슨 일이야! 왜! 왜!”
“야! 이 노옴! 가만히 있으라고 했지!”
지헌이 예준을 붙들고서 호통을 치는 소리에 정오의 눈이 흐릿해졌다. 아기의 이마 연어반이 화르르 타오르는 것처럼 붉어져 있었다. 아빠, 나는 아빠를 닮았으니까 화내지 마세요, 하고 간청하는 것 같기도 했다.
“돌도 안 된 애한테 훈육을 해?”
“아니, 똥기저귀를 갈아주는데 뒤집기를 하려고 하잖아.”
정오는 픽 웃으며 다가가 예준의 두 팔을 붙잡았다. 팔다리를 파닥거리던 예준은 몸이 결박되자 답답한 듯 울음을 터트렸다. 정오가 얼굴 표정을 바꾸어가며 예준의 주목을 끌었다. 정오의 도움으로 지헌은 무사히 기저귀를 갈 수 있었다.
“예나도 이랬어?”
“다 그렇지.”
“…….”
“애가 사람이 되도록 키우는데, 뭐 행복한 일만 있는 줄 알았어?”
“…….”
“붙잡고 서기 시작하면 집 안에 조금이라도 위험한 물건들은 바로바로 치워야 하고, 애 입으로 이상한 거 들어가지 않게 지켜봐야 하고.”
“보행기 태우면 되는 거 아니야?”
“보행기 태우는 것도 한때야. 애들이 얼마나 약았는데. 금방 보행기에서 빠져나와서 어디 거꾸로 처박혀 있으려고 한다니까.”
보행기에서 빠져나와 어딘가에 거꾸로 처박혀 있는 예준의 모습을 떠올리며 지헌의 표정이 멍해졌다.
“걱정 마. 그래도 귀여워. 얼마나 예쁜지 몰라.”
정오가 그런 지헌을 위로했다.
아니지. 위로가 아니었다.
아이들이 어떤 말썽을 부리든 당신은 그저 행복하기만 할 거란 걸 정오는 알고 있었다. 그와 함께한 1년 남짓이 그러했듯이.
“오빠가 기억을 되찾은 지도 1년이 돼 간다.”
어느덧 그의 생일이 다가오고 있었다. 날짜를 꼽아본 지헌도 고개를 끄덕였다.
“기억을 잃었던 7년 동안 오빠가 깨달은 건?”
“성욕을 잃은 인생은 재미가 없다.”
대답은 1초의 망설임도 없이 튀어나왔다.
아이를 향해 그토록 애틋하고 다정했던 눈빛이 자신을 향하여 순간적으로 농염하게 반짝거려 오싹하기도 했다.
……못 말려.
하지만 그래. 정지헌답다.
기대했던 감동적인 대답은 아니었지만 정오는 웃을 수 있었다.
이런 한결같은 사람이니 나도 정신없이 빠졌던 거지.
이런 사람이니 나를 다시 찾아냈던 거겠지.
보이지 않았던 순간에도 늘 내 머릿속에 살았던 그대.
앞으로도 영원히 내 옆을 지킬 그대. 함께 살아갈 그대.
후생이 있다면 그 후생에서도 그가 자신을 찾아낼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정오는 남편의 허리를 꼭 끌어안았다.
<날 닮은 아이> 외전 마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