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스무 번째 투자.(5) >
토요일 새벽 5시.
나는 책상에 앉아서.
어젯밤 할아버지가 해주셨던 이야기를 떠올렸다.
취기가 있는 상태로 이야기를 했었지만.
그래도 대략적인 흐름은 모두 기억이 났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했다는 악재는 동일한데. 왜 미국 증시는 상승하고 유럽 증시는 하락할까요?"
"그게 왜 궁금하지?"
"당연히 궁금하죠. 자료를 다 찾아봤는데도 답을 알수가 없으니깐요."
"그래? 어떤 자료를 읽어봤는데?"
"경제기사들은 다 읽어봤어요. A사. B사. C사. D사까지. 다 읽어봤는데도 정답을 알수가 없더라고요."
2월 25일.
양방향으로 갈렸던 미국과 유럽 증시에 대한 분석은.
얼토당토하지 않은 이야기 뿐이었다.
어떤 전문가는.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전쟁이. 단기전으로 끝날 것이라는 기대감이 생겼기 때문에. 미국 증시가 상승했다'
라고 분석했다.
하지만 그런 논리라면 유럽 증시도 상승해야 했다.
또 어떤 전문가는.
'경제의 펀더멘탈이 튼튼할 경우. 지정학적 리스크가 발생하더라도 큰 충격을 받지 않는다.'
라고 설명하였지만.
이 부분역시.
미국과 유럽의 증시가 엇갈린것에 대해서는 설명이 되지 않았다.
해당 전문가의 말대로라면.
미국의 펀더멘탈은 튼튼하고.
같은날 폭락했던 독일과 프랑스. 그리고 영국의 펀더멘탈은 부실해야 했기 때문이다.
'결국.. 그냥 다 갖다 붙이는 이야기일뿐이잖아.'
- 테이퍼링
- 금리인상
- 물가인상
그동안 이런 단어들로 돌려 막기식 분석을 내놓았던 것까지 생각을 하니.
나는 더더욱 전문가들의 의견을 신뢰할수가 없었다.
그런데 어젯 밤.
할아버지께서는 내가 어디에서도 들을 수 없는 말을 해주셨다.
"호재와 악재는 시장이 만들기 나름이야. 그리고 그런 원인때문에. 같은 재료임에도 불구하고 미국과 유럽증시의 방향이 엇갈린거지."
"네? 그게 무슨소리에요? 호재와 악재가 만들기 나름이라니요."
"자. 자네도 머리가 있을테니 생각을 해보자고. 제롬 파월 FRB의장이 시중에 돈을 풀겠다고 말하면. 증시는 어떻게 되겠나?"
"그야 당연히 상승하겠죠."
"그렇게 판단하는 이유는 뭐지?"
"연준이 돈을 풀면. 달러 유동성이 늘어나게 되고. 그렇게 될 경우 막대한 자본이 주식시장으로 흘러들어가게 될테니깐요. 당연히 국내 증시도 미국 시장의 영향을 받아서 상승할거라고 예측하는거죠."
"너무 단순하구만. 틀렸어!"
"네? 틀렸다고요?"
"그래. 틀렸어."
공부를 많이 했던 터라.
할아버지의 질문에 막힘없이 대답했었는데.
할아버지는 나의 대답이 틀렸다고 말씀하시면서 고개를 가로저으셨었다.
나는 계속해서 어젯밤 할아버지가 해주셨던 말씀을 떠올렸다.
"만약 시장이. 해당 재료를 악재로 받아 들이고자 하면. 언론에서는 이렇게 말할거야. 연준이 긴급하게 돈을 풀어서 수혈해야 할 정도로. 시장 상황이 좋지 않다고 말이야."
"······"
"뉴스에서 종일 이렇게 떠들어대면. 그래도 돈을 푼다는 소식이 호재로 작용할까?"
"..!"
어젯 밤에 이미 한 번 전율이 감돌았던 말이었는데.
지금 다시 떠올려봐도.
또다시 온 몸에 소름이 돋았다.
차마 그런 부분까지는 생각지도 못했었는데.
할아버지는 수십년간의 투자 경험을 통해.
일반적인 전문가들보다 훨씬 더 높은 수준의 지식의 가지고 계셨다.
"자네도 주식을 투자해서 알겠지만. 가끔 그런걸 느껴보지 못했나?"
"어떤걸요?"
"이건 정말 호재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가가 오르지 않는다거나. 아니면 반대로. 별다른 악재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주가가 곤두박질을 친다거나 그런거 말이야."
"네. 있었어요. 선박회사가 대형 수주를 따냈다는 소식이 있었는데. 주가가 거의 변화가 없더라고요. 그리고 반대로. 별 쓰잘데기도 없는 뉴스로. 주가가 하한가를 치는 것들도 봤죠."
"그래. 잘 알고 있구만. 그게 뭘 뜻하겠나?"
"······"
"자본은 미국이든 유럽이든 아시아든 가리지 않아. 돈이 되는 곳이면 어디든 가지. 그리고 시장을 흔들고 변동성을 유발해서. 그 누구도 자신의 계획을 눈치채지 못하도록 만들어."
"······"
"결국 주가를 올리고 내리는 것은. 호재도 악재도 아닌. 자본의 의지. 그 자체야. 그런 관점에서 바라볼 때. 어제 미국 시장과 유럽 시장의 반응이 엇갈렸던 이유는. 자본이 미국 시장을 올리고. 유럽 시장을 내리기로 작정했기 때문이지."
"..!"
"이제 좀 알아듣겠나?"
"네.."
"조심 해. 자네 같은 친구가. 주식시장 좀 안다고 설치다가. 어렵게 번 돈을 한 번에 날리는거야. 양적완화 소식을 접하자마자 스스로 지수 하락을 예측하고 풋옵션을 매수하거든. 빈털털이가 되기 딱 좋은 루트지."
"······"
"뭐 내가 그런 말을 할 입장은 아니지만.. 크흠.."
"······"
"아무튼 시장을 예측하지 말고 대응하라는 격언이. 주식시장에 괜히 있는게 아니야. 시장 앞에서는 항상 겸손해야해. 누구도 믿지 말고 어떤 확신도 갖지 말고. 알겠나?"
"네. 알겠습니다. 명심하겠습니다."
여기까지.
나는 할아버지와 대화를 처음부터 끝까지 복기하면서.
메모를 마무리 지었다.
'시장에 정답은 없다.'
'자본이 가고자 하는 방향만 있을 뿐이다.'
'그러니 언제나 두려운 마음을 갖고 시장을 대하자.'
* * *
2022년 2월 26일. 토요일.
오늘은 동생이 집으로 오는 날이다.
여동생과 매제.
그리고 어머니를 포함하여 두 명의 조카까지 온다고 하였으니.
집으로 가면 북적북적 거릴것이 분명했다.
나는 집으로 출발하기 전에.
대표님이 건넨 제안을 받아들일지 말지.
그리고 나의 진정한 목표는 무엇인지에 대해서 생각해보았다.
'그리고..'
어젯밤 할아버지께서 해주셨던 말씀도 곱씹어 보았다.
그렇게 공부할 것들은 공부하고.
생각해 볼 것들을 생각하니.
어느듯 오전 8시가 되었다.
"꼬르륵.."
공부에 너무 에너지를 썼던 나머지.
예상보다 훨씬 더 빨리 배에서 알람이 울렸다.
'뭘 먹지?..'
어제 술도 먹었겠다.
국물이 땡겼기에.
나는 고시원 근처의 반찬가게에서 소고기 무국을 사오기로 했다.
* * *
오전 9시.
반찬가게에서 사온 무국을 냄비에 넣고 가열한 후에.
할아버지가 계신 방으로 갔다.
그리고 노크를 했더니.
안에서 할아버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할아버지에게 같이 아침을 드시지 않겠냐고 여쭤 보았고.
할아버지는 곧바로 문을 열어주셨다.
"무국?"
"네. 2인분 이상씩만 팔아서요. 저 혼자 먹으면 남길 것 같은데.. 괜챃으시면 같이 드세요."
"그래? 그럼 나야 고맙지."
"그럼 주방에서 기다리겠습니다."
"알았어. 내 금방갈게."
* * *
할아버지는 토요일 아침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출근 준비를 하고 계셨다.
듣기로는 어디 공장을 다니신다고 하셨는데.
정확히 어떤 공장을 다니시는지.
그리고 무슨 일을 하는지는 잘 모른다.
언뜻 관리직인것처럼 말씀 하셨지만.
세탁기에 돌리는 옷들이 먼지 투성이인것으로 보아.
관리자인 동시에 일도 같이해야 하는 일이 아닐까 싶었다.
'왜 이렇게 안오시지..'
주방에 앉아서 할아버지를 기다리고 있는데.
마침내 할아버지가 문을 열고 들어오셨다.
매일 같은 옷.
매일 같은 가방.
나는 그런 할아버지를 바라보며.
그릇에 옮겨 두었던 무국을 옆으로 밀어드렸다.
"드셔 보세요. 밀키트로 파는건데도 맛이 괜찮아요."
"밀키트? 그건 또 뭐야?"
"식사세트라는 의미에요. 야채와 채소. 그리고 소스와 고기까지 다 함께 포장이 되어 있어서. 간편하게 조리해서 먹을 수 있도록 나온거예요."
"아.. 3분카레 그런것처럼?"
"네. 그렇죠."
"그렇구만. 세상 참 좋아졌네. 3분카레처럼 무국도 다 해먹고 말이야."
할아버지는 숟가락을 들어서 국물을 한 모금 드셨다.
그리고 쩝쩝 거리시더니.
입맛에 맞으셨는지.
환한 미소를 지으며 말씀하셨다.
"맛 좋구만."
"맛있죠?"
"그래. 이게 그 밀크.."
"밀키트요."
"그래. 밀키트. 이것 참 신기하구만. 이건 어디서 파는 물건이야?"
"꼬마 분식집 옆에 빵집 있잖아요. 그 상가 건물로 들어가면 있어요."
"그렇구만. 나도 간간히 좀 사 먹어야겠네. 맛이 좋아."
"그렇죠? 저도 먹어보고 깜짝 놀랐어요."
엄마가 해주신것보다는 덜하지만.
그래도 제법 맛있는 음식이었다.
나는 할아버지와 아침식사를 나눈후에.
방으로 돌아왔다.
* * *
'돈이 많으면 뭐가 좋을까?'
내가 재벌 수준으로 돈을 많이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지금의 경제사정만으로도 한 가지 사실은 분명하게 느끼고 있었다.
가족들이 좋아하는 사소한 것들을. 돈을 신경쓰지 않고 사줄 수 있다는 것.
그것이 얼마나 행복한지 말이다.
[매탄 꽈배기]
나는 아버지가 좋아하시는 꽈배기 집으로 갔다.
그리고 메뉴판을 둘러보았다.
[꽈배기 3개 : 2천원]
[도너츠볼 2개 : 천 원]
[단팥 도너츠 : 개당 천 원]
[핫도그 : 개당 천 오백 원]
"꽈배기 9개랑. 도너츠볼 10개랑.. 그리고.. 단팥 도너츠도 5개만 넣어주세요. 아! 그리고 핫도그도 하나만 주세요."
나는 온 가족이 넉넉히 먹을 만큼 꽈배기를 주문했다.
그리고 조카가 핫도그를 먹을수 있다는 생각에.
핫도그도 하나 주문했다.
"설탕은 한쪽만 묻혀 드릴까요? 아니면 양쪽 다 묻혀 드릴까요?"
"한쪽만 묻혀주세요."
잠시 후.
마지막 핫도그까지 깔끔하게 포장을 한 후 주인이.
총 금액을 불러주었다.
"다 합해서 만 칠천 오백원입니다."
"여기 있습니다."
나는 체크카드를 내밀었다.
신용카드에 비해 디자인이 좀 구린면은 있지만.
빚때문에 십여년간 고생하시던 어머니와 아버지의 모습을 떠올려 보면.
앞으로도 신용카드를 발급받는 일은 없을 것 같았다.
"여기있습니다. 감사합니다."
주인은 결제를 마친 후.
영수증과 카드를 나에게 돌려주었다.
나는 그것을 받아들고 가게를 나왔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가기 전에.
어머니가 좋아하시는 쫄면과.
조카가 좋아하는 장난감도 샀다.
"그래봤자 8만 8천원 썼꾸나.."
주식으로 하루에 수 천만 원도 벌어봤는데.
그때의 기쁨보다.
지금 쓴 8만 8천원의 행복이.
훨씬 더 크고 값어치 있게 느껴졌다.
'어떻게 돈을 버는것보다 쓰는게 즐겁냐..'
나는 곧이어 보게 될 가족들을 생각하며.
걸음을 빨리했다.
* * *
한 달에 한 번 올까말까한 집인데도 불구하고.
비밀번호는 기억을 떠올릴 필요없이 자동으로 누르게 되었다.
그렇게 문을 열고 들어가자.
소파에 앉아있던 여동생이 나를 발견하고는.
조카에게 내가 온 것을 알려주었다.
"하준아! 삼촌 왔다."
곧이어.
"형님. 오셨어요?"
라며.
동갑내기 매제가 반가운 미소를 지으며 나왔다.
그리고 그 뒤로는 식탁에 앉아 계시던 아버지와.
부엌에서 뭔가를 조리중이시던 어머니가.
차례대로 나를 바라보시며 반겨주셨다.
"왔어?"
"네."
"배고프지?"
"아니요. 아침먹고 와서 아직 배는 안고파요."
그 순간이었다.
방에서 첫째 조카가.
다다다닥- 뛰어오는 소리가 들려왔다.
"삼초오오오온!"
첫째 조카가 달려오는 모습에.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여동생과 매제까지.
모두 웃음을 터뜨렸다.
나는 손 소독제로 손을 깨끗하게 세척한 후에.
달려오는 조카를 번쩍 안아주었다.
그러자 조카는 나에게 안긴채로.
오늘 하루동안 무엇을하며 놀 것인지.
자신의 계획을 상세하게 말해주었다.
"삼촌. 이번에 좀비게임 업데이트 됐어. 우리 빨리 후이즈 좀비 게임하자. 삼촌이 경비해. 난 좀비할게."
"그래. 그러자."
벌써부터 다크서클이 눈밑으로 내려오는것 같았지만.
나는 기꺼이.
조카의 상황극 놀이에 동참해주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