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5화 - 박형복의 결정체(3)
105화
별빛 모양의 손바닥만한 결정체가 눈앞에 있다.
‘일반적인 결정체와는 좀 다르군.’
보통 결정체는 푸르스름한 빛이 난다.
그런데 영광이 얻은 결정체는 은빛으로 반짝였다.
‘사실 박형복의 몸속에서 굳이 결정체를 빼낼 이유는 없었다.’
그럼에도 빼낸 이유는 한가지 궁금증 때문이었다.
박형복은 키메라 프로젝트를 위해 일반인들을 사로잡아 지하 공동에 감금했다.
감금대상이 능력자였던 전상영 때와는 차이가 있었다.
“상태창. 아이템 세부목록 열람.”
영광이 상태창을 열어 결정체의 세부목록을 살폈다.
*
[박형복의 결정체(특대 : 흡수형)]
[박형복이 인위적으로 만든 결정체. 수백명의 우성인자가 스며들어 있다.]
“그렇군··· 놈이 계획한 건 키메라 프로젝트가 아니었어."
상세 문구를 바라보는 영광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박형복은 인간들의 우성인자를 추출하여 한데 모아 결정체로 제작한 뒤 강제적으로 자신의 몸에 이식한 것이었다.
'무모하기 짝이 없는 짓이지.'
인위로 만든 결정체를 강제적으로 채내에 이식할 경우 극심한 거부반응으로 인해 목숨을 잃을 수도 있다.
아니, 애당초 성공확률이 극악이라 시도조차 하지 않는 시술 그 자체였던 것.
어쨌든 그런 실날같은 확률을 뚫고 박형복은 절대적인 힘을 얻었다.
물론 그 결과는 죽음으로 이어졌지만.
스윽.
영광이 결정체에 손을 댔다.
흡수형 결정체를 사용하는 법은 일반적인 마력 도구를 사용하는 법과 별반 다를 바 없다.
그저 마력을 부여하기만 하면 그만이다.
하지만···.
“꺼림칙하군. 어찌됐든 수많은 사람의 희생으로 만들어진 결정체니까.”
영광이 이맛살을 찌푸리며 결정체를 파괴하려 했다.
보상이 아깝긴 해도 많은 희생속에 탄생한 결정체를 흡수하려고 하니 여간 마음이 불편하지 않을 수 없었다.
웅웅웅.
결정체를 부서트릴 생각으로 손아귀에 힘을 줬다.
결정체가 파르르 떨며 영광의 힘을 최대한 막아내려 했다.
마치 생명체 같았다. 죽지않기 위해 항거하듯 발광을 뿜었다.
ㅡ죽고싶지 않아.
ㅡ살려줘.
결정체가 그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아니, 다시 들어보니 인간의 목소리였다.
그것도 한 두 목소리가 아닌.
ㅡ사사살려려려려줘줘줘어······.
이윽고 수백개의 외침이 겹치듯 들려왔다.
절규와 비탄으로 이뤄진 목소리.
영광은 문득 귀를 막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ㅡ세상을 변화시키고 싶어. 비록 작은 힘이지만··· 그래도 난······.
또 하나의 목소리가 또렷하게 들려왔다.
앳되보이는 소녀의 목소리였다.
"······!"
영광이 화들짝 놀라 움켜쥐었던 손아귀에 힘을 뺐다.
수백 가지나 되는 외침이 서서히 잦아들며 소녀의 목소리만이 들려왔다.
위이이잉.
거역할 수 없는 기억의 편린들이 마구잡이로 머리속에 구겨넣어졌다.
소녀의 기억들이었다.
[유수연.]
그것은 소녀의 이름이었다. F급 최하위 능력자.
기억에 비친 그녀의 갸름한 얼굴은 아직도 소녀다움의 순수함을 간직하고 있었다.
끼이이익.
소녀가 건장한 사내들과 함께 어디론가 가고 있었다. 일행은 그녀뿐만 아니었다. 많은 인원이 지하 공간으로 진입하고 있었다.
얼마 전 영광이 류태철로 사칭하여 끌려왔을 때와 같은 지하 공간이었다.
또각또각.
유수연은 부푼 꿈을 가지고 지하로 진입했다.
사내들의 말로는 단순히 지하 광물의 캐내 지상으로 옮기는 일만 하면 된다고 했다.
능력자인 그녀에겐 쉬운 일이었다.
게다가 많은 보수도 지급받는다.
F급 능력자 유수연. 그녀가 이곳에 온 이유는 돈을 벌어 던전탐사에 필요한 생필품을 구매하기 위해서였다.
어린 나이에 능력자로 각성했던 터라 쫓겨나다시피 학교를 그만둬 시간도 널널했다.
일반인들에겐 능력자는 선망의 대상이지만, 때로는 공포로 군림했다.
지금 시대엔 능력자는 사고의 근원이다.
갑작스레 엄청난 힘을 얻는다고 생각해보자.
아마 대부분은 힘에 취해 많은 사고를 야기하겠지.
능력자로 각성한 순간 일반 학교에 진학하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능력자들은 나이, 성별 가리지 않고 길드나 클랜에 가입하여 생업을 유지한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그녀는 F급 능력자다.
F급 능력자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
길드나 클랜에서도 번번이 퇴짜를 맞았다. 포션같은 소모품을 충당하기 위해 일용직을 전전하여 겨우겨우 던전 몇 번 도는게 F급 능력자들의 일상이었다.
유수연과 일행들은 깊숙한 지하로 향했다. 더 이상 햇빛이 보이지 않았다.
사방이 어두컴컴했고 진입할수록 사람들의 얼굴조차 분간할 수 없을 지경이었다.
팟!
어느순간 주위가 환해졌다. 벽면에 걸친 횟불들이 일제히 켜졌다.
그것을 기점으로 선두에 선 사내가 턱짓했다.
ㅡ쓸어버려.
비극의 서막이 시작되었다.
공동에 들어서는 순간 친절했던 사내들은 야수가 되어 그녀와 주위 사람들을 무자비하게 공격했다.
그제야 유수연은 이 모든 게 함정이라는 걸 깨달았다.
절망섞인 비명이 여기저기서 터져나왔다.
하지만 단 한명.
유수연만은 침착했다.
ㅡ제가 막겠습니다! 모두 물러서세요!
유수연이 호신강기를 펼쳤다. 클래스는 수호술사. 쉴더과 비슷한 직군으로서 아군을 방어하는데 용이한 클래스다.
타원형 방어막이 일행들을 보호했다.
일행들은 유수연이 능력자라는 걸 알고는 잠깐이나마 환호했다.
하지만 환호가 절망으로 되기까지의 시간은 얼마 걸리지 않았다.
와장창!
유수연은 약하다.
애당초 F급 능력자가 D~C급으로 구성된 사내들의 공격을 막아내긴 역부족했다.
퍼억!
유수연은 사내들의 부츠에 짓밟혔다. 비단 같은 푸른 빛 머릿결은 진흙에 엉켜 흙탕물에 뒹굴었다.
그럼에도 눈빛만큼은 사내들을 찢어발길듯 강렬했다.
“절대로··· 물러서지 않아······!”
그녀는 사람들을 구하고자 했다.
만인을 구하고자 하는 작디작은 소망만큼은 그녀의 의지를 반영하듯 고결했다.
우득.
가느다란 손이 사내의 발목을 잡았다. 소녀의 악력이라고는 믿기지 않는 수준이었다. 절대로 놓지 않으리라. 수십 수백 번을 되뇌며 전신이 질질 끌려가는 상황에도 끝끝내 놓지 않았다.
그러나 그것은 돌이킬 수 없는 비극이 되었다.
써걱!
팔이 날아갔다. 그럼에도 흔한 신음조차 내지 않았다. 반대편 팔이 잘려나가자 이를 드러내며 부츠를 물어뜯었다. 이가 발굽에 차여 날아가자 잇몸으로 물었다.
“이이··· 미친년이···!”
유수연의 집념에 사내들도 혀를 내둘렀다.
집념으로 이글거리는 눈빛에 등골이 서늘할 지경이었다.
“비켜라.”
사내 한 명이 나섰다. 그가 기다란 랜서를 수직으로 들었다.
푸왁!
랜서가 허우적대는 유수연의 등을 찔러 들어갔다. 억! 하는 한 맺힌 마지막 비명이 그녀의 마지막 유언이 되었다.
작디작은 소녀의 희망이 덧없이 으스러져 갔다.
만개해보지 못한 꽃봉오리가 처량하게 흩날려갔다.
그것이 유수연이라는 F급 능력자의 마지막 삶이었다.
"빌어먹을."
봐선 안될 걸 본 것 처럼 영광이 눈을 질금 감았다.
이토록 죄없는 이들이 지금 이순간에도 어디에선가 가축처럼 죽어나간다.
그것이 암흑기와 같은 지금의 시대였다.
더 이상 이런 희생자를 막기 위해서라도···
영광은 선택해야만 했다.
“···너의 그 의지만큼은 내가 이어받겠다.”
생각을 바꿨다. 그가 결정체를 쳐다보았다.
이름 모를 수많은 이들의 유전자가 응집된 결정체. 그들의 희생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끔찍한 결과물.
이들을 위해서라도.
올바른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
영광이 결정체를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당신들의 유지를 이어받고··· 난 한층 더 강해지겠다. 나와 함께, 혼란한 세상을 바로잡기 위해 같이 싸웁시다.”
영광은 결정체를 사용하기로 했다. 만인을 지키기 위해서, 마영우를 쓰러뜨리고 새로운 세상을 만들기 위해선 한시라도 빨리 강해져야만 한다.
그러한 수단과 방법이 비록 세간의 지탄을 받을지언정 거리낌없이 사용하리라.
파쓰쓰쓰쓰.
손아귀에 쥔 결정체에 마력을 부여했다. 둔탁한 공명음과 함께 환한 빛무리가 영광의 전신을 감쌌다. 마치 새로운 생명을 얻은 것처럼, 흡수당한 결정체에선 비명이 사라지고 환희로 채워졌다.
[모든 능력치가 300포인트 상승하였습니다.]
[모든 원소계열의 저항력이 비약적으로 증가합니다.]
[화염의 가호가 화염 내성 퍼펙트 마스터리로 진화됩니다.]
[역대급 희망이 2단계로 상승됩니다.]
"흠!?"
엄청난 보상 퍼레이드였다.
능력치 300포인트에 이어 원소 저항의 상승.
화염 내성 퍼펙트 마스터리까지!
모든 화염 공격을 차단하는 화염 내성 퍼펙트 마스터리를 습득한 영광은 더 이상 화염 공격에 대해 빙결같은 수단을 대비할 필요성이 없게 되었다.
“그리고 역대급 희망 2단계···.”
영광이 마도를 들어 뇌신강기를 펼쳤다. 살짝 시전했음에도 손가락이 저릿저릿하다.
빠지지지직!
칼날을 타고 흐르는 뇌전이 팍팍 터져댄다.
한눈에 봐도 범상치 않아 보였다.
“시험 삼아 시전하기도 애매하군. 기회가 된다면 그때 사용하도록 해야겠어.”
영광이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마도를 거뒀다.
“음?”
그때였다.
온몸에서 용솟음치듯 마력의 물결이 퍼져대기 시작했다.
[우성유전자가 대량으로 이식되어 당신의 신체가 재구성됩니다.]
"아직 보상이 끝나지 않았나?"
또 하나의 메시지가 망막을 스친다.
영광은 놀랄 새도 없이 온몸이 뜨거워짐을 느꼈다.
우드득. 우드득.
‘예전과 같은 신체적 변화가 일어나는 건가?’
에르메니아의 가호를 처음 받았을 때의 강렬한 느낌과 흡사하다.
영광은 자연스럽게 변화되는 과정에 몸을 맡기기로 했다.
욱신대던 뼈마디들이 탄력을 받아 굵어졌고 온갖 통증이 사라졌다. 총기 돋는 눈가에선 대기를 가르듯 빛이 쏟아졌다.
얼굴 근육들이 들썩거리며 윤곽은 더욱 입체적으로 변했다.
뚜둑.
영광이 손가락을 꿈틀거렸다. 손아귀의 악력이 전과는 확연히 달랐다. 조금의 움직임에도 그는 스스로가 한단계 더 강해졌음을 느꼈다.
그리고 그 결과를 직접 눈으로 확인하기로 했다.
“상태창.”
*
이름 : 류영광
LV : 804
직업 : 카피술사
힘 : 1,785
마력 : 1,142
민첩 : 2,058
체력 : 1,193
능력치 총합 : 6,178
패시브 스킬 : 최대보상(SSS급) , 스킬카피(SSS급) , 절대방벽(SSS급) , 화염의 가호(SS급).
엑티브 스킬 : [붕대포박(S급)] [관찰자(A급)] [파이어 블레스트(B급)] [은신(S급)] [패왕격권(SS급)]
궁극 스킬 : 회귀(SSS급: 사용불가) , 역대급 희망(SSS급 : 2단계).
*
"드디어 능력치 도합이 6천대를 넘어섰군."
영광은 잠시나마 쉼호흡을 하며 눈을 감았다가 떴다.
이제 조금만 더 노력하면 SS급의 경지에 이르게 된다.
"흐음······."
떨리는 마음을 잠시 진정시켰다.
그는 아직 할일이 많았다.
* * * * *
“대장~~!”
영광이 본부에 들어서자마자 핀이 돌진하듯 날아와 영광을 끌어안았다. 영광이 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버선발로 뛰어오는 대원들을 바라보았다.
“대장!”
“대장님!”
대원들이 여기저기서 몰려와 영광에게 고개를 숙였다. 영웅에 대한 예의였다.
중립파 길드장들도 영광의 공로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들의 표정은 어느새 경외심으로 가득했다.
‘세상에··· 정말로 박형복을 쓰러뜨렸어······.’
결코 일어나지 못하리라 생각했던 일들이 일어났다.
강원도에 온 지 한 달도 안되서 일궈낸 쾌거였다.
“형님!”
남인철이 다가왔다. 붉게 달아오른 눈가엔 당장이라도 눈물이 왈칵 쏟아 내릴 것만 같았다.
“정말로 고생 많았어. 우리가······ 우리가 정말로 해냈다고!”
“그래. 너도 고생 많았다. 모두의 힘이 없었다면 이번 전투는 이기기 어려웠을 거다.”
"크으윽···!"
남인철이 영광을 격하게 끌어안았다.
대원들의 환호성이 여기저기서 터져 나왔다.
‘잠깐만··· 왜 이렇게 몸이 단단하지?’
남인철이 한층 더 단단해진 영광의 바디에 눈이 크게 떠졌다.
영광의 몸체는 무쇠처럼 단단했다.
일반적인 근육과는 차원이 달랐다.
“형님. 근데 뭔가 변한 것 같은데?”
“맞아요. 그러고 보니 얼굴도 좀 바뀐 것 같은데요?”
핀과 남인철이 눈을 비비며 영광을 쳐다보았다.
‘확실히 달라졌어.’
입체적인 윤곽. 오똑한 콧날.
생채기조차 없는 백옥같은 피부.
달라져도 너무 달라진 모습이었다.
“설마 퀘스트 보상으로 천년 묵은 산삼이라도 나온 거야?”
남인철이 실없는 농을 던졌다.
영광이 피식 웃으며 답했다.
“뭐 그렇다고 할 수 있지.”
영광이 조용히 웃으며 즉답을 피했다. 남인철과 핀은 그려려니 했다.
전투를 할때마다 어마어마하게 강해지니 이제는 새삼스럽지도 않은 듯 하다.
'너무 들떠 있군. 아직 전쟁중이거늘.'
장내 분위기는 화끈 달아올라있었다. 그도 그럴게 불가능이라 여겨진 박형복을 처치했으니 말이다.
하지만 이럴때일수록 더욱 철처히 마음을 다스려야 한다.
아직 전쟁은 끝나지 않았기에.
영광이 돌연 웃음기를 멈추고는 말했다.
“아직 방심하긴 일러. 적의 잔존세력이 남아있는 상태에서 긴장을 늦춰선 안 되지. 어쩌면 놈들은 죽기 살기로 덤벼댈지도 몰라. 모두 경계를 늦추지 마라."
영광의 말에 떠들썩했던 분위기가 금세 가라앉았다.
박형복이 죽은 이상 대창길드의 반응은 두 가지로 나뉜다.
이성을 잃고 맹렬하게 저항하거나 혹은 전의를 상실하거나.
확신할 순 없지만, 전자로 흘러간다면 다시 한번 치열한 전쟁을 벌여야 할 터다.
영광의 말에 대원들의 마음이 무거워졌다.
“하지만.”
영광이 좌중을 둘러보았다.
“오늘만큼은 진득하니 취하고 싶군. 그런 의미에서 한잔하러 갈까? 오늘은 내가 거하게 사도록 하지."
영광이 활짝 웃으며 말했다.
언제 그랬냐는듯 대원들이 환호성이 메아리치듯 울려 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