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8화 - 드러나는 신족들의 계획(1)
128화
“몸은 괜찮냐?"
“말도 마. 진짜 죽을 것 같아. 손가락 하나 움직이는 것도 힘들어.”
“그런 것 치고는 표정이 좋아 보이는데?”
영광이 남인철을 바라보며 씩 웃었다.
‘이상해. 정말로 힘든 건 맞는데 형님을 보자마자 힘이 솟아오르는 것 같아.’
남인철이 주먹을 불끈 쥐었다. 가슴을 압박하던 긴장감이 눈 녹 듯 사라지는 듯 했다. 영광의 존재만으로도 천군만마를 얻은 기분이었다.
“재회의 기쁨은 여기까지 하도록 하자. 아직 놈들이 바글바글하군."
영광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기세등등한 바쿡들이 인간들의 등장에 사뭇 겁을 먹곤 뒤로 물러섰다.
“조심해. 놈들은 독침이 있어. 살짝만 스쳐도···.”
“걱정 마라. 바쿡에 대한 파훼법은 이미 대비해놓은 상태니까.”
“뭐?”
남인철의 눈이 크게 떠졌다.
“독침보다 사거리가 넓은 무기로 상대하면 그만이지.”
영광이 자신만만하게 웃으며 활을 꺼내 들었다. 그러자 몇 명의 궁수들이 그와 함께 보조를 맞췄다.
‘아무리 형님이라도 활을 다루긴 쉽지 않을 텐데···.’
활 같은 원거리 무기는 근접무기와는 달리 많은 숙련도와 집중력이 있어야 하는 무기다.
게다가 SSS급 던전에 나오는 몬스터들은 어지간한 원거리 공격에 내성이 갖춰져 있어 수준급 궁수가 아닌 이상엔 제대로 된 타격조차 입히지 못할 터다.
······그럴 터였는데.
피슛!
활시위를 떠난 화살들이 바쿡의 머리와 몸통을 꿰뚫었다. 바쿡 몇 마리가 그대로 쓰러졌고 남은 무리들이 기겁하며 달아났다.
“무, 무슨!?”
구경하던 남인철이 화들짝 놀라며 묵묵히 활시위에 화살을 메기는 영광을 바라보았다. 활을 다루는 솜씨가 수준급이다. 옆에 있던 전문 궁사들과 비교해서 전혀 꿀리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명중률만 놓고 보면 영광의 활솜씨가 훨씬 우위였다.
‘저, 저건 또 뭐야?’
남인철의 눈엔 곧 영광이 들고 있는 화살통으로 시선이 향했다. 빈 화살통이지만 손을 댈 때마다 화살이 무한으로 생성되고 있었다.
“궁수들은 그대로 바쿡을 쫓아가. 나머지는 우회해서 포위망을 구축해.”
영광이 대원들에게 명령하며 도망가는 바쿡들을 쫓았다. 궁수를 제외한 다른 대원들은 독침 사거리 반경에 닿지 않은 정도까지 다가가 바쿡들을 포위했다.
“키르륵!”
“키륵!”
바쿡들이 괴성을 지르며 위협했다. 살기위한 처절한 몸부림이었다.
“빌어먹을 바퀴벌레 놈들···.”
대원들은 전혀 망설임이 없었다. 이미 영광과 함께 계속해서 호흡을 맞춰 온 까닭에 어렵지 않게 바쿡들을 상대할 수 있었다.
“키이익! 키이익!”
그중 한 마리가 동료들의 희생을 이용하여 포위망을 뚫고 도망쳤다. 대원들이 당황하며 바쿡을 쫓아가려 했다.
“물러서라.”
영광이 그렇게 말하곤 화살을 메긴 후 활시위를 팽팽하게 당겼다. 찡그린 오른쪽 눈이 도망가는 바쿡의 등을 정확히 확인했다.
곧 화살이 활시위를 떠났다.
피슉!
“키이이이이이이ㅡ!”
정확히 뒷목에 화살이 꽂혔고 바쿡이 몇 걸음 걷다 픽 쓰러졌다. 근접 대원들이 달려가 바둥바둥 대는 놈의 심장을 향해 검을 내질러 목숨을 끊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이어지는 보상 문구. 대원들이 환호성을 지르며 승리를 자축했지만, 영광은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경거망동 하지마라. 아직 놈들이 주위에 있을 수 있으니 주위를 살펴.”
들떠있던 대원들이 흠칫하며 주변을 수색했다. 역시나 영광의 말대로 숨어 있던 바쿡 일부가 발견되었고 어렵지 않게 놈들을 처치할 수 있었다.
그리고는 핀의 천리안까지 사용하여 꼼꼼히 확인한 끝에 몬스터가 없다는 걸 확인했고 그제서야 휴식명령을 내렸다.
“1시간 정도 휴식한다.”
남은일은 남인철과 문성현의 치료. 영광이 핀을 시켜 그들을 돌보며 직접 경계를 섰다.
‘조금의 틈조차 주지 않는군.’
'노련미가 확실히 남달라.'
대원들은 영광의 철두철미함에 혀를 내둘렀다. 더군다나 본인 스스로가 직접 경계를 도맡아서 하다 보니 없던 충성심이 절로 생길 지경이었다. 굳이 명령하지 않았음에도 대원들은 서로가 앞다투어 경계 임무를 자진했다.
“대단해. 형님은 벌써 중립파 대원들의 마음을 사로잡았어.”
치료 중인 남인철은 영광을 보며 다시 한번 감탄했다. 지휘경험이 풍부한 그로서는 사람 다루는 일이 가장 힘들다는 것을 잘 안다. 인간은 서로가 제각기 다른 성격을 가지고 있어 인원이 많을수록 다루기가 힘들다.
영광은 짧은 시간 내에 타 대원들의 적극적인 지지를 받는 데 성공했다. 그들의 전 길드장 박정석을 까마득히 잊은 지 오래다.
“그렇죠? 박정석의 공백이 무색할 정도예요. 이제 그 여자만 찾아서 합류하면 던전공략이 수월할 거에요.”
남인철을 치료 중이던 핀이 말했다.
“그 여자··· 한승아를 말하는 거냐? 그러고 보니 녀석과는 합류하지 못했군.”
남인철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그간 티격태격하며 미운 정이라도 들었는지 한승아가 보이지 않자 살짝 걱정되었다.
“뭐 염려 안 하셔도 되요. 지금쯤이면 혼자서 10층은 거뜬히 돌파했을걸요?”
“그걸 어떻게 알아?”
남인철이 물었다.
핀은 답하지 않고 천리안을 펼쳐 푸른점을 가리켰다.
“이게 그 여자로 추정되는 푸른 점이에요. 보다시피 혼자서 10층을 넘어 11층에 진입했네요.”
설명하는 핀도 한승아의 힘에 탄복하듯 말했다.
“역시 강하군.”
남인철도 고개를 끄덕이며 천리안을 예의주시했다. 확실히 놀라운 돌파력이었다.
“하지만 이상해. 한승아가 강한 건 진작부터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까지 강한 걸까? SSS급 던전을 혼자서 돌파할 정도로···?”
“원래부터가 강했잖아요. 더군다나 자이언트 웜의 혈액을 마셔서 더욱 파워업을 한 상태고요.”
“아니. 그건 말이 안 돼. 혈액의 효능이 있다 해도 던전을 혼자서 돌파하긴 어려워.”
남인철이 말을 멈추곤 생각에 잠겼다. 그는 한승아와 겨뤄본 몇 안 되는 인물이다. 확실히 실력은 일류지만 혼자서 던전을 돌파할 정도로 강하다곤 생각되지 않았다.
애초에 그 정도 힘이 있었더라면 1층에서 만난 사이클롭스를 상대로 손쉽게 격파했을 터다. 실제로 고생 끝에 1층을 간신히 클리어했을 정도였으니까.
“인철이 말이 맞아. 아무래도 우리가 모르는 뭔가가 있는 것 같다.”
어느새 그들에게 다가온 영광이 말했다.
“형님도 그렇게 생각하지?”
“그래. 웜의 혈액이든 단기간 레벨업이든 혼자서 SSS급 던전을 고층을 손쉽게 넘나드는 건··· 현존 최강의 능력자라고 불리는 마영우조차 불가능한 일이지.”
인간 개개인마다 개성이 있듯 몬스터도 마찬가지다.
예컨대 어떤 몬스터는 물리 공격에 취약하다든지, 혹은 마법이나 원거리 공격에 약하고, 강하고의 상성 관계가 존재한다.
던전 공략을 위해 여럿 능력자들이 파티를 맺는 이유가 바로 서로의 부족함을 보완하기 위함이다. 하급 던전이라도 홀로 클리어하기 위해선 던전 등급보다 몇단계나 높아야 공략이 가능하다.
특히 영광같은 몬스터 지식이 풍부한 지휘관은 더할나위없이 귀중한 인력이다. 10명의 S급 능력자보다 1명의 훌륭한 지휘관이 던전 공략에 각광받는다.
“내가 아는 한승아는 몬스터 공략법 따윈 몰라. 그저 힘으로만 헤쳐나갈 단순한 녀석이지. 그래서 더욱 이상하다는 거다.”
“그걸 알았으니 한시라도 빨리 녀석을 만나야겠구만.”
남인철이 몸을 일으켰다. 핀의 메가힐과 포션의 힘으로 몸 상태가 훨씬 좋아진 상태였다.
“걱정 끼쳐서 죄송합니다.”
누군가가 다가왔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정신을 잃고 쓰러졌던 문성현이었다.
“너 몸은 괜찮냐?”
“네. 100%는 아니지만 후방지원 정도는 충분합니다.”
어느새 문성현도 정신을 차려 전투에 임할 수준으로 컨디션을 되찾았다.
이제 남은 건 한승아와의 합류였다.
“다들 어느 정도 컨디션을 되찾았으니 슬슬 출발하자.”
짝짝!
영광이 손뼉을 치며 대원들을 불러모았다. 대원들이 삼삼오오 몰려들며 병장기를 점검했다.
‘한승아가 11층까지 뚫어놨으니 남은 건 12층과 마지막 보스방 뿐이군.’
영광은 던전 클리어가 멀지 않았음을 느꼈다.
한승아만 합류한다면 기나긴 던전 공략이 끝날 것이다.
* * * * *
콰아앙ㅡ!
뼈 갑옷이 박살 난 해골 전사들이 비틀거리며 주저앉았다.
단순한 해골 전사들은 아니다. ‘데스나이트’ 라 불려오는 언데드 최강의 전사들. 인간의 원한과 사념이 뭉쳐 탄생한 데스나이트들은 몬스터도감에서도 최고등급을 받을 만큼 한 마리 한 마리가 일개 도시 정도는 가볍게 박살낼 전력을 갖춘 치명적인 존재들이다.
한데 기이한 일이 벌어졌다.
놀랍게도 그 전사들은 단 한 명에게 무참하게 박살나고 있었다.
“꺼져버려!”
머더 프린세스 한승아. 그녀가 새하얀 백의를 휘날리며 데스나이트들에게 접근했다. 그녀의 오른팔이 암운에 휘감겨있었다.
콰직!
오른팔에 맞닿은 데스나이트의 갑옷이 형편없이 찌그러졌다. 곧 사방팔방에서 날아 들어오는 광선검을 피하며 차례대로 데스나이트들을 찢어발겼다.
끼기기긱!
데스나이트들이 울부짖으며 사지가 짖찢어졌다. 한승아가 우악스럽게 닥치는 대로 찢었다. 손아귀에 잡히는 모든 신체가 깡통처럼 찌그러지며 찢어졌다.
하지만 데스나이트는 인간과는 다르다. 그들은 공포나 절망같은 감정이 없다. 그저 자신이 쓰러질 때까지 상대를 물고 늘어질 뿐이다.
“아직도 깝친다 이거지?”
한승아가 차갑게 웃었다. 입가에 걸린 한기서린 미소에선 냉혹함만이 뚝뚝 떨어졌다.
위이이이잉.
그녀가 손을 들었다. 손바닥에선 흑색 잔상이 진하게 늘어졌다. 마치 검정 핏물이 뚝뚝 떨어지는 것 같았다.
“찢어발겨라.”
손아귀가 주먹으로 꽉 말아쥐었다. 그리고는 주먹을 젖혀 오른발로 지면을 쾅! 밟으며 상체가 앞으로 나아갔다.
“패왕격권!”
콰아아아아아앙ㅡ!
곧게 뻗은 주먹에선 흑빛의 마력이 파도처럼 쏟아졌다. 파도가 범람하듯 넘실거리며 일시에 데스나이트들을 휩쓸고 지나갔다. 뼈가 뒤틀리는 소리가 요란하게 들려왔다.
스스스스스스.
주먹이 뻗은 정면에선 지면이 갈리며 모든 방해물이 재로 화했다. 땅바닥에서 연기가 자욱하게 밀려왔다. 데스나이트의 뼛조각으로 추정되는 뭔가가 검게 그을린 채 바닥을 뒹굴었다.
“하아, 하아······.”
한승아가 두 손으로 자신의 무릎을 잡곤 노곤한 한숨을 내쉬었다. 상당한 체력이 소모된 듯했다.
ㅡ큭큭··· 내가 준 힘을 이렇게나 단기간에 습득할 줄이야. 역시 네 녀석과의 계약은 최고의 선택이었다.
조롱하는 듯한 음침한 목소리가 허공에서 들려왔다.
마치 절대자의 말투처럼.
"그레비··· 갑자기 생뚱맞게 나타나선 이런 사기적인 힘을 준 이유가 대체 뭐냐?"
그레비는 한승아와 계약한 신족이었다. 계약 후 한 번도 모습을 나타내지 않던 그가 왜 이제야 자신의 앞에 모습을 드러낸 걸까?
ㅡ나의 충실한 하수인이여. 이제 때가 됐다. 나와의 계약이행을 위해 녀석을 죽여라.
그레비가 말했다. 음침하고 둔탁한 목소리에 소름이 돋을 지경이었다.
“녀석을 죽여라고? 그건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지?”
앙칼진 눈매를 치켜뜬 한승아가 물었다.
곧 그레비의 장엄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ㅡ가증스러운 에르메니아. 그 계집의 후원자인 ‘류영광’을 죽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