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1화 - 보스 몬스터의 정체(1)
131화
* * * * *
“······내가 겪은 이야기는 여기까지야.”
한승아는 자신이 겪은 모든 이야기를 영광에게 들려주었다.
영광은 팔짱을 낀 채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신족들이 기를 쓰고 능력자들과 계약을 맺으려 한 거로군.”
어지럽게 펼쳐진 퍼즐 조각이 점점 제자리로 맞춰져 가는 듯 했다.
역시나 이유 없는 호의 따윈 없다는 그의 판단대로였다.
“운이 좋았다고 할까? 녀석이 내 몸에 들어왔을 때 잠시나마 놈이 가진 일부 지식이 머릿속으로 흘러들어왔었어.”
그레비와의 강제 융합 때 한승아는 신족의 지식 일부를 습득할 수 있었다. 방대한 수준은 아니었지만 왜 신족들이 능력자들과의 계약에 집착하는지에 대한 이유 정도는 충분히 알 수 있을 정도는 됐다.
신족들이 왜 그렇게 인간과의 계약에 집착하는지를.
“본격적으로 신족들이 움직인 이상 속히 능력자들을 하나로 뭉쳐야 한다. 그러기 위해선 마영우. 녀석을 빠르게 제거해야 해.”
마영우의 제거는 단순히 복수뿐만 아니라 인류를 위해서이기도 했다.
영광은 앞으로의 일을 곰곰이 생각했다.
당장에 이 사실을 언론에 알릴까도 생각해봤지만 이내 그런 생각을 접었다.
‘이런 비현실적인 말을 믿을 사람은 아무도 없겠지. 그렇다면 내 힘으로 모든 길드를 강제 병합한 뒤 신족들에게 대항하는 수밖에 없겠군.’
그러기 위해서는 대창길드와의 전쟁에서 반드시 승리해야 한다.
‘마영우. 그 녀석도 신족과 손을 잡았다고 들었다. 녀석의 삐뚤어진 야망은 신족의 완벽한 강림을 의미한다. 놈의 성향상 목적을 위해서라면 어떤 짓을 마다하지 않을 터.’
더군다나 에르메니아의 마지막 말이 마음에 걸렸다.
‘분명히 완벽한 마영우··· 라고 했지.’
영광은 생각을 정리했다.
먼저 마영우와 손을 잡은 퀴르켈이라는 신족의 수식어는 ‘마신’ 이다.
마신의 의미는 결코 긍정적이지 않다. 신족 중에서도 손꼽히는 힘을 가진 에르메니아가 직접 마신이라는 명칭을 거론하며 퀴르켈에 대해 경고했다는 건 그 어떤 신족보다 강하고 위협적이라는 의미다.
그녀는 영광과 처음 만났을 때부터 줄곧 마영우에 대한 위험성을 경고했었다.
더군다나 마영우는 세계 최강의 능력자이자 거대 길드의 수장이기도 하다. 영광 자신이 직접 그를 쓰러뜨린다면 어렵지 않게 많은 능력자를 자신의 밑에 두어 하나의 세력권으로 묶을 수 있게 될 것이다.
어쩌면 이제 개인의 복수보단 인류를 위해 마영우를 처치해야만 했다.
“앞으로가 걱정입니다. 만약 한 명이라도 인간과 융합하는 신족이 탄생한다면··· 인류가 멸망할지도 모르는 일 아니겠습니까?”
문성현이 착잡한 심정을 드러냈다. 신족의 힘을 직접 본건 아니지만, 그 이름 하나만으로도 압박감이 느껴졌다.
미지의 존재에 대한 이유 모를 공포감이었다.
“어떻게든 그런 상황은 반드시 막아야겠지.”
굳게 주먹을 꽉 쥔 남인철도 마음이 무거웠다. 신족이라는 이름의 무게는 결코 인간이 감당할 수준이 아니었다.
“싸우기 전부터 겁을 먹으면 어떡하냐?”
영광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잔뜩 주눅 든 남인철과 문성현을 바라봤다. 그들과 달리 영광은 전혀 겁먹은 기색이 없었다.
아니, 오히려 할만하다고 생각했다.
“초장부터 쫄 거 없어. 확실한 건 놈들도 우리가 생각한 것처럼 전지전능하지 않다는 거지. 절대자라고 떠들어대던 주제에 결국 놈들도 인간의 육체나 탐하는 그런 놈들 아니더냐?”
한승아에게 들은 정보를 종합한다면 신족은 결코 만능이 아니었다. 신족들도 마기의 고갈에 두려움을 떨며 살기 위해 발버둥을 친다.
‘놈들은 절대자 따위가 아냐. 어쩌면 신족이라는 건 인류가 놈들을 경외하여 만든 환상일지도 모르지.’
신족에 대한 절대자라는 환상이 깨진 이상 두려움 따윈 없었다. 한승아에게 들은 정보를 추론해보건대 그들도 급하긴 급한 모양이다. 온전치 않은 한승아의 육체를 강제적으로 융합하려는 그레비의 행동을 봐서는···.
‘앞으론 그레비처럼 계약자의 육체를 강제로 취하기 위한 신족들이 종종 나타날 것이다.’
혹시 모를 신족들의 강림을 대비하기 위해선 자신을 중심으로 전 인류가 뭉쳐야 할 것이다.
‘더 이상 지체할 시간이 없어.’
긴 생각을 마친 영광이 곧 결론을 내렸다.
‘공략이 끝나는 대로 대창길드를 친다.’
* * * * *
영광은 대원들과 함께 보스방 앞까지 다다랐다.
“여기가 보스방입니다. 영광 대장.”
거대한 철문 앞에 있던 레인저가 말했다.
대원들 모두가 마지막으로 몸 상태를 점검했다.
“드디어 보스방이군.”
영광은 한승아와 합류하자마자 곧장 마지막 층까지 속전속결로 진입했다.
“SSS급 보스 몬스터라··· 과연 어떤 놈이 튀어나올까?”
“모르긴 몰라도 굉장한 놈이겠지. 그래도 SSS급 던전의 우두머리인데.”
대원들이 긴장 어린 표정으로 수군거렸다. 단순히 보스방 앞의 철문만 봐도 주눅이 들 지경이었다.
“긴장할 거 없어. 신속하게 던전 공략하고 홀가분하게 돌아가자. 공략만 성공하면 평생 먹고 살 수 있는 부를 거머쥘 수 있을 거다.”
영광이 긴장하는 대원들을 향해 말했다. 단순히 던진 말이었지만 살짝이나마 긴장감이 녹아내리는 듯했다.
사실 영광도 온 신경이 곤두선 상태다. 그간 박식한 지식을 토대로 몬스터들을 효율적으로 쓰러뜨렸지만, 지금은 그저 즉흥적인 지식과 경험으로 다져진 짬밥으로 헤쳐나가야 했다. SSS급 던전에 대한 정보는 과거나 지금이나 터무니없이 적은 게 현실이니까.
“돌입한다.”
영광이 철문 앞으로 다가갔다.
곧 그가 직접 문을 열었다. 대원들이 하나둘씩 보스방에 진입했다.
끼이이이익.
녹슨 문틈에서 기분 나쁜 쇳소리가 들렸다.
문이 열리자마자 광활하게 펼쳐진 필드가 눈에 보였다.
지하던전이 아닌 커다란 운동장 같은 느낌이었다.
“음?”
텅텅 빈 공간과 드문드문 보이는 횃불. 보통은 보스방을 열자마자 보스몹이 튀어나오는 게 일반적이지만 개미 새끼 하나 보이지 않았다.
“뭐가 어떻게 된 거야?”
“아무것도 없잖아?”
대원들이 무기를 들고 바짝 긴장하며 주위를 살폈다.
잠시 뒤 저절로 철문이 잠겼다.
끼리릭!
“뭐, 뭐야!?”
화들짝 놀란 대원들이 주위를 살피며 더욱 겁에 질렸다.
필드 위에 흐르는 고요한 분위기와 적막함이 어우러져 긴장감이 더해져 갔다.
차라리 보스몹이 빨리 나타났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은신형일지도 모른다. 모두 당황하지 말고 진형을 갖춰.”
대원들이 황급히 진형을 갖췄다.
하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보스몹은 나타나지 않았다.
‘천리안이라면 은신한 위치가 어디인지 알 수 있겠지.’
영광이 핀을 쳐다봤다.
“핀 천리안을 펼쳐라.”
“넵.”
핀이 천리안을 펼치자 홀로그램에선 하나의 붉은 점이 보였다.
“역시 은신형이군.”
영광이 곧 화염구를 소환해 붉은 점이 있는 곳으로 집어 던지려 했다.
“전방에 몬스터 발견!”
레인저들이 손가락으로 전방을 가리켰다. 적막하던 보스방에선 어느새 수십 마리나 되는 몬스터 떼거리가 몰려들기 시작했다.
“몬스터라기보단 인간 같은데?”
손목을 빙글빙글 돌리며 가볍게 스트레칭하던 한승아가 몰려오는 몬스터들을 유심히 살피며 말했다. 그녀의 말대로 일반적인 몬스터가 아닌 장창과 중갑주를 입은 인간형태의 몬스터였다.
영광은 관찰자를 시전하여 몬스터들의 정보를 파악했다.
*
[타락한 전사]
살아생전 무수한 전공을 세운 명망 있는 기사들. 지금은 투쟁의 본능밖에 남아 있지 않다.
*
“살아생전···? 죽은 놈들인가?”
저벅저벅.
타락한 전사들이 대열을 갖춰 전진했다. 텅 빈 투구가리개 속에선 살기 어린 눈빛이 대원들을 노려보고 있었다.
‘까다로운 상대가 될 듯하군. 투쟁의 본능밖에 남지 않았다는 건 공포나 두려움 따위의 감정이 없다는 소리지.’
당연한 소리지만 저런류의 버커서 몬스터들은 일반적인 몬스터들보다 몇 배는 상대하기 어렵다.
목숨이 붙어있는 한 끝까지 물고 늘어질 터다.
“당황하지 말고 지금까지 했던 대로 싸워!”
남인철이 빙글빙글 창을 돌리며 홀로 적진을 향해 돌진했다.
그는 혼자서 두세 명을 상대하는 괴력을 발휘했다.
솔선수범하는 그의 행동 덕택 때문인지 대원들은 용기를 내어 전진했다. 영광도 다가오는 타락 전사 몇 명을 베며 앞을 나섰다.
‘의외로 약한데?’
풍겨오는 분위기와는 달리 타락 전사들의 실력은 형편없었다. 좋게 봐줘도 B급 수준의 일개 몬스터보다 약했다.
그간 놈들을 과대평가했던 판단이 부끄러울 정도로.
고오오오오.
하지만 문제가 생겼다. 필드 중심부에서 타원형 홀이 생성되더니 타락전사들이 미친 듯이 리젠되고 있던 것이다. 한 마리를 죽이면 두 마리가 생성되니 죽이는 숫자보다 생성되는 숫자가 많아졌다.
“제길. 미친 듯이 나오고 있잖아!”
“아무리 약해도 저렇게 계속 튀어나오면 의미가 없어!”
잘 싸우던 대원들도 점차 마음이 무거워졌다. 아무리 약졸들이라도 인해전술로 나선다면 답도 없는 상황으로 이어진다.
챙!
영광이 타락전사의 창을 비껴 막았다. 방금 전보다 묵직한 일격이었다. 처음 상대한 녀석들보다 강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최악이군. 시간이 지날수록 강해지는 타입인가.’
끊임없이 생성되는 타락 전사들. 숫자도 숫자이거니와 새로 리젠된 놈들은 앞서 튀어나온 놈들보다 훨씬 강한 힘을 갖고 있었다.
“끄, 끄윽···.”
대원 몇 명이 상처를 입고 물러섰다.
시간이 지날수록 부상으로 신음하는 대원들이 늘어갔다.
“아씨. 뭐 이렇게 많아? 죽여도 죽여도 끝이 없는데 이거?”
타락 전사의 머리를 비틀어 던진 한승아가 짜증을 부렸다.
마치 수도꼭지를 틀어놓은 듯 타락전사들이 타원형 홀에서 콸콸 쏟아지듯 튀어나왔다. 전사들의 숫자가 필드를 새카맣게 메꿔가기 시작했다. 닥치는 대로 죽여댔지만 죽는 속도보다 리젠속도가 훨씬 빨랐다.
“역시 SSS급 보스방이라는 건가?”
“이, 이길 수 없어···.”
대원들의 눈동자에선 절망이 깃들었다. 죽이면 더욱 강해져서 튀어나오는 타락 전사들. 대원들이 이를 악물고 분투를 거듭했으나 전세를 뒤집긴 어려워 보였다.
‘큰일이군. 이쪽은 지쳐가는데 놈들은 끊임없이 생성되고 있다.’
제아무리 영광이라도 이번만큼은 공략의 실마리조차 떠오르지 않았다.
시간이 갈수록 최악의 상황으로 치달았다.
더군다나 타락전사들을 잡아도 조금의 경험치조차 주지 않았다. 마치 유령을 상대하는 것 같았다.
“대장! 이대로 가다간 전멸입니다! 빨리 후퇴 명령을!”
문성현이 다급히 영광에게 소리쳤다.
몇몇 대원들이 그의 의견에 동조하여 도망치려 했다.
“문이 닫혔는데 뭘 빠져나가! 계속 처치하다 보면 언젠간 리젠이 끝날지도 모르니 닥치고 그냥 전진해!”
남인철이 고함을 지르며 대원들을 독려했다. 그의 말대로 보스방문이 굳게 잠겨있어 빠져나가지도 못한다. 이제는 그저 리젠이 끝나기를 기도하며 타락 전사들을 닥치는 대로 죽이는 수밖에 없었다.
“으아아아아아ㅡ!”
절망적인 상황임에도 남인철의 활약은 단연 돋보였다. 혼자서 수십 마리의 타락 전사들을 베고 또 베었다.
그가 시체들을 밟으며 우직하게 전진해나갔다.
‘인철이가 언제 저렇게 강해진 거지?’
영광도 내심 남인철의 활약에 놀라워했다. 공략을 포기하자던 문성현과는 대조적인 활약이었다.
사실 둘의 실력 차인 거의 없다시피 했다. [전신 갑주] 스킬을 얻긴 했지만, 실질적인 전투력은 대동소이한 수준이었다.
그렇다면 둘의 차이점은 뭘까?
그것은 마음가짐이다. 남인철은 어떻게든 적들을 상대해 나가려 했다. 던전 클리어에 대한 소망도 컸다.
반면 신중파인 문성현은 이미 마음이 꺾인 상태다. 몸이 무거운 게 훤히 보였다.
‘마음가짐 하나만으로 저렇게 대비되는 전투력을 보인다고?’
이상하다. 영화나 소설에 나오는 주인공 보정 같은 효과가 남인철에게 이뤄지고 있었다. 남인철 뿐만 아니라 그와 행동을 같이하던 몇몇 대원들도 일당백의 활약을 펼쳤다.
불끈.
영광은 남인철을 보면서 자신도 모르게 힘이 솟아오름을 느꼈다. 그런 마음가짐으로 타락전사들을 상대해나가니 어렵지 않게 놈들을 처치할 수 있었다.
단순한 마음가짐으로 이렇게 강해질 수 있다는 것일까?
아니, 그건 아니다.
현실은 영화나 소설이 아니다.
그렇다는 건ㅡ
‘서, 설마···!’
찬물을 흠뻑 뒤집어쓴 것처럼 정신이 번쩍 들었다.
요는 마음가짐이다. 물론 마음가짐 하나만으로 강해진다는 의미는 아니다.
‘내가 강해진 게 아니다. 타락 전사들이 약해진 것이다. [마음가짐] 하나만으로 말이지. 그렇다면···.’
영광이 관찰자를 펼쳤다. 눈동자에선 새하얀 안광이 필드를 투시하듯 새어 나왔다. 횃불의 빛 반경에 있던 대원들의 발밑에선 그림자가 길게 늘어져 있었다.
반면 타락 전사들의 그림자는 없었다.
‘확신했다. 놈들은··· 존재하지만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을 구체적인 말로 설명할 길은 없다. 존재하지만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대원들에게 일일이 설명할 시간도, 여유도 없었다.
그렇다면 자신이 몸소 보여 확실히 증명해야만 했다.
뎅그렁.
영광은 들었던 마도를 갑작스럽게 떨어뜨렸다. 그리고는 평온한 상태로 심호흡을 했다. 사방팔방 타락전사들이 그를 둘러쌌다. 그럼에도 아무런 방어태세를 취하지 않았다.
“대, 대장! 미쳤어요!?”
곁에 있던 핀이 당황했다. 남들이 보기엔 너무나 무모한 짓이었다.
“여, 영광 대장!”
“형님! 뭐 하는 짓이야!”
“야 인마 류영광! 제정신이야!?”
전투에 매진하던 대원들도 절체절명의 상황에 기겁하며 눈을 부릅떴다. 남인철과 한승아가 다급히 뛰어들어 영광을 구하려 했지만 이미 타락전사들의 장창이 더 빨랐다.
휙!
영광은 피하려 하지 않고 가만히 서 있었다. 일촉즉발의 위기 속에서도 오히려 얼굴엔 평온함이 가득했다. 삶과 죽음의 경계 속에서도 자신의 목숨을 판 돈 삼아 도박하듯 그는 자신의 판단을 믿기로 했다.
“이, 이럴 수가!”
모든 대원이 다음 일어난 상황에 까부라질 듯 놀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