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3화 - 선포(4)
143화
기이이잉.
이혜선의 동공이 푸른색으로 빛났다. 그녀의 두 손아귀엔 마력단검이 솟아나 있었다. 오피스룩 상의 일부가 찢어질만큼 거친 마력폭풍이 몰아쳤다.
마력폭풍이란 능력을 사용할 때 일어나는 신체적 변화다. 폭풍의 강도에 따라 능력자의 등급을 매긴다. 단아한 외모와는 다르게 이혜선은 상당한 실력의 능력자임을 짐작게 했다.
“형님!”
위기를 감지한 남인철이 창을 꺼내 이혜선을 찌르려고 했다. 영광이 손을 뻗어 남인철을 제지하곤 고개를 저었다.
“죽이면 안 돼.”
영광이 짧게 말하며 이혜선과 공방을 벌였다. 보기와 달리 이혜선은 수준급 능력자였다. 영광이 재빠르게 피하며 망막에 뜬 그녀의 정보를 살폈다.
‘A급 능력자. 클래스는 암살자인가?’
하지만 영광은 유유자적하게 이혜선의 공격을 피했다. 날아오는 단검을 손바닥으로 쳐내며 공격을 무력화시켰다. A급 능력자는 상위계층이지만 얼마 전 신족과의 전투로 인해 엄청난 힘을 얻은 영광에겐 아무런 위협이 되지 않았다. 악을 쓰며 덤벼드는 이혜선의 공격이 슬로우모션처럼 느껴졌다.
“아아악! 왜 이렇게 안 맞는 거야!”
괴성을 지르며 덤벼드는 이혜선의 모습은 영락없는 악귀 그 자체였다. 조금 전 보였던 단아하고 지적인 이미지 따윈 찾아볼 수 없을 만큼 광인(狂人)이 되어 있었다. 헝클어진 머리와 광기 섞인 눈매. 상대를 죽이기 위해 쉴 새 없이 무기를 휘두르는 광적인 집념.
“그런 식의 마구잡이 공격은 시정잡배나 하는 짓이다.”
영광은 여유를 잃지 않았다. 오히려 공격을 피한 뒤 이혜선의 복부를 향해 정확히 오른 주먹을 꽂았다.
“커억!”
이혜선이 비틀거리며 단검을 떨어뜨렸다. 그리고 이어진 영광의 왼 주먹이 정확히 이혜선의 안면을 강타했다.
빠각!
“꺅!”
쿵!
이혜선이 저 멀리 날아가 벽에 부딪혔다. 그 충격으로 콘크리트 벽면이 허물어지며 잔해들을 뒤집어썼다.
“쿨럭쿨럭··· 이렇게 된 이상···!”
영광을 상대로 도저히 이길 수 없다는 걸 깨달은 이혜선은 수인을 맺어 은신을 시전했다. 등급이 높은 유능한 암살자 클래스의 은신 지속시간은 약 20~30초. 이 정도 시간이면 충분히 영광을 따돌리고 탈출할 수 있으리라.
"핀!"
"알겠어요."
핀이 영광의 부름에 응하며 주문을 읊조렸다. 주문이 끝나자마자 땅바닥을 뚫고 치솟는 바위벽이 이혜선의 앞길을 막았다. 다른곳으로 도망가려고 해도 또 다른 바위벽이 생성되어 빠져나가질 못했다.
“아······!”
이혜선이 있는 힘껏 주먹을 휘둘러 바위벽을 깨려 했지만 철벽같은 바위벽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녀가 진땀을 흘리며 뒤돌아보자 영광의 어깨에 앉아있는 요정의 모습이 보였다.
“저, 저 요정의 스킬인가!?”
핀이 한짓임을 깨달았으나 지금 당장 어찌할 방법은 없었다. 시간이 지나자 투명해졌던 전신이 서서히 원래대로 변했다. 그 틈을 놓치지 않은 영광이 물고기를 낚아채듯 즉시 이혜선의 목덜미를 꽉 잡아 땅바닥에 처박았다. 이윽고 안면이 갈리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뿌드득.
“꺄악! 여, 여자를 상대로 이러는 건 너무하잖아!”
“여자고 뭐고 목숨을 위협한 상대에게 자비를 베푸는 건 바보 같은 처사지.”
영광이 싸늘하게 웃으며 벽면에 처박힌 이혜선을 일으켜 손등으로 뺨을 휘갈겼다. 이혜선의 박살난 앞니 조각이 떨어져 나갔다.
‘그, 그래도 설마 죽이진 않을 거야······.’
이혜선은 고통에 신음하면서도 한가지 믿는 구석이 있었다. 영광이 자신을 죽이지 말라고 했던 말이 기억난 것이다. 아마 자신을 붙잡아 심문할 것임이 분명했다.
“누가 시킨 거지? 마영우냐?”
영광이 물었다. 이혜선이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짓궂게 대답했다.
“궁금하다면 당장 포박을 풀어!”
암살은 실패했지만, 주도권이라도 잡을 필요가 있기에 이혜선은 비굴한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상대는 흑막을 밝혀내기 전까진 자신을 죽이지 않는다는 믿음이 있기에.
물론 그 믿음이 깨지기는 그리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래? 그럼 죽어라.”
“뭐···. 뭐···!?”
이혜선의 눈빛이 흔들렸다. 이런 결말은 예상하지 못했다. 하지만 영광의 행동은 언행일치 그 자체였다.
이혜선의 목을 움켜쥔 영광이 팔뚝에선 힘줄이 돋아났다. 조금만 더 힘을 준다면 목뼈가 부러져 죽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꺼, 꺼어윽···. 사, 살려······.”
그제야 사태가 심상치 않음을 깨달은 이혜선이 살려달라 애원했다. 오기를 부리다가 정말 죽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설마 죽이지는 않겠지?] 이런 안일한 생각은 접어두는 게 좋을 거다. 어차피 마영우가 시킨 게 뻔하지. 굳이 심문할 필요가 없다는 소리다.”
“아, 아아······.”
영광이라는 남자가 보통내기가 아니라는 걸 그제야 깨달았지만 이미 늦은 일이었다. 암살은커녕 도주도 실패했고 주도권을 잡으려는 판단조차 틀어졌다.
‘역시··· 예상대로 단순해서 다행이군.’
영광이 쓰게 웃으며 체념한 이혜선의 눈빛을 보곤 그제야 안도했다. 사실 그도 조바심이 났다. 방금 전 이혜선을 죽이면 안 된다는 말은 진심이었다. 하지만 이혜선의 태도가 보기보다 당당했기에 기를 꺾을 필요성이 있었다.
만약 자결이라도 하겠다고 때를 부렸다면 오히려 영광이 난감해지는 상황이었다.
“이년을 감옥에 가둬. 신체를 포박하고 재갈을 물린 상태로 말이다.”
영광이 주위에 명했다. 남인철을 포함한 부하들이 떡실신이 된 이혜선을 거칠게 잡아끌며 포박하곤 억지로 입을 열어 재갈을 물렸다.
“웁, 우우웁!”
몸부림치던 이혜선이 발작에 가까운 행동을 보이며 강렬히 저항했다. 대원들이 짜증을 내며 이혜선의 팔다리를 억눌렀다.
“가만히 좀 있어. 왜 이렇게 난리야!”
“꽉 묶어버려.”
“우우우, 우우우우웁······.”
그런데 이혜선의 상태가 이상했다. 단순히 짓누르며 움직이지 못하게만 할 뿐이었는데 뭔가에 얻어맞은 것처럼 심하게 경련했다. 이윽고 팔다리가 뒤틀리며 머리를 미친 듯이 부르르 떨어댔다. 눈동자가 위로 치솟으며 흰자만 보였다.
“대, 대장! 이, 이년이 미친 것 같습니다!”
갑작스러운 이혜선의 발작에 담력이 강한 대원들도 지레 겁을 먹곤 자신도 모르게 포박을 풀었다. 그틈에 이혜선이 흐물거리며 일어났다. 흡사 영화에 나오는 좀비 같았다.
“큭, 크크크······.”
이혜선이 흰자만 보이며 광소를 터트렸다. 실성한 걸까? 이상한 건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웃음소리는 여성이 아닌 중년 남성의 목소리였다.
흠칫.
남인철과 대원들뿐만 놀란 게 아니었다. 영광도 꽤 놀란 눈치였다. 단지 그녀의 광기 때문에 놀란 건 아니었다. 듣기만 해도 귀를 찢어버리고 싶은 충동이 들 정도로 증오스러운 존재의 목소리였으니까.
“마영우.”
영광이 주먹을 부르르 떨며 이혜선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마영우라고? 그게 무슨 소리야?”
남인철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물었다.
“마영우. 허튼 장난은 그만하고 용건이 있으면 당장 말해라.”
어느새 차분해진 영광이 이혜선에게 말했다. 당장이라도 이혜선을 찢어발기고 싶지만, 감성에 취해 사리 분별을 못 하는 우를 범하지 않았다.
“호오. 내 목소리를 알고 있는 자들은 극히 드문데 어떻게 알았지? 아아. 회귀자라는 건 확실히 거짓말이 아니었군.”
이혜선이 중년의 목소리로 감탄했다. 영광은 마영우의 목소리를 내는 이혜선의 모습에 절로 눈살이 찌푸려졌다.
“역겨운 새끼. 하필 빙의해도 딸뻘 되는 여자의 몸으로 빙의하다니. 변태같은 자식.”
영광이 유유자적하게 마영우의 말을 맞받아치며 빠르게 생각했다.
‘빙의스킬은 영술사만 가능하다. 한데 저놈은 영술사 클래스가 아냐. 어떻게 스킬을 구현한 거지? 빙의스킬이 내장된 아이템은 지금의 시대엔 없을 텐데······.’
영광은 이혜선, 아니 마영우의 능력치를 스캔하기 위해 관찰자를 사용했다. 하지만 이혜선의 능력치만 나올 뿐 마영우 본래의 능력치를 스캔하진 못했다.
‘미래가 바뀐 건가? 혹은 마영우가 아닌 다른 존재인 건가? 어쩌면 마영우의 목소리를 변조한 다른 누군가일 수도···.’
추론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가운데 둔탁한 마영우의 음성이 들려왔다.
“에르메니아 그 빌어먹을 년도 급하긴 급했나 보군. 얼마나 다급했으면 삼류 무능력자인 네놈에게 특전을 부여하면서까지 나를 방해하려고 하다니. 이것 참···.”
흰자를 번들거리며 두 손을 치켜세운 마영우가 어처구니가 없다는 투로 말했다.
‘무능력자라고? 녀석은 나를 알고 있다······?’
마영우의 말을 듣자마자 영광은 뒤통수를 얻어맞은 충격을 받았다. 영광은 내색하지 않고 차분히 말을 이어나갔다. 지금 당장은 마영우를 이용하여 정보를 얻는 게 중요하다.
“에르메니아를 알고 있나?”
“당연하지. 씹어 죽여도 모자랄 년을 모를 리가 없지 않은가? 가식과 위선에 가득 차 아무것도 보지 못하는 그년의 사지를 찢어발기고 싶어 참을 수가 없군.”
에르메니아의 이름을 거론할 때마다 마영우의 목소리가 격양되어갔다. 마치 부모를 죽인 원수를 만난 듯한 과민반응을 보여왔다. 목소리에서 깊이를 알 수 없는 증오심이 전해졌다.
‘이상하군. 마영우는 언제나 매사에 진중하고 좀처럼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다. 하지만 내가 아는 놈과 저 녀석 사이의 괴리가 심해.’
영광이 알고 있는 마영우와는 사뭇 달랐다. 하지만 대화를 거듭할수록 그가 마영우라는 것 또한 부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네놈이 여태껏 잘도 언론을 이용하여 멋대로 지껄여왔었지만, 장난은 여기까지다. 곧이어 귀성들이 행동을 개시할 것이다. 전라도는 쑥대밭이 될 것이고 네놈의 거점인 제주도마저 불지옥의 광란으로 휩싸일 것이겠지. 내가 네놈과 대면한 이유는 전면전이 시작되기 전 마지막 경고다.”
마영우의 안광에선 살기가 새어나왔다. 흰자만 보여서 그런지 더욱 오싹하게 보였다.
둘 사이의 잠시나마 침묵이 일다 마영우가 다시 말을 이어나갔다.
“연합을 해산하고 나의 휘하에 들어와라. 그렇다면 섭섭지 않은 대접과 함께······.”
“그딴 개소리를 지껄이려 여기까지 왔나? 안타깝지만 시간 낭비만 했군.”
파파파팟ㅡ!
영광의 검기를 길게 늘어뜨려 단숨에 마영우가 빙의된 이혜선의 목을 날렸다.
툭, 데구르르르.
머리를 잃어버린 육신이 핏물을 쏟아내며 땅바닥에 쓰러지며 목과 머리가 깔끔히 분리되었다. 떨어진 머리통이 대굴대굴 구르며 대원들을 지나쳤다.
“으, 으악!”
대원들이 기겁하며 자신에게 다가오는 머리통을 피하기 위해 훌쩍 점프했다. 머리통은 자아가 있는 것처럼 저절로 굴러가더니 영광의 발밑에 멈춰섰다.
“지금의 어리석은 행동은 훗날 스스로를 파멸로 몰아갈 것이다.”
머리통이 입을 쩍 벌리며 말했다. 영광은 눈썹 하나 꿈쩍하지 않았다.
“네놈의 목적은 뭐지? 대한민국의 지배? 아니면 더 나아가 세계 제패라도 할 셈인가?”
“크으, 크하하하핫!”
머리통이 쾌활하게 웃었다.
“그깟 하찮은 짓거리가 목적이라고? 지나가는 개가 웃을 노릇이군. 류영광. 이미 천하는 내 뜻대로 움직이고 있다. 신계에서도 퀴르켈에 동조하는 수많은 신족이 우리와 뜻을 함께하기로 했다. 머지않아 자넨의 결계가 열릴 터. 그 순간 네놈은 신족들을 상대로 싸워야 할 것이다.”
“시, 신족들을 상대로······.”
“싸워야 한다고······?”
덜덜덜······.
마영우의 말은 충격 그 자체였다. 등골이 오싹해진 대원들은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특히 얼마 전 하급 신족을 상대로 전투해본 그들은 신족의 힘을 잘 알고 있다. 용감무쌍하기로 둘째가라면 서러운 남인철조차 이를 잘근 깨물며 침음했다.
“그래? 그것 참 재미있는 사실이군.”
반면 영광은 오히려 그 사실에 신이난 듯 웃었다. 불안에 떠는 대원들과는 사뭇 다른 모습에 마영우의 머리통에선 시뻘건 힘줄이 돋아났다.
“아직도 내가 하는 말이 허세라고 생각하느냐ㅡㅡ!”
쩌렁쩌렁한 일갈이 장내를 울린다. 하지만 영광의 웃음소리가 더 컸다.
“결국, 신족놈들의 힘이 아니고서는 날 이길 수 없다는 뜻이군. 대창길드가 우릴 쓸어버릴 만큼 강했더라면 진작에 공격해왔겠지. 하지만 넌 쥐새끼처럼 관망만 하며 자넨의 결계를 열기위해 시간만 벌고 있어. 그 말은 아직 신족의 힘을 빌리지 않는다면 확실히 우릴 이기지 못한다는 판단 때문이겠지. 덕분에 좋은 정보를 얻었군.”
“······.”
정곡에 찔린 마영우가 말을 잇지 못하며 두 눈을 부릅떴다. 영광은 머리통을 발로 꾹 밟으며 말을 이어나갔다.
“신족이든 뭐든 얼마든지 환영하마. 어차피 한번은 어지러운 현계가 정리되면 곧바로 너희 신족들을 쓸어버릴 생각이었다. 오히려 바라던 바지.”
“이, 개, 개 자식이ㅡ!”
꿈틀대던 머리통이 공처럼 튀더니 영광의 팔을 거칠게 깨물었다.
“같잖은 짓을.”
영광은 코웃음을 치며 머리통을 두동각냈다. 박터지는 소리와 함께 의식이 꺼지는 마영우에게 영광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마영우. 조만간 네놈의 본체와 대면할 날이 멀지 않겠구나. 그때까지 목을 깨끗이 씻고 잘 기다리라고.”
“개··· 자식··· 반드시 죽여··· 버리··· 겠다······.”
마영우의 의식이 완전히 사라졌다. 머리통은 더 이상 미동조차 하지 않고 멈췄다.
“정말로 시작이군. 대창길드와의 전면전. 그리고 더 나아가 신족들과의 전쟁이라······ 참나. 산넘어 산이군.”
남인철이 뒤통수를 긁적이며 한숨을 쉬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질 것 같지가 않았다.
‘형님과 함께라면···.’
남인철은 창문 넘어 허공에 떠 있는 달을 바라보는 영광의 어깨에 살짝 손을 올렸다. 무슨 생각을 그리 깊게 하는지 영광은 아무런 말이 없었다.
‘여태껏 시간이 준비단계라면 내일부터가 본격적인 복수의 시작이다.’
영광은 오랫동안 복수라는 칼날을 벼려왔다. 길고 긴 인고의 세월을 감내하며 비로소 여기까지 온 것이다.
“내일 당장 강원도를 떠나 제주도로 향한다. 그리고 한 달 안에 제주도를 평정하겠다."
영광의 주먹을 높이 뻗어 올리며 대원들에게 선언했다. 달빛을 머금은 코드 자락이 오늘따라 유난히 펄럭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