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5화 - 에이레네 연합(2)
145화
“넌 성격을 고칠 필요가 있어. 언제까지 그런 식으로 남을 대하다간 평생 소외당하게 될 거다.”
지금같은 시대에선 한승아같은 탑 클래스 능력자들은 두려움과 동시에 경외 받는 존재다.
즉, 누구도 범접지 못하는 힘이 있기에 더러워도 참는 것이다.
하지만 시대는 바뀌기 마련이다. 개개인의 무력이 숭상받는 지금과는 달리 과거처럼 국가가 힘을 가진다면 제아무리 강자라도 강력한 법에 굴복할 수밖에 없다.
‘능력자의 힘이 천년, 만년 지속하리라고는 믿지 않아. 당장 신족들이 사라진다면 능력자들은 힘을 잃게 될 터지.’
영광은 마영우에 대한 복수를 포함하여 신족들을 모조리 섬멸시킬 계획을 하고 있었다. 대부분 능력자는 당장 신족들과 어떻게 싸울 것인지만 이야기하고 고민할 뿐. 그 이후에 대한 미래를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변화가 없다는 건 죽은 거나 마찬가지다.’
영광은 전쟁 이후의 미래에 대해 설계를 마친 상태다. 비단 자신의 미래뿐만 아니라 훗날 인류의 평화라는 대업을 방해할 여러 가지 문제들을 스스로 고민하고 여러 가지 가설을 내놓은 뒤 거기에 맞는 방책을 생각해뒀다.
난세가 평정된 치세에서도 예상치 못한 문제가 터질 수 있으며 해결책을 미리 준비하지 않으면 평화 따윈 일장춘몽에 불과하다는 걸 잘 알고 있으니까.
“니가 네 시아버지야? 뭘 그렇게 잔소리가 심해?”
한승아는 여전히 바깥풍경에 시선을 두며 말했다. 풍성한 구름과 잔잔한 햇볕에 솔솔 단잠에 빠져드는 찰나에 잔소리가 이어지니 스멀스멀 짜증이 밀려왔다.
“음?”
시간이 지나도 아무런 말이 들려오지 않자 한승아가 고개를 돌렸다.
멍한 눈동자로 자신을 쳐다보는 영광의 눈동자가 보였다.
“왜 그렇게 빤히 쳐다봐?”
영광의 시선은 한승아에게 향해 있었지만, 의식은 생각으로 잠긴 상태였다.
“아, 뭘 좀 생각한다고.”
“그게 아니라 내 얼굴이 너무 예뻐서 쭉 쳐다본 거 아냐?”
한승아가 웃으며 농담을 던졌다.
당황할 줄 알았던 영광이 침착하게 장난기 가득한 시선과 마주했다.
“그것도 맞는 말이고.”
“뭐, 뭐?”
한승아의 얼굴이 새빨갛게 변했다. 오히려 자신이 당황하며 어찌할 바를 몰랐다.
“예쁜 건 사실이니까.”
“돼, 됐어. 알았으니까 그만해.”
한승아가 휙 고개를 돌렸다. 낯뜨거운 열기가 비행기 내부에 맴돌았다.
“사실을 말한 것뿐이다. 그건 그렇고 아까 내가 해준 조언은 잊지 말고 진지하게 들어. 조만간 전쟁이 끝나면 그때부터는 지금과 다른 시대가 올 거다. 전쟁이 끝나면 정말로 네가 뭘 하고 싶은지 잘 생각해놔.”
“내가 하고 싶은 일?”
“간단히 말해 미래를 설계하라는 거지. 나중에 뭘 하고 싶은지 말이야.”
“갑자기 미래를 설계하라고 한들 난 그런 걸 진지하게 생각해본 적이 없는데.”
한승아가 머리를 긁적였다. 눈을 뜨면 피비린내 나는 전투의 일상 속에서 미래 따윈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그래도 나쁘지 않은 조언이야. 내가 하고 싶은 게 뭘까? 아니, 내가 잘하는 것부터 알아보는 게 먼저겠지.’
고민이 길어졌다. 팔짱을 낀 채 고개를 푹 숙이며 한참을 생각했지만, 딱히 떠오르는 게 없었다. 하고 싶은 건 둘째 치더라도 자신의 장점조차 파악하기 어려웠다.
당장 생각나는 거라곤 뭘 때려 부수는 거 하나만큼은 기가 막히게 잘하는 정도라고 할까?
그러다 기가 막힌 뭔가가 떠올랐는지 푹 숙인 고개를 치켜들었다.
“전쟁용병은 어때? 내가 뭐 하나 작살내는 건 기가 막히게 잘하거든.”
딴엔 한참을 고민한 결론이었다. 폭력을 이용한 직업이라면 충분히 잘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건 불가능하다.”
영광이 고개를 저었다. 그의 말투에서 단호함이 묻어났다.
“어째서?”
한승아가 고개를 갸우뚱하며 반문했다. 영광은 조용히 한승아를 쳐다보았다.
“내가 모든 전쟁을 끝낼 테니까.”
전쟁의 종식.
그것이 비록 치기 어린 이상일진 모르겠지만 영광은 정해진 목표가 있다면 그 어떤 난관도 굴하지 않고 우직하게 나아갔다. 더 이상 전쟁의 비극을 겪지 않게 하도록. 대창길드의 복수와 신족의 섬멸은 비단 개인적 목적만이 아닌, 전쟁을 종식하겠다는 영광의 큰 뜻이기도 했다.
‘허무맹랑한 소리일진 모르겠지만 저 녀석이라면······.’
한승아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간 영광이 보여준 놀라운 성과를 보자면 허언처럼 들리지 않았다. 불가능하게만 여겨졌던 난관도 기가 막힌 기지로 해결해나갔다.
“너도 알다시피 난 한번 죽었었다. 그리고 이 시대로 회귀했지. 그때도 지금도 무분별한 전쟁은 여전하지만, 예전과 달리 지금의 난 전쟁을 종식시킬 힘을 가지고 있어. 그러니 전쟁용병을 하겠다는 말은 그만둬.”
영광의 눈빛은 그 어느 때보다 이글거렸다. 눈빛을 마주하는 것만으로도 화염에 타들어 갈 것만 같았다.
“아, 알았으니까 너무 빤히 쳐다보지 마. 어휴. 왜 이렇게 덥지.”
영광의 진지한 시선에 한승아가 연신 손바닥으로 부채질을 하며 고개를 돌렸다.
그러다 문득 뭔가가 생각났는지 영광에게 말했다.
“아 참. 과거엔 난 어떻게 됐어?”
갑자기 궁금해졌다.
영광이 있었던 과거 세계에서의 난 어떤 모습이었을까? 라고.
“넌······ 처참하게 죽어버렸다. 마영우에 의해. 동생을 구한다는 목적을 달성하지 못한 채 말이지.”
“······그렇구나.”
예상한 결말이었는지 한승아는 살짝 놀란 표정만 짓다 이내 표정을 갈무리했다.
사실 지금의 시대에서도 영광을 만나지 못했더라면 과거와 같은 결말을 맞이할 것은 분명할 터였다.
“너뿐만이 아냐. 나 또한 녀석의 부하들에게 살해당했지. 인철이도··· 태승이도···.”
불쾌한 과거가 떠올랐는지 영광의 안색이 어두웠다. 머릿속엔 아직도 무기력하게 살해당했던 과정들이 생생했다. 잊고 싶어도 잊히지 않는 저주스러운 기억. 그런 아픔을 잘 알기에 과거의 일을 되풀이하지 않고자 끊임없이 앞으로 나아가려 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잖아? 미래는 충분히 바뀌었다고 생각하는데?”
한승아가 영광을 똑바로 응시했다. 눈동자에서 신선한 활력이 느껴졌다.
“봐봐. 귀폭길드는 멸망했고, 박형복 같은 대창길드의 네임드들도 죽어버렸잖아. 반면에 망했던 용진 길드는 일선에서 활약하고 있고 독단적으로 행동했던 난 너와 함께하고 있고. 그러니 지금도 미래는 바뀌어나가고 있다고 생각해. 그리고······.”
잠시 말을 멈춘 한승아가 숨을 가다듬더니 들릴 듯 말 듯 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널 믿고 있으니까 과거에 연연하지 말고 약한 모습도 보이지 마. 그런 모습···. 보기 싫으니까······.”
둘 사이 가라앉았던 공기가 들썩였다.
예상치 못한 한승아의 응원에 침울했던 영광의 표정이 원래대로 돌아왔다.
“그래. 과거는 과거일 뿐이니까. 고마워. 덕분에 무거웠던 짐이 한결 덜어진 기분이야.”
“알았으면 됐어. 피곤하니까 잠 좀 잘 테니 도착하면 깨워줘.”
한승아는 고개를 휙 돌렸다. 잠을 잔다고 하던 그녀의 뺨이 시시각각 불그레해졌다.
‘내가 저 녀석에게 위로를 받을 줄이야.’
쓴웃음을 지은 영광이 말없이 바깥풍경을 쳐다봤다. 햇볕을 머금은 구름이 아까보다 유난히 환하게 보였다.
* * * * *
영광을 태운 비행기가 제주도에 도착했다. 비행기의 착륙과 함께 도착했다는 안내방송이 들려왔다. 곤히 자고 있던 대원들이 부스스한 머리를 긁적이며 일어났다.
쉬이이이익.
비행기 문이 열리며 영광이 먼저 제주도에 모습을 드러냈다. 미리 대기하던 태산길드 대원들이 영광과 일행들을 반겼다.
“대장. 오셨습니까? 고생 많으셨습니다.”
영광에 눈에 먼저 띈 자는 박기용이었다. 말쑥한 정장 차림에 멋들어진 리본은 어느 때보다 인상적이었다.
“그간 별일은 없으셨습니까?”
“대장이 없는 사이 많은 일들이 벌어졌습니다.”
“많은 일이라니. 그게 무슨 소리야?”
늦게 내려온 남인철이 불쑥 끼어들었다.
“그게 실은······. 남표한서와 남두홍이 우리 쪽으로 투항했습니다.”
“무, 무슨······!”
쿵.
쇠망치를 얻어맞은 듯 한동안 말을 잊지 못하던 남인철을 대신하여 영광이 말했다.
“갑자기······? 설마 내가 없는 사이 그들과 전투를 벌이기라도 했단 겁니까?”
영광도 적잖은 충격을 받은 모양이었다. 제주도의 남인철 세력과 남두홍의 세력은 서로 간 대등한 상황이었다. 게다가 영광과 한승아, 남인철 같은 핵심능력자들이 강원도로 차출당한 상황에서 남은 인원들 중 네임드들은 유태승과 박기용 밖에 없었다. 그들이 남두홍과 싸워 이기기는커녕 방비만 잘했어도 만족스러운 상황이었다.
그런데 남두홍의 투항이라니···?
“전투는 없었습니다. 믿기 어렵겠지만 남두홍과 휘하 남표한서가 먼저 항복의사를 전달해왔습니다. 현재 우리세력은 그들을 흡수하고 제주도 대부분을 장악한 상태입니다.”
“그럼 남두홍 그 자식은 지금 어딨어?”
남인철은 아직도 믿기지 않은 듯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박기용을 쏘아붙였다.
영광은 흥분한 남인철을 진정시킨 뒤 박기용에게 물었다.
“태승이는 지금 어딨습니까?”
“유태승님은 다른 곳으로 출장 나간 상태입니다.”
“출장이라···.”
뭔가 석연치 않은 느낌이 든 영광이 휴대폰을 꺼내 유태승에게 전화를 걸었다.
[지금은 전화를 받을 수 없습니다. 다음에 다시 걸어주세요.]
딱딱한 여성의 음성이 전화기에서 들려왔다.
영광은 아무 말 없이 스페셜 파티의 소환창을 열었다.
[누구를 소환하시겠습니까?]
‘유태승.’
[현재 소환이 불가능한 상황입니다.]
‘······!’
“대장. 무슨 일이십니까?”
박기용이 흠칫한 영광을 보며 걱정스럽게 물었다. 영광은 곧바로 침착하게 말했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런데 남두홍이 어째서 항복한 걸까요? 다른 일들은 없었습니까?”
“네. 딱히 아무 일은 없었습니다. 남두홍님은 현재 우리와 함께 태산길드의 일원으로서 활약하고 있고요. 자자 다들 시장하실 차에 타시죠. 자세한 건 본부에서 식사하면서 이야기하도록 하죠.”
박기용이 부하들에게 손짓했다. 고급 승용차 몇 대가 영광의 앞으로 이동했다.
“할아범. 아무런 의심도 없이 그놈을 받아준 게 말이나 되는 소리야? 지금 여기서 당장 말해. 난 녀석을 믿지 않아. 언제부터 놈을 받아준 건데?”
아직도 화가 풀리지 않았는지 씩씩거리던 남인철은 아직도 상황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듯했다. 자칫하다간 박기용의 멱살이라도 잡을 흉흉한 기세였다.
“항복하면 좋은 일이지 뭘 그렇게 소란이야? 시끄럽게 굴지 말고 차에 타자 좀.”
하품을 늘어놓으며 졸린 눈을 비비던 한승아가 핀잔을 줬다. 빨리 본부에 가서 잠을 자고 싶은데 시간을 끄는 남인철 때문에 잔뜩 짜증이 났다.
“아무것도 모르는 부외자는 빠져. 이건 단순한 문제가 아니니까.”
“너 말을 그따위로밖에 못하냐?”
으르렁거리던 둘의 표정이 험악하게 일그러졌다.
조금만 더 이야기가 오간다면 주먹다짐이라도 날 것 같았다.
“둘 다 그만해. 한승아의 말대로 적들이 항복하면 오히려 좋은 일이다.”
“형님은 이 상황이 말이 된다고 생각해?”
“그만해.”
“난 인정할 수 없어. 어째서 남두홍 그 자식이······."
“그만하라면 그만하지 뭘 그렇게 말이 많아!”
보기 드문 영광의 일갈에 남인철이 몸을 부르르 떨며 말을 멈추었다. 그간 영광이 저런 식으로 화를 표출한 적은 거의 없었다.
그때 남인철의 귓가에 영광의 음성이 들려왔다.
[인철아 지금은 화를 가라앉히고 조용히 박기용의 말을 따르도록 해. 수상한 점이 한둘이 아닌 건 나도 잘 알고 있으니까.]
스페셜 파티 창을 통한 전음이었다. 그제야 남인철이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도 박기용을 향한 의심의 눈초리는 지우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