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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 다정하지 마세요-1화 (1/110)

내게 다정하지 마세요 1화

아셀 페델리안은 잔인한 사람이다.

모두가 그렇게 생각하지 않더라도 유디트는 그렇게 아셀을 평가했다.

잔인한 마음을 가지지 않았기에 더욱 잔인한 사람.

그래서 유디트는 아셀을 끊어 내기로 했다.

혼자 기대하고 혼자 상처받는 건 이제 지쳤으니.

‘끊어 낸다’라고 표현하긴 했지만, 사실은 끊어 내는 것도 아니었다.

애초에 아셀은 유디트가 자신에게 어떤 마음을 품든 거추장스럽게만 여길 테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혼자 소중히 간직해 온 마음이었다.

혹여 비난받을까 봐 가슴 깊숙한 곳에 도로 묻어 둔, 매번 전해 주지도 못할 편지를 쓰며 녹여 내었던 소박하고 불쌍하기 짝이 없는 마음.

어쨌든 정말 끊어 낼 시간이었다.

유디트는 손에 쥔 찻잔만 매만지다가 입술을 뗐다.

전날 밤 몇 번 연습해 본 게 도움이 된 건지 입 밖으로 나오는 말은 군더더기 없이 말끔했다.

“아카데미를 졸업하면 바로 결혼할 수 있도록 약혼을 할까 해.”

준비해 온 말은 그게 끝이었다. 이제 반응을 기다릴 차례였다.

유디트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6월, 모든 게 푸르게 빛나며 생명력 넘치는 계절이었다.

그녀는 문득 실감했다. 정말 아카데미 졸업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이제 몇 개월이 지나고 하늘에서 하얀 눈이 내리기 시작하면 아카데미를 졸업하겠지.

그러면 이렇게 아셀과 마주 앉아 대화하는 일도 끝일 테다. 유디트와 아셀의 유일한 접점도 사라지게 될 테니까.

아셀은 페델리안 공작가의 하나뿐인 후계자였다. 아카데미를 졸업하면 본격적으로 공작 위를 계승 받을 준비를 시작할 터였다.

자신은 누군가와 결혼해 그런 그의 곁을 떠나게 되겠지.

그렇게 우리는 서로 각자의 길을 걸어갈 것이다.

어쩌면 아주 오래전부터 정해진, 이변은 없을 미래였다.

그때까지도 아셀은 말이 없었다. 생각보다 대답이 늦었다.

계속 이어지는 침묵에 유디트는 시선을 돌려 눈앞의 남자를 쳐다보았다.

소년에서 이제는 완전히 남자가 된 아셀 페델리안.

유디트는 차례차례 시선을 옮겼다.

젖살이 남아 있던 하얀 뺨은 어느새 날카로운 턱선으로 탈바꿈해 있었다.

단정한 이마와 깎은 듯이 높은 콧대, 그리고 움푹한 눈매까지.

기다란 속눈썹 아래 자리한 청회색 눈은 고요한 바다를 닮았다. 차갑고 시린 듯 보이지만 그 속에는 다정함이 어려 있었다.

빠뜨린 것 없이 단정하게 차려입은 교복 위에는 그런 그에게 잘 어울리는 학생회장 브로치가 반짝였고 말이다.

잠시 후 아셀이 의외의 말을 들었다는 듯이 눈을 크게 떴다.

“누구랑?”

“글쎄.”

유디트는 자신의 뺨에 달라붙은 선명한 시선을 의식했다. 하지만 눈동자를 굴려 시선을 피했다.

고개를 푹 숙이곤 찻잔의 손잡이만 매만졌다.

처음에는 따뜻한 김이 폴폴 나고 있었던 홍차에서 더 이상 온기는 느껴지지 않았다.

“내 의사가 중요한 건 아니지.”

아카데미를 수석으로 졸업하게 될 고아.

다행인진 모르겠지만 결혼 시장에서 유디트의 가치는 꽤 높았다. 그리고 유디트는 그런 자신의 가치를 잘 알고 있었다.

실제로 졸업이 다가오자 몇몇 군데에서 유디트에게 편지를 보내 왔다. 대부분 돈은 많지만, 명예는 그다지 높지 않은 귀족 가문에서였다.

꽤 똑똑하니 좋은 후계자를 낳을 수 있고 뒷배경이 없으니 원하는 대로 쉽게 다룰 수 있어서겠지.

적당히 돈만 쥐여 주면 별도의 귀찮은 과정 없이 데려올 수 있을 테니까.

자신을 똑똑한 후계자를 낳을 도구, 딱 그것으로밖에 취급하지 않는다는 걸 알았지만 유디트는 상관없었다.

약혼과 결혼을 일종의 도구로 취급하는 건 유디트도 마찬가지였다.

애초에 정략결혼에 사랑을 기대할 만큼 어리석지는 않았으니까.

유디트가 아카데미 졸업 후 결혼을 결심하게 된 계기는 간단했다.

어느 날, 페델리안 부인에게서 한 통의 편지가 도착했기 때문이다.

졸업 후 계획해 둔 장래가 있느냐며, 원한다면 좋은 가문의 남자와 짝지어 주겠다는 제안을 담은 편지였다.

마치 자신을 위한다는 듯이 쓰여 있었으나 유디트는 그 이면에서 혼기가 찬 두 남녀가 더 함께하는 걸 좌시하지 않겠다는 무언의 압박을 느꼈다.

권유의 탈의 쓴 강요.

하지만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마침 후원자와 피후원자의 관계로 아셀에게 묶여 있는 제 처지에 신물이 나던 참이었으니까.

페델리안 가문에서 아카데미를 다닐 수 있게 후원해 주었으니 그간의 은혜도 갚을 겸, 아셀에게서 그만 벗어나기로 결심하였다.

그의 곁에 남아 있어 봤자 혼자 계속 속앓이나 하게 될 것이 뻔했으니까.

“유디트.”

단호하고 딱딱한 음성이었지만 단호함 너머에는 분명 걱정이 섞여 있었다.

아셀의 곁에서 오랫동안 함께한 유디트는 알 수밖에 없었다.

“왜 네 의사가 중요한 게 아니야?”

유디트는 그게 싫었다.

일말의 따스함과 걱정. 자꾸 사람을 착각하게 만들고 기대하게 만드는.

이런 부분에서 유디트는 아셀이 잔인한 사람이라고 평가할 수밖에 없었다.

“네 의사가 중요한 게 아니라니, 혹시 누군가 너한테 약혼을 강제하기라도 했어?”

반사적으로 고개를 들었다. 최대한 시선을 맞추지 않으려고 했는데 일종의 불가항력이었다.

아셀은 차분한 눈으로 자신을 보고 있었다. 청회색 눈동자는 파문 하나 없는 잔잔한 호수 같았다.

잠시 그것에 넋을 잃었다가 이윽고 정신을 차렸다.

누가 나를 강제했느냐고?

그게 누군지 안다면 그렇게 순진한 질문 따위는 하지 못할걸.

유디트는 자신의 의사 따위는 중요하지 않은 걸 이미 오래전에 알았다.

아무리 노력한다고 해도 세상엔 바꿀 수 없는 것들이 너무 많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이후로 그녀는 그 모든 것들을 뼈저리게 느끼며 살아왔다.

만약 그의 말대로 자신의 의사가 중요해서 인생을 좌지우지할 수 있는 거라면, 멍청하고 보답받을 수 없는 짝사랑 같은 건 애초에 시작도 하지 않았을 테다.

거기까지 흐른 생각을 멈춘 유디트는 뭔가를 참는 듯이 치맛자락을 손에 꼭 쥐었다 놓았다. 목소리는 가시를 세운 것처럼 뾰족하게 흘러나왔다.

“그런 건 아니니까 상관 마.”

“하지만 왜 이렇게 갑작스럽게-.”

유디트는 아셀의 말을 중간에 끊고 내뱉었다.

“그러면 너는.”

하지만 끊은 것이 무색하게 정작 말을 하려다 멈추고 말았다.

그에 아셀이 이어질 말이 궁금하다는 듯이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였다.

그에 유디트는 말없이 입술만 짓씹었다. 잘근거리며 씹힌 입술이 터진 듯 피 맛이 났다. 비릿했다.

그녀가 그에게 묻고 싶은 것은 단 한 가지밖에 없었다.

그럼 네 약혼은, 정말 네 의사로 이루어진 거냐고.

물론 그 질문에 대한 답은 정해져 있었다.

굳이 묻지 않아도 아셀은 자신의 약혼녀와 행복해 보였다.

리아나 제르니아스, 아셀과 딱 잘 어울리는 고귀한 가문 태생의 아름다운 소녀였다.

고통을 사서 하는 취미는 없었기에 질문은 속으로 삼키고 유디트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푸른 시선이 가방을 챙기는 유디트를 부지런히 쫓는 게 느껴졌다. 하지만 유디트는 짐 정리하는 행동을 멈추지 않았다.

작은 수첩과 생일 선물로 받았던 만년필까지. 테이블 위에 널브러져 있던 소지품을 모두 챙긴 그녀가 뒤를 돌아보았다.

“미안, 조금 피곤해서 먼저 가 볼게.”

그러나 벌떡 일어선 아셀이 유디트의 팔을 조심스럽게 잡아챘다.

“잠깐, 유디트.”

뿌리치려면 충분히 뿌리칠 수 있는 사뿐한 손길.

하지만 유디트는 아셀에게 잡힌 순간부터 얼어붙은 것처럼 굳어 버리고 말았다.

얇은 셔츠 사이로 아셀의 체온이 지나치게 뚜렷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쿵쿵.

심장이 고장 난 것처럼 박동했다.

“잠시 나 좀 봐 봐.”

아셀은 팔을 잡아당겨 부드럽게 유디트를 돌려세웠다. 유디트의 눈앞에 티끌 하나 묻지 않은 단정한 하얀 셔츠가 보였다.

훅, 아셀이 허리를 숙였다. 검은 머리칼이 한순간 나부꼈다.

숲을 닮은 청량한 비누 내음이 나고, 이내 다정한 빛을 품은 눈동자가 코앞에서 유디트를 빤히 응시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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