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게 다정하지 마세요-2화 (2/110)

내게 다정하지 마세요 2화

유디트는 잠시간 꼼짝도 할 수 없었다. 마치 그 시선에 사로잡히기라도 한 듯이.

그러는 사이 아셀의 청회색 눈동자가 느릿하게 움직였다. 유디트의 눈, 코, 뺨을 샅샅이 살피다 입술까지 내려와서는 고운 눈매가 조금 찌푸려졌다.

아셀이 손을 뻗었다. 길고 곧게 뻗은 손가락이 유디트의 입술을 툭 건드렸다.

아주 잠깐의 접촉이지만 일순간 현기증이 일었다. 마치 지독한 감기에 걸렸을 때처럼.

“이것 봐, 입술에서 피가 나잖아.”

머리가 어지러워져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그러나 곧 아셀에게 턱이 잡혔다.

조심스러웠지만 단단한 손길이었다. 아셀은 그녀의 턱을 그대로 들어 올렸다.

유디트가 눈을 질끈 감은 사이, 엄지손가락이 그녀의 입술을 가볍게 스치고 지나갔다.

부드럽고, 뜨거웠다.

뻣뻣하게 굳어 있던 유디트는 작살에 꿰인 물고기처럼 화들짝 놀라 아셀을 밀쳐냈다.

“뭐, 뭐 하는 거야!”

심장이 뛰었다. 미친 듯이. 얼굴은 안 봐도 붉어져 있을 게 분명했다.

식은땀이 날 정도로 당황한 자신과는 달리 아셀은 시종일관 침착하고 차분한 태도 그대로였다.

아셀은 자신의 재킷 주머니에서 뭔가를 꺼냈다.

그것은 하얀 손수건이었다. 제르니아스 가문의 자수가 정성스럽게 박혀 있는.

퍼뜩 꿈에서 깨어난 기분이다.

“이거…….”

“필요 없어!”

울컥.

유디트의 두 눈에 투명한 눈물이 차올랐다.

“이런 짓은, 네 약혼녀에게나 하란 말이야!”

유디트는 터져 나오려는 울음을 막기 위해 이미 몇 번이고 씹힌 입술을 한 번 더 잘근 씹었다.

하지만 볼썽사납게 바들바들 떨리는 목소리는 막을 수 없었다.

“아셀, 나는…… 네가 정말 싫어. 증오스러울 만큼.”

모든 게 형편없다.

유디트는 도망치듯 뛰쳐나왔다.

* * *

정말 싫고, 증오스럽다고 자신의 입으로 말했지만.

사실 아셀 페델리안에게는 아무런 잘못이 없다.

그건 유디트도 알았다. 아마 누구보다도 유디트가 잘 알 것이다.

굳이 잘못이 있다면 지나치게 다정해서 사람을 착각하게 했다는 것.

하지만 아셀은 원래 그런 사람이었다. 타고나기를 동정심이 많고 남의 사정에 깊이 공감할 줄 아는 따뜻한 사람.

그리고 그런 면에 반해 버리고 만 자신이 바보였다.

멍청한, 바보 같은, 이기적인.

유디트는 베개 위에 머리를 쾅쾅 박으며 자기 자신을 욕했다.

하지만 끈질긴 상념은 가실 줄 몰랐다. 오히려 잊으려고 하면 할수록 유디트를 비웃듯이 뚜렷해졌다.

마지막으로 본 아셀의 표정. 그것이 선명했다.

흔들리는 청회색 눈동자와 딱딱하게 굳은 입매.

유디트로서는 처음 보는 아셀의 표정이었다.

상처 입었을까? 상처 입었겠지.

한순간 울컥 치민 감정을 참지 못해 아셀에게 상처를 주고 말았다. 이럴까 봐 그동안 아셀을 피하고 피해 왔던 건데.

아셀은 유디트가 언젠가부터 자신을 피한다는 걸 알았는지 계속 약속을 청해 왔다.

장차 페델리안 가문을 이끌 가주가 고작 고아 평민 하나에 쩔쩔맨다는 것이 소문이라도 난다면 아셀의 명예가 깎일 테다.

그래서 오늘 어쩔 수 없이 아셀을 만났던 건데.

유디트가 아셀을 그동안 피한 이유는 단순했다. 더 이상 그에게 상처받기 싫었으니까.

얼마 전 아셀이 이렇게 질문한 적이 있었다.

‘혹시 아카데미를 졸업하면 뭘 할 거야?’

유디트는 대답하지 못했다. 입술만 뻐끔거렸다.

그도 그럴 게,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졸업 이후의 삶이 마냥 먼 미래처럼 느껴졌었기에.

하지만 졸업은 어느새 성큼 다가와 있었다. 그걸 깨닫고 유디트는 망치로 머리를 맞은 듯이 멍해졌다.

그런 유디트를 향해 아셀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혹시 페델리안 가문에서, 자신의 보좌관으로 일할 생각이 없냐고.

그는 분에 넘치도록 좋은 임금까지 제시했다. 만약 유디트가 황성에서 일한다 해도 그 정도의 액수는 받을 수 없을 정도였다.

하지만.

‘싫어.’

유디트는 일말의 망설임조차 없이 거절했다.

아셀은 유디트가 자신의 제안을 거절할 줄 몰랐는지 두 눈을 크게 떴다. 동그랗게 커진 청회색 눈동자에 굳은 얼굴의 유디트가 비쳤다.

‘어째서?’

그로서는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얼굴이었다.

‘아니면 뭔가 바라는 다른 조건이 있는 건가?’

‘…….’

‘말해 봐. 뭐든 들어줄게.’

하지만 유디트는 말없이 고개를 내저었다.

아무리 좋은 조건이더라도 아셀의 제안을 받아들일 생각은 없었으니까.

아셀의 보좌관이 되어서, 그의 곁에서 평생 머물러야 한다.

그것은 다른 말로 하면 약혼을 하고, 결혼하고, 행복하게 사는 아셀을 가장 가까운 곁에서 지켜봐야 한다는 뜻이었다.

살아 있는 지옥이었다. 상상만으로도 그렇게 끔찍하고 절망적일 수가 없었다.

‘나는 너랑 좋은 친구이자 동료로서 평생 함께하고 싶을 뿐이야. 지금까지 그래 왔던 것처럼.’

아셀은 물기 어린 간절한 눈빛으로, 지독히도 잔인한 말을 내뱉었다.

말은 날카로운 비수가 되어 유디트의 심장을 할퀴고 지나갔다. 물론 그는 영영 모르겠지만.

그때부터였다. 유디트가 아셀을 피했던 건.

그리고 그런 아셀의 제안에 대해서 알고 있기라도 한 것처럼 곧바로 페델리안가에서 편지가 날아들었다.

마치 이 이상 아셀과 친밀하게 엮이지 말라는 듯이.

결국 그들의 조언에 따라 약혼 선언을 마친 유디트는 습관처럼 입술을 짓씹었다.

이미 터진 입술에서 따끔한 느낌이 들었고, 또…….

입술에 가볍게 스치던, 따뜻하고 부드러웠던 손가락.

화악.

유디트의 얼굴이 순식간에 붉어졌다. 손바닥에 얼굴을 묻었다.

미쳤나 보다. 진짜 미쳤어.

유디트는 자신을 또 욕했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아셀이 원망스러웠다.

평민 주제에, 가문의 후원으로 겨우 아카데미에 입학한 고아 주제에, 주제 파악도 못 한다고.

차라리 그렇게 욕을 한바탕해 줬으면 마음이 편할 텐데.

다시 만날 아셀이 유디트에게 할 말이야 뻔했다.

‘유디트, 혹시 내가 눈치 없이 또 너를 화나게 만든 거라면…….’

다정히 속삭이겠지.

‘진심으로 사과할게. 실수한 게 있다면 말해 줘.’

그는 시선을 내리깔며 조심스럽게 덧붙일 테다.

‘어떻게든 고칠 테니까.’

“아아악!”

유디트는 더 참지 못하고 자신의 머리카락을 잡아당겼다. 두피가 아릿하게 아파졌다.

마치 미치광이처럼 보이는 그 행동에 유디트의 룸메이트인 한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한나는 자신의 검은색 안경테를 검지로 슬쩍 들어 올리며 말했다.

“유디트, 시험 기간도 아닌데 왜 벌써 미치고 그래?”

그 말에 유디트는 머리칼을 쥐어뜯으며 소리를 지르던 행동을 멈췄다.

“미안, 한나.”

혼자 쓰는 방이 아니었다. 귀족들은 1인실을 쓰지만 자신 같은 평민들은 2인실을 쓴다. 유디트가 머쓱한 미소를 지었다.

한나는 그런 유디트를 빤히 바라보다 시선을 돌려 유디트의 책상을 응시했다.

갈색의 원목 책상 위에는, 페델리안가에서 추려 낸 약혼자 후보들로부터 온 편지가 가득 쌓여 있었다.

툭 치면 금방이라도 우르르 무너질 듯이 빼곡하게.

“너는 좋겠다. 사방에서 러브 콜이 들어오니까.”

사정을 모르는 한나가 중얼거렸다. 유디트는 머쓱하게 웃어 보일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약혼한다면서? 누구랑 할 건데?”

“글쎄…….”

유디트가 말끝을 흐렸다.

사실 약혼해야겠다고 마음은 먹었지만, 아직 누구랑 할지에 대해 구체적으로 생각해 본 적은 없었다.

하지만 이젠 슬슬 그것에 관해서도 고민할 때였다.

지금부터라도 답장을 보내고, 상대방과 만남을 가져야 졸업할 때에 맞춰 결혼식을 진행할 수 있을 테니까.

“누가 좋을까?”

“흠.”

한나가 잠시 고민하는 듯 고개를 기울였다. 유디트는 저가 물었지만, 한나가 알맞은 답을 찾아 주리란 기대는 없었다.

하지만 늘어놓은 편지 봉투들을 눈여겨보던 한나는 의외로 쉽게 입을 열었다.

“체이스 카르단디?”

한나가 짧게 덧붙였다.

“가문도 좋고 가장 잘생겼으니까. 인성은 잘 모르겠지만.”

“아.”

유디트가 짤막하게 내뱉었다.

체이스 카르단디라면…… 인생의 1순위가 오로지 검뿐인 남자가 아닌가.

아카데미 수업도 빼먹고 수련장에서 검술만 연습하는 남자. 그게 체이스 카르단디에 대한 세간의 평가였다.

망설임은 짧았다.

왜 여태껏 생각을 못 했을까 싶을 정도로 유디트에게는 그가 최고의 신랑감이었다.

“고마워, 한나.”

“응? 갑자기 뭐가?”

고개를 갸웃대던 한나가 떡하니 입을 벌렸다.

“설마…… 너.”

성큼 다가온 한나가 유디트의 두 어깨를 잡았다. 한나는 정신 차리라는 듯이 와다다 쏘아붙였다.

“유디트! 장난이야. 잘생기면 뭐 해? 검술에 미쳐서 가정도 잘 돌보지 않을 텐데! 약혼녀 따위는 신경도 안 쓰고 맨날 검술 연습만 할걸?”

유디트가 환하게 웃었다.

“응, 난 그게 좋아.”

황당하다는 한나의 표정을 뒤로하고 유디트는 책상 위 편지 더미에서 카르단디 가문의 인장을 찾아 손에 쥐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