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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 다정하지 마세요-3화 (3/110)

내게 다정하지 마세요 3화

손에 들린 편지의 매끄러운 겉면을 손가락으로 쓸어내렸다.

어쩌다 보니 몹시 갑작스럽고 충동적으로 자신의 미래를 결정지어 버렸다.

편지는 적당히 예의 차려서 그리 길지 않게 적었다. 어차피 구구절절 쓴다고 해서 저쪽에서 좋게 봐줄 리는 없다.

이미 약혼녀로서의 유디트의 가치는 정해져 있으니까.

페델리안가의 후원을 받는, 신원이 보증된 평민 소녀. 단지 그뿐일 테니.

물론, 이게 좋은 선택일지는 아직 모르겠다.

하지만 뭐든 아셀의 보좌관이 되는 것보다야 나을 것이다. 그러므로 유디트에게는 만족스러운 선택이었다.

* * *

혹여 편지를 부치러 가는 길에 아셀을 만날까 봐 목을 쭉 빼고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신중히 움직였다.

몹시 다행스럽게도 아셀은커녕 그의 새까만 머리카락 한 올조차 보이지 않았다.

이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빨간색 우체통 안에 편지를 넣었다.

시간은 흘러 푸르렀던 하늘에는 어둠이 드리웠고, 방으로 돌아온 유디트는 곧 침대에 누웠다.

편지를 보내고 나면 무거운 짐 덩이를 떨쳐 낸 것처럼 홀가분해질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약간 마음이 미묘했다.

평소라면 쉽게 잠자리에 들었을 텐데, 오늘따라 이상하게 잠이 오지 않아서 잠시 뒤척거렸다.

그러다 유디트는 쓸데없는 상념에 사로잡히고 말았다.

아셀은 왜 자신에게 보좌관 자리를 제안한 걸까.

유디트가 아카데미를 수석으로 졸업할 예정인 인재라고는 하나 자신만큼 우수한 졸업생들은 아카데미에 널려 있었다.

게다가 그 정도의 임금을 제시할 만큼 유디트는 뛰어난 능력자가 아니었다.

역시 오래전부터 봐 온 자신이 편하고 익숙하기 때문에?

유디트는 휙 이불을 뒤집어썼다.

그건 정말이지 기분 나쁜 이유였다.

하지만 그 이유가 맞을 것 같다.

유디트와 아셀은 아주 어릴 적부터 어울리고 놀았으니, 없으면 허전하기 때문에 자신을 옆에 두려는 거겠지.

이불을 쥔 유디트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그렇다면 언제부터였을까. 자신이 아셀을 좋아하기 시작했을 때는.

유디트는 눈을 감은 채 골똘히 생각에 빠졌다.

아셀을 만날 수 있었던 것은 전부 페델리안 가문의 주치의였던 아버지 덕분이었다.

유디트의 어머니는 그녀를 낳자마자 돌아가셨기에, 아버지는 어린 딸의 양육과 생계를 동시에 책임져야 하는 입장에 처하고 말았다.

그런데 페델리안 부인이 이런 사정을 전해 듣자마자 어린 유디트를 데리고 출근할 수 있도록 허락한 것이다.

덕분에 아버지가 진료를 보는 동안 유디트는 페델리안가의 하녀들에게 보살핌을 받을 수 있게 되었다.

조금 더 자란 뒤에는 페델리안가의 아름다운 정원을 제 것처럼 마음껏 뛰어놀 수 있었고 말이다.

아셀을 처음 만난 날에도 유디트는 여느 때처럼 정원을 거닐다, 허공을 날아다니는 이름다운 나비에게 시선을 뺏겼다.

그리고 그 나비에게 눈을 고정한 채로 달리다가 그만 돌부리를 밟고 넘어지고 말았다.

쿵!

하얀 살결이 까지고, 넘어진 무릎에서 피가 났다. 따갑고 아팠다.

하지만 아픈 것보다도 서러운 마음이 컸다.

유디트는 동그랗게 눈을 뜬 채로 밑을 내려다보았다. 처음 입은 연분홍 원피스가 온통 흙투성이가 되고 말았다.

서러웠다. 유디트의 황금색 눈동자에 눈물이 방울방울 고였다. 이내 뚝뚝 떨어져 내렸다.

그때 다정한 음성이 귓가를 파고들었다.

‘다친 거야?’

고개를 들어보자 가장 먼저 보인 건 짙은 청회색 눈동자였다.

그 눈은 자신과 마주치자 살포시 접히더니 가늘게 휘어졌다. 그 매끄럽고 유려한 곡선에 유디트의 입이 멍하니 벌어졌다.

칠흑 같은 머리카락과 하얀색 피부가 선명히 대조를 이루는 소년.

유디트는 마치 살아 움직이는 인형을 보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아프겠다. 괜찮아?’

아셀은 달래듯 나긋한 어조로 말했다. 그리고 주저앉아 있던 유디트처럼 자신도 무릎을 꿇어 눈높이를 맞추었다.

단정한 옷에 주름이 지고, 흙이 엉망으로 묻었다. 하지만 소년은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오히려 다친 유디트의 무릎을 안쓰럽게 쳐다보다 그쪽으로 고개를 숙였다.

‘호 해 줄게. 이러면 금방 낫는다고 했거든.’

말이 끝나자마자 따뜻한 입김이 무릎에 닿았다. 마치 봄날 구름이 가볍게 닿는 기분.

분명 따끔하고 아릿했었는데, 조금 덜 아픈 것 같기도 했다.

하지만 아버지가 의사였던 유디트는 그만 시비를 걸고 말았다.

‘상처가 그런 걸로 나을 리 없어. 빨리 나으려면 약부터 발라야 해.’

자신도 모르게 나온 시비조.

기분이 나빴을까?

유디트는 슬쩍 눈동자만 굴려 아셀을 쳐다보았다. 하지만 다행히 아셀은 기분이 나빠 보이지 않았다.

‘그래?’

아셀이 부드럽게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솨아아- 때마침 저 멀리서 한차례 바람이 불어오며 검은색 머리카락을 흩날렸다.

눈이 부시도록 찬란한 금빛 햇살 아래, 햇살보다 환하게 웃는 소년.

마치 꿈같았다. 유디트의 두 눈에 그 모습이 선명히 박혔다.

‘그럼 약 바르러 가자.’

유디트는 멍하니 그가 내민 하얀 손을 잡았다.

어쩌면 그때부터였을까.

역시 되돌리기엔 너무 늦어 버렸다.

* * *

걱정한 것이 무색하도록 아셀과는 며칠 동안 마주치지 않았다.

물론 유디트가 노력을 하긴 했지만, 어쩌면 아셀 쪽에서도 자신을 피하고 있는 걸지도 모르겠다.

아직 아셀을 볼 면목이 없는 유디트로서는 다행인 일이었다.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그녀는 심장이 조금 조여드는 것을 느꼈다.

어쨌건 시간은 흘러 자신의 편지를 받은 카르단디 가문에서도 곧 답이 도착했다.

당사자를 만나 확실한 결정을 내려 달라는 내용이었다.

“…….”

체이스 카르단디.

그가 지금 유디트의 앞에 앉아 있었다.

동급생이긴 했지만, 겹치는 수업은 없었기에 지나다니면서 몇 번 마주친 게 다인 인물.

이런 식으로 얼굴을 가까이 마주한 건 처음이라 좀 생경한 기분이 들기도 했다.

반면 체이스는 지독히도 재미없다는 얼굴을 한 채, 이야기가 끝나면 금방이라도 연습하러 뛰쳐나갈 듯이 검을 꼭 붙들고 있었다.

누가 봐도 빨리 끝내고 싶다는 듯한 태도였기에 유디트는 굳이 그를 붙잡아 두지 않기로 했다.

어차피 얼굴 보고 인사했으면 된 거 아닌가?

약혼 여부에 대해 구두로 분명하게 확인도 마쳤겠다, 카르단디 가문에서도 더 바라는 건 없을 테다.

평민 고아와 자기 아들이 진심으로 사랑에 빠지기를 기대한 건 아닐 테니까.

그렇게 판단한 유디트는 웃는 낯으로 입을 열었다.

“검술 연습하러 가도 괜찮아.”

자신의 말이 끝나면 체이스가 기다렸다는 듯이 나갈 줄 알았다.

하지만 그는 조금 느릿하게 고개를 기울이더니 유디트를 바라보았다. 햇살 아래에서 보석처럼 빛나는 붉은 눈동자가 유디트를 가만히 응시하고 있었다.

“어떻게 알았어?”

“뭘?”

“내가 검을 수련한다는 거.”

적어도 프로이센 아카데미에서, 그 사실을 모르는 사람이 있을 리가 없었다.

검술 명가 카르단디 가문의 천재 소년.

매년 당연한 것처럼 무투 대회의 1등을 휩쓰는 체이스를 어떻게 모를 수가 있겠는가.

그리고 사실 체이스는 좋은 쪽으로든 나쁜 쪽으로든 유명했다.

좋은 쪽이라면 아까처럼 검술에 뛰어난 재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었고, 나쁜 쪽이라면 검술에만 집중하느라 안하무인인 데다 수업에는 늘 불성실하다는 것이었다.

이걸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할까.

고민하는 유디트를 빤히 쳐다보던 체이스가 먼저 입을 열었다.

“나한테 관심이라도 있었어?”

“……뭐?”

“그래서 약혼을 받아들였던 거구나.”

체이스는 그럴 줄 알았다는 얼굴로 이어 말했다.

“너도 역시 다른 여자애들이랑 다르지 않네.”

유디트는 황당함에 눈만 끔벅였다. 그러는 사이 체이스는 의자에 느릿하게 등을 기대었다.

“네가 가란다고 해서 진짜 막상 가면, 너는 서운해하겠지. 그러면 얼마 지나지 않아서 또 나를 귀찮게 부를 거 아니야?”

“…….”

“그러니까 잠시 어울려는 줄게.”

체이스는 감흥 없는 얼굴로 주르륵 내뱉었다.

혹시 지금 뭔가 오해하고 있는 건가? 유디트는 황급히 입을 열었다.

“저기, 체이스. 약혼 건만 제대로 마무리된다면, 내가 졸업 전까지 너를 불러낼 일은 없을 거야.”

“안 속아.”

체이스는 의자 팔걸이에 팔꿈치를 대더니 턱을 괴었다. 이제 보니 그의 붉은 눈동자에는 불신이 가득 넘실거리고 있었다.

도대체 어떤 삶을 살았기에…… 유디트는 아연해지고 말았다.

체이스의 붉은 시선이 집요하게 유디트의 얼굴을 훑어 내렸다.

“내가 너랑 약혼은 하지만, 그게 너를 약혼녀로서 아끼겠다는 건 아니니까.”

“아, 응…….”

“제대로 이해했어? 앞으로도 내가 너를 사랑하게 되는 일은 없을 거라고.”

그건 유디트도 바라는 바였다.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체이스는 뭔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한쪽 눈썹을 삐딱하게 올렸다.

“절대 사랑하지 않을 거라니까?”

계속 똑같은 말의 반복이었다. 이대로라면 끝나지 않을 것 같기에 유디트는 작은 한숨을 내쉰 채 대답했다.

“체이스, 나도 알아. 억지로 맺어진 사이에 사랑을 바랄 만큼 멍청하진 않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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