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게 다정하지 마세요 4화
“……알면 다행이고.”
잠시 삐끗, 자세가 흐트러졌던 체이스가 이내 똑바로 앉았다.
그러는 사이 종업원이 다가와 여러 디저트류를 테이블 위에 놓고 갔다.
물론 유디트는 이런 것들을 시킨 적 없다. 체이스와 만나는 자리였긴 하지만, 그와 오래 앉아 있을 생각은 없었으므로.
그건 아마도 체이스 또한 마찬가지일 텐데.
그렇다면 종업원이 착각한 건가?
“뭐 해? 왜 보고만 있어?”
“응?”
체이스가 은색 포크 하나를 유디트 쪽으로 내밀었다. 유디트는 우선 받아 들었다.
“먹어. 눈앞에 사람 앉혀 놓고 혼자 먹는 취미는 없으니까.”
“아, 고마워.”
체이스가 시킨 거구나.
이제야 이해가 갔다. 검술 연습하러 가라고 했었는데 시킨 디저트가 있으니까 가지 않았나 보다.
체이스는 겉보기와 다르게 달콤한 것들을 좋아하는 모양이었다.
달콤한 초콜릿이 뿌려진 케이크를 보며 무심코 아셀을 떠올렸다.
누구보다 달콤하게 생긴 아셀은 단 걸 싫어했다.
그런데 십 년이 넘는 세월 동안 아셀을 곁에서 지켜본 유디트가 그 사실을 안 건 채 몇 년이 되지 않았다.
왜냐하면 유디트가 건넨 케이크나 쿠키를 아셀은 늘 군말 없이 받아먹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페델리안 부인에게 아셀이 어릴 때부터 줄곧 단 음식을 입에도 대지 않았다는 말을 들었을 때는, 굉장히 큰 충격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약간의 배신감마저 느껴질 지경이었다.
‘왜 숨겼어?’
‘뭘?’
단 걸 싫어한다고 한마디만 했더라면. 그러면 유디트는 아셀에게 절대 단 음식 같은 걸 권유하지 않았을 테다.
새로 생긴 제과점에서 사 왔다면서, 보기만 해도 혀가 아릴 정도로 달달한 마카롱 따위는 건네지도 않았을 텐데.
하지만 그 말을 들은 아셀이 녹을 듯이 부드러운 음성으로 대답했다.
‘네가 나한테 뭔가를 준다는 게 기뻐서 거절할 수 없었어. 그만큼 내 생각을 해 줬다는 거잖아.’
순간 그가 미소 지었다.
마치 작정하고 누군가를 유혹하려는 듯이, 한순간 사람을 함락시켜 버릴 만큼 환한 미소를.
‘비록 내가 단 걸 싫어한다지만, 유디트 네가 주는 거라면 뭐든 먹을 수 있어.’
……골똘히 생각에 잠긴 그녀를 체이스가 불렀다.
“무슨 생각해?”
“……너 단 걸 좋아하나 보구나.”
잠시 침묵했던 유디트는 거짓말했다. 아셀을 떠올리고 있었다고 솔직하게 말할 순 없었으므로.
그런데 체이스는 포크를 들고 케이크를 장난치듯 뭉개더니 내뱉었다.
“안 좋아하는데.”
유디트는 포크질 한 번에 처참하게 짓뭉개진 초코케이크를 여상히 바라보다 고개를 들었다.
고개를 들자마자 자신을 빤히 쳐다보고 있던 눈과 눈이 마주쳤다. 붉은 눈동자는 햇빛 아래에서 유리구슬처럼 투명했다.
“그러면 왜 시킨 거야?”
“너는 좋아하는 거 아니야? 보통 여자애들은 이런 거 좋아하니까.”
그 말은, 자신 때문에 이 모든 디저트를 시켰다는 건가.
곧 유디트가 경계하는 눈빛으로 체이스를 바라보았다.
낯선 사람을 본 고양이처럼 몸을 바짝 세우고, 날카롭게 눈을 홉떴다.
“이러는 이유가 뭐야?”
“뭘?”
“왜 나한테 이렇게 친절하게 구냐고.”
더 이상 누군가의 의미 없는 다정함에 휘둘리는 건 질색이었다.
분명 다른 목적이 있을 거라 생각한 유디트는 포크를 쥔 손에 힘을 꾹 쥐었다.
“지금 그게 불만인 거야?”
체이스가 황당하다는 듯이 내뱉었다. 잘해 줘도 난리라는 듯이.
하지만 유디트로서는 경계할 수밖에는 없었다.
그녀에게 이런 것들을 사 준다고 해서 체이스가 뭔가 대가를 얻을 수 있는 것도 아니었으니까.
체이스는 요령 좋게 포크를 한 바퀴 휙 돌리며 말했다.
“네가 갑자기 약혼 안 한다고 하면 어떻게 해. 그러니까 이건 일종의 뇌물이야.”
“……그런 이유라면 굳이 이럴 필요 없어. 내가 약혼을 취소할 리는 없으니까.”
그 말을 하며 유디트는 체이스 너머로 보이는 창문 밖 풍경을 힐끔 내다보았다.
바깥은 여름날답게 여전히 푸르렀지만, 슬슬 해가 기울고 있었다. 통금 시간 전에는 기숙사로 돌아가야만 했다.
그만 논쟁을 마무리하기 위해 입을 열었다.
“만약 약혼이 깨진다면, 그건 전적으로 너 때문일 거야.”
“어떻게 그렇게 확신하지? 사람 마음이란 건 원래 쉽게 변하잖아.”
체이스가 가볍게 덧붙였다.
“갑자기 네가 좋아하는 사람이라도 생겨서 약혼을 깨면 어떻게 해?”
순간, 해가 기울면서 유디트의 황금색 눈동자에 오후의 햇빛이 내렸다.
타오르는 붉은색과 주황색, 그리고 금색이 어지러이 뒤섞였다.
분명 따뜻하기 짝이 없는 색감. 하지만 체이스는 그 눈빛이 어딘지 서늘하다고 느껴졌다.
유디트는 입꼬리를 사뿐히 말아 올렸다.
“그럴 리 없다고 했잖아.”
다행히 체이스는 유디트에게 뭔가를 더 묻지 않았다.
사실 굳이 캐물을 만큼의 흥미는 없었는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그 이후로 유디트는 예쁜 접시 위에 놓인 아몬드 쿠키를 기계처럼 씹어 먹으며 창밖만 바라보았다. 빨리 먹어 치우기 위해서였다.
별다른 맛은 느껴지지 않았다.
어디론가 바쁘게 움직이는 사람들. 웃고 있는 사람들. 연인과 가족들. 아이의 손에 들린 분홍색 솜사탕과 광장 중앙의 커다란 분수대.
모든 게 여느 때와 같았다. 유디트는 가만히 있어도 시간은 흐르고 세상은 움직인다.
그리고…… 잠깐.
무엇인가를 발견한 유디트는 황급히 체이스 쪽으로 다가가 그의 등 뒤에 숨었다.
갑작스러운 유디트의 행동에 깜짝 놀란 체이스가 몸을 작게 움찔했다.
“왜 그래?”
“잠시만.”
아셀, 분명 아셀이었다.
거리가 꽤 멀었음에도 불구하고 유디트는 인파에 섞인 아셀을 곧바로 알아볼 수 있었다.
쿵쿵, 심장이 빨리 뛰기 시작했다.
유디트는 체이스의 재킷을 붙잡고 그의 등 뒤에 숨어서 몰래 창밖을 바라보았다.
검을 수련한 체이스의 어깨가 넓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그런데 이상했다. 분명 오른쪽으로 걸어가고 있던 아셀이 무언가를 발견한 듯이 발걸음을 돌렸다.
마치 지금 유디트가 있는 이 디저트 카페를 향하고 있기라도 한 것처럼…….
화들짝 놀란 유디트는 체이스의 재킷을 붙잡은 손에 힘을 더 싣고 말았다.
“그러다 찢어지겠어. 불만이 있었다면 말로 하지?”
체이스가 뭐라고 빈정거렸다. 하지만 유디트의 귀에는 잘 들어오지 않았다.
지금 유디트의 신경은 온통 아셀에게 쏠려 있었으니까.
그러는 와중에도 아셀은 다가오고 있었다. 어딘가 확신을 담은 얼굴로, 성큼성큼.
눈을 한 번 깜박일 때마다 거리가 눈에 띄게 좁혀 들고 있었다.
딸랑-.
잠시 후 가게 안에 맑은 종소리가 울림과 동시에, 유디트가 정말 마주치고 싶지 않았던 남자가 들어왔다.
아셀 페델리안.
뛰어온 것처럼 그의 이마 위 머리카락이 조금 헝클어져 있었다.
잠시 가쁘게 숨을 내쉰 아셀은 머리를 천천히 손으로 쓸어 올렸다. 부드러운 흑발은 손가락 사이사이를 흩날렸다가 살포시 이마 위로 내려앉았다.
잠시 숨을 고른 뒤 아셀은 고개를 돌려 망설임 없이 이쪽을 보았다.
처음부터 유디트가 여기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는 듯이.
그의 청회색 눈동자와 시선이 마주치자마자, 허공을 부유하던 공기가 일순 멈춘 듯했다.
곧 아셀이 한 걸음씩 다가왔다.
가게에는 수많은 사람으로 혼잡했으나 아셀의 시선은 유디트에게만 고정되어 있었다. 오로지 유디트만 보인다는 듯.
그리고 그건 유디트도 마찬가지였다. 그를 피해야 한다는 걸 알면서도 제자리에 못 박힌 듯 꼼짝도 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녀를 앞두고 고작 몇 걸음 앞에서 아셀은 걸음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체이스가 마치 유디트를 보호하려는 듯이 둘 사이를 가로막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커다란 등 뒤에 숨겨진 유디트는 그제야 참고 있던 숨을 내쉬었다.
“내 약혼녀에게 무슨 볼일이라도?”
“약혼녀?”
체이스에게 가려져 아셀의 얼굴은 볼 수 없었지만, 들려오는 목소리는 평소처럼 다정하기만 했다.
다행이었다. 아셀이 자신에게 화가 난 것은 아닌 듯해서.
아셀과의 인연을 끊어 낸다 어쩐다고 하며 속으로 다짐했던 유디트였지만, 그래도 자신 때문에 화난 아셀을 볼 용기는 아직 없었다.
안심하며 가슴을 쓸어내리는데, 아셀이 특유의 나긋한 어조로 물어 왔다.
“유디트, 저게 무슨 소리야?”
유디트를 향한 질문이었지만 대답한 건 체이스였다.
“무슨 소리긴. 말 그대로지.”
체이스는 자신의 등 뒤에 어깨를 웅크리고 숨어 있던 유디트의 팔을 잡았다. 그 행동에는 어떤 주저함도 없었다.
그는 눈을 동그랗게 뜬 유디트를 자신의 곁에 세우더니 냉큼 어깨동무까지 했다. 그리고 아셀을 향해 당당하게 외쳤다.
“내 약혼녀가 유디트라고. 우린 곧 결혼할 사이거든.”
얼떨결에 체이스의 옆에 세워져 아셀과 정면으로 마주하게 되어 버렸다.
조금 망설이다가 고개를 들어 보니 여느 때처럼 부드러운 미소를 짓고 있는 아셀이 보였다.
눈이 마주치자 그 미소가 잠시 일그러졌다. 하지만 이내 아셀은 능숙하게 표정을 수습했다.
“그게 무슨…….”
그러나 체이스의 말에 충격을 받긴 한 건지, 목소리의 끝부분이 아주 살짝이지만 떨리고 있었다.
아셀이 충격을 받은 이유는 단순했다.
가장 친한 친구가 이런 중요한 소식을 미리 알리지 않았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