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게 다정하지 마세요-5화 (5/110)

내게 다정하지 마세요 5화

유디트는 그가 자신을 정말 좋은 친구로만 생각한다는 사실을 대략 3개월 전에야 깨달았다.

‘유디트. 말해 줄 게 있어.’

어딘지 모르게 쑥스러워하는 얼굴로 아셀이 입을 열었다.

‘나 사실 약혼해.’

‘……뭐?’

유디트는 들고 있던 펜을 떨어뜨렸다. 바닥을 데구루루 구르는 펜.

아셀은 허리를 숙여 그걸 주웠다. 그리고 유디트의 손에 다정히 다시 쥐여 주었다.

길고 곧은 손가락이 유디트의 손등을 살짝 스치고 지나갔다.

유디트의 반응을 뭐라 생각한 건지 아셀은 살포시 웃어 보이며 품 안에서 사진을 꺼내 들었다.

그리고 그녀에게 보여 주었다. 사진 속에는 유디트도 잘 아는 인물이 있었다.

아카데미에서 아셀만큼 유명한, 리아나 제르니아스.

제르니아스 공작가의 금지옥엽 공녀.

탐스러운 보라색 머리카락과 매혹적인 눈매를 가진 감탄이 나올 정도로 아름다운 여자.

그 사진 앞에서 유디트는 한없이 초라해지고 작아졌다.

아셀이 부끄럽다는 듯이 유디트를 향해 속삭였다.

‘이거, 우리 부모님 외에 아직 아무도 몰라. 너한테만 처음 말하는 거야.’

‘…….’

이런 걸 왜 나한테 말하냐고 따지고 묻고 싶었다.

유디트는 눈물이 차오른 눈가를 숨기기 위해 고개를 푹 숙였다. 하지만 아셀은 유디트가 감동받았다고 착각한 듯했다.

‘그렇게 울 것까진 없잖아, 유디트. 아무튼 너도 이런 일 있으면 나한테 먼저 말해 주기다.’

환하게 웃으며 아셀은 유디트의 가슴에 대못을 박았다.

‘너는 나한테 무척 소중한 사람이니까…… 너에 관한 일은 내가 가장 먼저 알고 싶어.’

그 이후로 유디트는 아셀의 입에서 나오는 ‘친구, 소중한’ 이런 단어들이 치가 떨리게 싫어졌다.

상념은 이내 깨졌다. 어깨를 감싸 오는 체이스의 단단한 팔 때문에.

매일 검을 잡고 살았다는 것을 증명하듯 얇은 셔츠 너머로 섬세하게 잡힌 근육이 느껴졌다.

“차였으면 자꾸 질척이지 말지? 전 남자친구 주제에.”

그 말에 아셀보다 유디트가 깜짝 놀랐다.

“아셀이 내 전 남자친구일 리가 없잖아! 아셀은…….”

조금 말끝을 흐리다 유디트가 간신히 내뱉었다.

“페델리안 공작가의 공자고, 이미 약혼녀가 있는데.”

“그건 나도 알아. 아무리 듣고 싶지 않아도 사방에서 떠들어 대는 말들을 모두 무시할 순 없으니까.”

체이스는 무심히 중얼거렸다.

“하지만 여기는 원래 그런 바닥이니까. 약혼을 했어도 다른 사람에게 한눈을 파는 짐승들 소굴이지.”

신랄한 어조에 유디트는 어떻게 반응을 해야 할지 몰라 눈만 끔벅였다. 순간 유디트의 어깨를 감싸던 팔이 풀렸다.

체이스가 본인의 의지로 푼 것은 아니었고, 성큼 걸어온 아셀이 부드럽게 팔을 풀어낸 것이다.

“유디트가 듣고 있잖아. 말조심 좀 해야지?”

나긋하지만 어딘가 단호한 어조로 아셀이 말했다. 청회색 눈동자를 체이스에게 고정한 채로.

“그리고 체이스 카르단디. 난 너한테 묻지 않았는데.”

“대답하기 곤란해 보이길래 대신 대답해 준 것뿐이야.”

체이스는 왜 열을 내냐는 듯이 어깨를 으쓱해 보였지만, 눈빛은 타오르는 듯이 사나웠다.

잠시 둘만의 시선 교환이 이어졌다.

하지만 그건 길지 않았다. 아셀이 금방 체이스에게 시선을 떼었기 때문이다.

대신 그는 유디트에게 눈길을 주었다.

어느새 유디트의 시야에 아셀이 가득 찼다.

비 맞은 강아지처럼 눈썹을 내려뜨린, 안쓰럽고 처량한 표정의 아셀이.

“유디트, 정말 체이스가 네 약혼자야?”

“응.”

유디트의 확인 사살에 아셀이 더욱 충격받은 얼굴을 했다. 그의 목소리가 촉촉하게 젖었다.

“나는 이런 소식은 네가 나한테 먼저 알려 줄 줄 알았는데…….”

역시 아셀은 예상처럼 충격받았다.

유디트가 다른 사람과 약혼한다는 것 때문이 아니라, 약혼 소식을 미리 알리지 않았다는 것 때문에.

두 사람 다 약혼을 했지만 충격을 받은 이유는 이렇게나 달랐다. 그 극명한 차이에 유디트는 마음이 미어지듯이 아팠다.

한편 체이스는 아셀을 처음 본 순간부터 뭔가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시비조로 물었다.

“얘가 왜 너한테 먼저 말해 줘야 하는데? 네가 뭐라고?”

그에 유디트가 놀란 눈으로 체이스를 올려다보았다.

만사 귀찮다는 태도의 그가 생판 남인 자신을 대변해 줄 줄은 몰랐기 때문이다.

아셀을 원래 별로 안 좋아했나? 아니면 아무리 형식적인 사이라고 해도 자신의 약혼자가 다른 남자와 어울리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아서?

뭐가 됐든 자신에게는 다행인 일이었다. 지금의 자신으로선 아셀을 무르게 대할 수밖에 없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이대로 두 사람을 내버려 둘 수는 없었다. 이미 언성이 조금씩 높아지면서 카페 안의 사람들에게 주목을 받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물론 그저 훤칠하고 잘생긴 미남들이 서 있어서 쳐다보는 걸 수도 있을 테지만.

유디트는 상황을 진정시키기 위해 서둘러 대화에 끼어들었다.

“아셀은 그냥 친구야.”

“그것도 알아. 아셀 페델리안이 아카데미를 입학할 때부터 어떤 분홍 머리 여자애 뒤를 졸졸 따라다닌다는 건 유명했으니까.”

그런 소문이 있었단 말이야?

하지만 아셀은 이미 알고 있던 소문이었는지 전혀 개의치 않으며 대답했다.

“그래. 나는 유디트와 입학하기 전부터 친구 사이였어. 너보다 훨씬 먼저 알았다는 거지.”

그렇게 말하며 아셀은 이만 비켜서라는 듯 체이스를 빤히 응시했다.

그러나 체이스는 비웃듯이 한쪽 입꼬리를 들어 올릴 뿐이었다.

“흠. 고작 친구? 유디트와 나는 곧 결혼할 사이고, 가족이 될 텐데 친하건 말건 그게 다 무슨 소용이야?”

체이스가????고작 친구’에 강세를 두며 말했다.

그에 할 말이 없었는지 아셀의 고요한 바다 같은 눈동자가 살짝 떨렸다. 잠시 입술을 뻐끔거리다 그가 다시 내뱉었다.

“내게도 유디트는 가족이나 다름없어. 유디트는 그만큼 소중한…….”

“그만!”

유디트는 아셀의 말을 중간에 멈출 수밖에는 없었다.

친구에 이어서 가족까지.

더는 참을 수 없었다. 마음이 갈래갈래 찢겼다. 어떻게 이어 붙이지도 못할 만큼.

“그만해, 아셀!”

유디트가 소리치자 아셀이 놀란 듯이 눈을 커다랗게 떴다.

그 틈에 그녀가 재빠르게 물었다.

“여긴 왜 왔어? 디저트를 사러 온 거야?”

그 말을 내뱉고 생각했다. 단 것을 싫어하는 아셀이 디저트를 사러 올 리가 없다는 걸.

그렇다면…….

혹시나 했지만 아셀은 역시 예상한 대답만을 내놓았다.

“나는 너를 보러 온 거야. 하고 싶은 말이 있어서.”

“…….”

“사과하러 왔어.”

아셀은 정말 착해 빠졌다. 바보 같을 정도로.

유디트에게 일방적으로 폭언을 들었음에도 아셀은 유디트의 눈치를 살폈다.

마치 잘못한 후에 주인을 향해 꼬리를 만 강아지 같은 행동이었다.

제국의 단 두 개밖에 없는 공작가, 페델리안의 후계자가 할 만한 행동은 아니었다. 더욱이 자신 같은 사람에게는.

“저번에는 내가 미안해. 내가 뭔가를 실수한 거지?”

“……왜 실수했다고 생각하는 건데?”

“그야 네가 아무 이유도 없이 나한테 화낼 리가 없으니까.”

유디트를 응시하는 청회색 눈에는 견고한 신뢰와 믿음이 깔려 있었다.

유디트는 그 눈을 피했다. 바닥의 나뭇결무늬만 덧그리며 내뱉었다.

“아무 이유도 없이 화낸 거 맞아.”

이런 말을 하면 아셀은 자신에게 정을 뗄 수 있겠지.

물론 말하는 유디트의 마음은 아파 왔지만, 이제는 차츰차츰 멀어져야 할 때였으니까.

그러나 아셀이 걱정 어린 목소리로 재차 물었다.

“그날 기분이 안 좋았어?”

“…….”

“혹시 무슨 일이라도 있었던 거야?”

아셀은 또 유디트를 흔들었다. 겨우 굳게 잡았던 마음을 송두리째.

물론 본인은 모를 테고, 그럴 의도는 전혀 없었겠지만.

유디트는 흔들리려는 마음을 겨우 다잡았다.

대신 페델리안 부인을 떠올렸다. 그녀는 언제나 유디트를 향해 온화하게 웃어 주며 머리카락을 쓰다듬어 주곤 했다.

유디트는 그 따스한 손길을 받을 때면 늘 가만히 눈을 감고 미소 지었다. 엄마의 온기란 이런 걸까 생각하곤 했다.

하지만 언젠가 그녀의 생각을 엿듣고 말았다.

봄바람에 나뭇잎이 나부끼고, 화창한 햇빛이 길게 그림자를 드리우던 날이었다.

그날 페델리안 부인은 다른 귀부인들을 초대해 정원에서 티타임을 가졌었다.

정원에 퍼져 나가는 화목한 웃음소리들.

화단에서 노란색 장미꽃을 꺾은 유디트는 그걸 부인에게 선물하기 위해 정원으로 살금살금 걸어가던 중이었다.

웃음소리가 잠시 멈추고, 페델리안 부인이 온화한 어조로 말했다.

‘어머, 아셀은 똑똑한 아이랍니다. 지금은 유디트와 격 없이 어울리곤 있다지만 커 가면서 알아서 처신을 잘하겠죠. 장차 페델리안 가문을 이끌 하나뿐인 후계자가 그런 것도 못 하겠나요?’

유디트는 발걸음을 멈췄다. 그리고 뒷걸음질 치기 시작했다.

티 테이블과 조금 멀리 떨어져 웃음소리가 완전히 들리지 않았을 때, 유디트는 달렸다.

마치 무서운 무언가로부터 도망치려는 사람처럼.

그때 처음 깨달았다.

자신은 아셀과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란 걸.

페델리안 부인은 유디트를 아껴 주지만 딱 그 정도뿐이다.

기껏해야 애장품, 강아지 정도의 취급이지 자신과 동등하게 생각하진 않는다. 너그럽고 자비로운 부인에게도 선이 존재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