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게 다정하지 마세요 6화
어쩌면 아셀도 마찬가지 아닐까.
어릴 때부터 알아 온 소중한 친구라지만, 그래도 은연중에는 넘을 수 없는 벽이 존재한다고 여기고 있을지도 모르는데.
그 당연한 사실을 유디트는 늦게 깨달았다.
처음 그 사실을 알았을 땐 슬펐지만 지금은 슬프지 않았다.
네모난 돌이 파도에 쓸리며 점차 둥글어지는 것처럼 원래 아픈 것도 계속 겪다 보면 익숙해지는 법이니까.
물론 익숙해질 때까지는 시간이 꽤 걸렸지만, 지금의 유디트는 아무렇지도 않게 그 사실을 인정할 수 있는 상태였다.
“무슨 일 없었어. 그냥 내가 성격이 나쁜 거야.”
내뱉듯이 말하며 유디트는 뺨에 닿는 아셀의 시선을 애써 피했다.
* * *
“한나, 혹시 짝사랑해 본 적 있어?”
뜬금없는 유디트의 물음에 침대에 누워 로맨스 소설책을 읽고 있던 한나가 고개를 들었다.
한나의 눈에 언뜻 진지한 얼굴의 유디트가 보였다.
“왜 물어봐?”
“그냥.”
“흐음, 이상한데…….”
유디트는 입고 있던 극세사 잠옷을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뭐가 이상해? 물어볼 수도 있지.”
유디트의 말대로, ‘짝사랑해 본 적 있냐’라는 질문 자체는 이상한 게 아니었다.
하지만 유디트가 뜬금없이 그런 질문을 하는 것은 의외였기 때문에 궁금해할 수밖에 없었다.
무슨 심경의 변화라도 있는 걸까?
한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하지만 네가 이런 걸 궁금해하는 게 처음이잖아.”
그녀는 책을 읽느라 콧등까지 내려온 검은색 안경테를 추켜올리며 이어 말했다.
“게다가 소꿉친구가 아셀 페델리안이고 약혼자가 체이스 카르단디인데 웬만한 남자가 눈에 차겠니? 다 오징어로 보일 거 아냐.”
“…….”
“유디트, 설마 네 눈에는 나도 오징어로 보이는 건 아니지?”
걱정 반 장난 반인 물음에 유디트가 맑은 웃음을 터트렸다.
“아니야. 설마 그러겠어.”
“그럼 다행이고.”
한나는 읽고 있던 소설책을 덮었다.
갑자기 질문하는 유디트의 의도는 모르겠으나 자신에게 물어본 이상 성의껏 대답해 주어야 했다.
다행히도 한나는 유디트에게 해 줄 이야깃거리가 많았다. 한때 짝사랑을 많이 경험해 봤으니까.
“아무튼 본론으로 돌아가서 답해 주자면, 많이 해 봤지. 어렸을 때는 거의 한 달에 한 번꼴로 좋아하는 남자애가 생겼어.”
“정말?”
“응, 나는 금방 사랑에 빠지는 타입이어서.”
그런데 어쩌다 좋아하게 됐냐, 결국 사귀었냐 등을 물어볼 줄 알았던 유디트는 의외의 질문을 했다.
“그러면 혹시 짝사랑을 잊어 본 적도 있어?”
유디트는 어딘가 비장해 보였다. 한나는 이런 질문들을 하는 유디트의 의도를 점점 더 알 수 없게 됐지만 우선 얌전히 대답해 주었다.
“당연하지.”
“어떻게 잊었어?”
한나는 검지로 입술을 두드리며 곰곰이 생각에 빠졌다.
짝사랑이라. 사실 한나는 아카데미에 입학한 이후 쏟아지는 시험과 과제에 허덕거리느라 그런 달콤한 감정은 잊고 산 지 오래였다.
자신의 짝사랑이 가망이 없다는 걸 알았을 때에는 어떻게 잊었더라…….
한나는 차근차근 기억을 더듬어 올라가다 곧 생각난 듯이 대답했다.
“글쎄, 계속 안 보면 잊히던데. 보고 싶어도 꾹 참고, 최대한 피하면서 살면 자연스럽게 감정도 사라지더라고.”
“…….”
“아니면 또 다른 사랑을 찾으면 돼. 원래 좋아했던 사람보다 더 좋아하는 사람이 생기면 자연스럽게 잊히는 법이지.”
유디트는 잠시 말이 없었다. 하지만 이내 입가에 작은 미소를 띄웠다.
“그렇구나. 고마워, 한나.”
유디트의 질문이 끝났으니 이젠 한나가 질문할 차례였다.
한나는 반짝거리는 눈을 하며 유디트의 침대로 뛰어들었다.
출렁, 매트리스가 한바탕 요란하게 흔들렸다. 자세를 추스린 한나는 유디트의 옆에 딱 붙어 앉았다.
“그런데 너 오늘 체이스랑 첫 만남 아니야? 어떻게 됐어?!”
신나 보이는 한나를 향해 유디트가 어색하게 웃었다.
“그냥. 카페에서 이야기 좀 나누다가 헤어졌어.”
“무슨 이야기? 자세히 말해 봐 봐.”
유디트는 입을 다물고 뭔가 말을 고르는 듯하더니 내뱉었다.
“뭐…… 약혼은 하지만 나를 절대 사랑하지 않을 거라던데.”
“흐응. 역시 검에 미친 사람답네. 그걸 첫 만남에서 대놓고 말하다니.”
한나는 혀를 쯧쯧 찼다. 그리고 슬쩍 자신이 방금까지 읽고 있던 소설책을 바라보았다.
소설에선 원래 그런 말을 하는 애들이 나중에 불같은 사랑을 하곤 하던데, 아마 현실은 소설처럼 아름답지만은 않으리라.
슬쩍 유디트를 쳐다보았는데 유디트는 아무 타격이 없어 보였다. 애써 괜찮은 척을 하는 수준이 아니라, 정말 괜찮아 보였다.
유디트는 어깨를 으쓱했다.
“그래도 체이스와는 좋은 관계가 될 수 있을 것 같아. 우리는 서로 원하는 게 같거든.”
게다가 아셀을 떼어 놓는 데 제법 큰 도움을 주기까지 했었지.
유디트는 확실히 약혼 상대로 그를 선택한 보람이 있다고 느꼈다.
“네가 상처받지 않았다면 다행이지만…….”
한나는 무덤덤해 보이는 유디트를 보며 머릿속으로 체이스 카르단디를 떠올렸다.
루비를 박은 듯한 선명한 붉은 눈동자와 조각 같은 이목구비.
온종일 땀을 흘리며 검술을 연습하는데도 피부는 잡티 하나 없이 희고 고왔다.
그런 체이스가 연무장에서 검을 잡을 때면, 학생들이 몰래 숨어서 지켜보곤 했다. 남녀 가릴 것 없었다.
여학생들은 체이스를 남몰래 흠모했고 남학생들은 그를 동경의 대상으로 삼았다.
매사 세상을 감흥 없이 바라보는 체이스의 눈은 검을 들었을 때 가장 날카롭게 빛났다.
기본적인 동작을 하며 흔들리는 은빛 머리칼은 달을 길게 늘여 만든 실타래 같았다.
잠시 휴식을 취할 때마다 그 은빛 타래를 쓸어 넘기는 모습은 주위 여학생들 말로는 숨이 막힐 지경이라고 한다.
“체이스가 워낙 잘생겼어야 말이지. 어렸을 때부터 하도 사람들한테 시달리다 보니까 환멸이라도 났나 봐. 사람들의 말을 개무시하는 것도 아마 그런 경험들이 쌓이고 쌓여서 그런 거겠지.”
물론 한나도 확신하진 못했지만 체이스의 외모 정도라면 충분히 가능성 있는 이야기였다.
유디트는 별로 관심이 없는지 그렇구나, 하고 말았다.
사실 유디트의 머릿속에는, 일전에 아셀의 화를 돋우던 체이스의 모습만이 반복해서 떠오르고 있을 뿐이었다.
* * *
가끔은 생각한다.
내가 그 정원에서 넘어지지 않았더라면. 넘어진 나를 아셀이 발견하지 못했더라면.
그리고…… 아셀이 조금만 덜 다정했더라면.
그랬더라면 우리는 달라지지 않았을까. 이렇게 괴로운 짝사랑 따위 하지 않아도 되었을 텐데.
하지만 큰 의미는 없는 가정이라고 유디트는 생각했다.
아셀이 유디트를 사랑하지 않아도 유디트는 아셀을 사랑할 수밖에 없었다.
이제 자신에게 남은 사람은 오직 그뿐이었으니까.
유디트의 아버지도 어머니와 마찬가지로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마차 사고였다.
아버지의 죽음.
유디트는 어렸지만 죽음이란 게 무엇인지 정도는 알고 있었다.
그건 아버지를 다시는 볼 수 없고, 만질 수 없고, 목소리를 들을 수도 없다는 뜻이었다.
유디트의 전부가, 세상이 한순간에 망가졌다. 마음이 무너지도록 슬펐으나 이상하게 눈물은 나오지 않았다.
아버지의 장례는 깔끔하고 신속하게 치러졌다. 페델리안 공작 부인이 각별히 신경 써 준 덕분이었다.
유디트는 갈색의 관이 땅속에 파묻히는 광경을 가만히 내려다보기만 했다. 종이 인형처럼.
혼자 남겨졌다는 것이 처음으로 실감 났다.
이제 아침마다 자신을 깨워 주고, 함께 밥을 먹어 줄 사람이 영영 사라진 것이다.
그때 아셀이 성큼 다가와 유디트를 꼭 끌어안았다. 그때의 아셀은 유디트보다 작았다.
덕분에 그의 품에 완전히 안기지 못하고 머리가 빼꼼 튀어나와 버렸다.
하지만 그 품은 따뜻했다. 얼어붙은 심장이 녹아내리는 것 같을 정도로.
그날 아셀은 유디트 대신 눈물을 흘리려는 듯이 코까지 빨개진 채로 엉엉 울었다.
대체 누구의 아버지가 죽었는지도 모를 정도로 아셀은 대성통곡을 했다.
유디트는 울고 있는 아셀의 등을 엉성하게 토닥거렸다.
‘울지마, 아셀.’
‘하지만 어떻게 안 울어.’
유디트의 어깨에 얼굴을 파묻고 있던 아셀이 고개를 들었다.
그의 긴 속눈썹은 벌써 흠뻑 젖은 데다, 청회색 눈동자는 물기를 머금어 평소보다 빛이 흐려져 있었다.
아셀이 애처롭게 어깨를 떨면서 손을 올렸다. 그리고 유디트의 두 뺨을 살짝 감쌌다.
‘너한테 슬픈 일이 일어났는데, 내가 어떻게 안 울어.’
‘나는…….’
대체 누가 누구를 위로해 주는 상황인지 모르겠다고 생각하며 유디트가 이어 말했다.
‘이상하게 눈물이 안 나는걸.’
어릴 때의 유디트는 눈물이 없는 편이 아니었다. 은근히 엄살이 심해 작은 아픔에도 잘 울곤 했다.
아셀과 처음 만났을 때도 그랬고, 아버지가 주사를 놓아 주실 때도 번번이 그랬다.
그런데 지금은 왜 눈물이 나오지 않는 걸까. 고장 나 버린 걸까.
너무 큰 충격을 받아서 망가져 버린 게 분명하다고 유디트는 생각했다.
아버지는 고장 나거나 망가진 주방용품들을 보며 혀를 쯧 차고 말씀하시곤 했다.
이런 것들은 가지고 있어 봤자 쓸모가 없다고. 괜히 공간만 차지하니 버리는 게 속 편하다고.
그렇다면 나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