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게 다정하지 마세요 7화
그때 아셀이 나쁘게 흐르려는 그녀의 생각을 멈추게 하려는 것처럼, 힘주어 양 뺨을 잡으며 속삭였다.
‘울지 않아도 돼.’
‘…….’
‘우는 건 내가 할 테니, 너는 웃는 것만 하도록 해.’
텅 빈 가슴은 여전히 시렸다.
하지만 그렇기에 맞닿은 온기가 더욱 따뜻하게 느껴졌다.
아셀은 알고 있을까?
그 단순한 말 한마디가 유디트에게는 얼마나 큰 의미였는지를.
* * *
지금 유디트는 체이스가 검술을 수련하는 수련장에 와 있었다.
아카데미를 4년간 다녔지만, 유디트는 처음 와 보는 곳이었다.
그도 그럴 게 지하에 위치해 있어 멀기도 했고, 검술은 그녀의 전공과는 거리가 먼 과목이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그녀가 여기까지 방문한 이유는 바로 체이스의 부탁 아닌 부탁 때문이었다.
아셀과 체이스, 그리고 유디트가 의도치 않게 삼자대면을 했던 날.
체이스는 기숙사로 돌아가려는 그녀를 불러세웠다.
‘이제 너는 내 약혼녀니까 나를 좀 도와줘야겠어.’
물론 부탁이라기엔 전혀 공손한 태도가 아니었지만.
나더러는 귀찮게 불러내지 말라더니, 본인이 불러내는 건 괜찮은 모양이지.
제 편의에 따라 손바닥 뒤집듯 바뀐 태도였지만 유디트는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한번 들어 보고 도와줄 수 있는 거라면 도와줄게.’
체이스는 곧장 본론을 말했다.
‘그럼 내일 나랑 같이 검술 수련장에 가 줘.’
‘왜?’
‘가 보면 알 거야.’
딱히 어려운 부탁은 아닌 듯했다. 그렇기에 유디트는 대답했다.
‘그래.’
사실 체이스에게 예상하지도 못한 도움도 받았겠다, 이 정도쯤이야 흔쾌히 들어줄 수 있었다.
그렇잖아도 유디트는 지난 삼자대면을 이후로, 아셀을 상대하기에 체이스가 꽤 적절한 상대라는 것을 깨달은 참이었으니.
평소 아셀은 학생회장인 데다가 신분도 높았기 때문에 아카데미 내에서 그를 함부로 대할 수 있는 사람이 없었다.
하지만 체이스는 그런 아셀에게 적대감을 드러냈다. 게다가 자신과 아셀이 어울리는 걸 못마땅하게 여기는 듯 보였다.
계속 매달려 오는 아셀에게 쭉 냉대할 자신이 없었던 유디트는 자신의 새로운 약혼자에게 기대를 걸어 보기로 했다.
사실 양심에 좀 찔리기는 했다.
체이스는 아마 자신이 이런 의도로 이용당하고 있으라고는 생각지도 못하고 있을 테니까.
그래서 나름대로 사죄의 마음을 담아 체이스가 오늘 무엇을 요청해 오더라도 웬만하면 들어줄 생각이었다.
체이스가 뾰족한 투로 말을 건넸다.
“너, 혹시 몰라 경고하는데 잘 들어.”
경고? 하필 수련장에서 경고하려는 게 뭘까.
자신의 검을 만지지 말라거나, 연습하는 걸 방해하지 말아 달라거나. 뭐 그런 종류인 걸까.
하지만 체이스는 유디트의 예상에서 한참을 벗어난 말을 내뱉었다.
“내가 검술 연습하는 거 봤다고 나한테 반하면 안 돼.”
“…….”
유디트는 대답하지 못했다. 체이스가 장난치는 건가 싶어서.
그사이 체이스가 덧붙였다.
“절대로.”
진심인가? 쉽게 믿어지진 않았지만 놀랍게도 진심 같았다. 체이스는 유디트를 웃음기 한 점 없는 얼굴로 내려다보고 있었으니.
황당한 기색을 숨기지 못한 유디트가 질문했다.
“그게 부탁하려던 거야?”
“아니, 이건 그냥 경고일 뿐이야. 부탁은 이따 보면 알 거야.”
체이스는 다시 한번 자신에게 했던 말을 상기시켰다.
“아무튼 명심하라고. 물론 어렵겠지. 그래도 노력이라도 하란 말이야.”
“너에게 반하지 않으려는 노력?”
“그래.”
체이스는 그 말을 끝으로 수련을 시작하려는지 검을 집어 들었다.
허리를 곧게 펴고 팔을 뻗는 동작은 검술의 검 자도 모르는 유디트가 봐도 뭔가 강하면서도 부드러워 보였다.
체이스가 한 번 검을 휘두를 때마다 은색 머리카락이 나비의 날갯짓처럼 허공에 나풀거렸다.
그가 반하지 말라며 경고한 것은 여전히 좀 우습긴 했다. 그러나 저 모습을 보면 약간 이해가 갈 것 같기도 했다.
체이스는 입을 열 때보다 말없이 수련에 열중하고 있을 때가 훨씬 나아 보였으므로.
“유디트.”
그때 체이스의 목소리가 유디트를 상념에서 깨웠다.
“내가 지금 너 앞에서 검술 연습하고 있잖아.”
“응.”
유디트는 체이스를 바라보았다. 체이스도 유디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이곳은 지하였지만 마법 덕택에 사방이 환했다.
하얀 조명들 아래, 체이스의 붉은 눈동자가 유독 빛나 보였다.
자신을 불러 놓고 한동안 말이 없는 그에게 유디트가 재차 물었다.
“그런데?”
“근데 왜 나 안 보고 딴생각해?”
유디트는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몰라 입만 뻐끔거렸다. 혹시나 해서 물어보았다.
“체이스, 관심이 필요한 거야?”
“아니, 그런 거 딱 질색인데.”
체이스는 정말 질색이라는 듯이 인상을 썼다. 그런데 왜 관심이 필요 없다면서 왜 관심을 달라는 듯이 말할까.
체이스도 그 모순을 깨달았는지 황급히 덧붙였다.
“내 말은, 사람이 앞에서 땀을 뻘뻘 흘리며 연습 중인데 넌 너무 태평하게 딴생각하고 있는 거 아니냐고.”
분명 체이스는 유디트에게 귀찮게 방해하지 말고 가만히 앉아 있으라고 말했었다. 유디트는 그 말을 잘 따르고 있는 중이었고.
그런데 딴생각까지 하지 말아야 한다니 조금 기가 찼다. 도대체 무슨 심보인지 모르겠다.
이상한 사람.
유디트는 체이스를 그렇게 평가하며 의자에 느릿하게 기대앉았다.
“알겠어. 너 보고 있을게.”
“그래, 잘 봐.”
관심은 딱 질색이라면서 체이스는 누가 봐도 관심이 필요해 보였다.
하긴, 어제 들었던 한나의 말에 따르면 체이스는 사람들의 관심 속에서 산 모양이었다.
분명 원치 않던 관심일지라도 평생 그렇게 살다가 한순간 관심을 받지 못하는 상황에 부닥쳐 버리면 어색하게 느껴질 수도 있었다.
물론 유디트는 그런 체이스가 전혀 이해되진 않았지만, 그냥 이해심 넓게 받아들여 주기로 했다.
체이스는 힐끗 유디트를 보더니, 자세를 바르게 했다.
뭔가 엄청난 기술을 보여 줄 심산인 걸까. 그런데 기대와는 다르게 체이스는 막상 검을 들고 가만히 서 있기만 했다.
저게 수련인 건가 생각하며 유디트가 눈을 한 번 깜박했다.
그때였다. 불현듯 공기가 날카롭게 갈라지는 소리가 나더니 눈앞의 지푸라기 인형이 한순간에 무너져 내렸다.
정확히 5등분으로.
어떻게 된 거지?
유디트는 어안이 벙벙해졌다.
“봤어?”
“응, 갑자기 저게 왜 저렇게 된 거야?”
“당연히 내가 베었으니까.”
눈 한 번 감았다 뜨는 사이에 저렇게 되다니. 체이스의 검술 실력이 몹시 뛰어나다는 것이 실감이 났다.
유디트는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신기하네…….”
칭찬을 들은 체이스의 입꼬리가 뿌듯한 듯 살짝 올라가 있는 것이 보였다.
유디트는 앞으로의 평온한 약혼 생활을 위해 약간의 칭찬을 더 가미해 보았다.
“대단하다, 너.”
분명 별거 아닌 칭찬이었다. 검술 천재 체이스는 이것보다 화려한 칭찬을 많이 들었겠지.
또한 칭찬을 내뱉는 유디트의 어조도 더할 나위 없이 담담했다.
그런데 갑자기.
챙.
체이스가 검을 놓쳤다.
검이 바닥에 부딪히며 나는 소리가 요란했다.
깜짝 놀란 유디트는 체이스를 응시했다. 그는 무표정이었지만 은발 사이로 보이는 귀가 빨갰다.
그가 입술을 짓씹었다. 아무래도 자신의 앞에서 검을 놓친 게 창피한 듯싶었다.
체이스는 황급히 변명을 내뱉었다.
“네가 안 보다가 갑자기 봐서 그래. 평소에는 이런 실수 절대 안 하거든.”
“그래?”
유디트는 우선 의자에서 일어나 체이스에게 다가갔다.
갑자기 유디트가 자신에게로 다가오자 체이스는 반사적으로 몸을 뒤로 물렸다. 하지만 유디트가 다가가는 게 먼저였다.
“아프겠다.”
유디트는 체이스의 오른손을 보며 중얼거렸다. 검을 놓치는 순간 체이스가 검날에 손바닥을 베인 것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그의 손을 잡아당겨 확인해 보았다. 예상대로 깊은 상처는 아니었지만 얇은 실선 같은 상처 사이로 핏기가 배어 나와 있었다.
“약은 어딨어?”
손을 만지작거리며 유디트가 고개를 들었다. 그런데 체이스가 유디트에게 잡힌 손을 휙 빼냈다. 거의 뿌리치듯이 거칠게.
슬쩍 체이스를 올려다보니 여전히 귀 끝이 새빨개진 채로, 유디트를 노려보고 있었다. 타오르는 태양처럼 이글거리는 험악한 눈빛이었다.
“이걸 핑계로 은근슬쩍 내 손 잡아 보려는 거 아냐?”
“아닌데.”
체이스는 피해망상이 과했다. 물론 무턱대고 손을 잡은 자신에게도 잘못은 있긴 했다.
체이스가 사람을 경계한다는 걸 알면서도 고려하지 못했으니까. 속으로 혀를 쯧 찼다.
유디트는 우선 벽 쪽의 선반을 살폈다. 부상을 대비한 약들이 분명 구비되어 있을 터였다.
잠시 후, 하얀색 연고를 가져온 유디트는 그것을 체이스에게 가만히 내밀었다.
원래도 발라 줄 생각은 없었지만 체이스를 안심시키기 위해 굳이 덧붙였다.
“너 혼자 발라.”
체이스는 연고를 받아 들었다. 그러면서도 유디트를 향해 미심쩍다는 눈빛을 거두지 않았다. 은근히 피곤한 성격이었다.
손바닥에 하얀 연고를 덕지덕지 바르고 있는 체이스를 향해 유디트는 입을 열었다.
“그런데 그 부탁은 언제쯤 알려 줄 생각이야?”
그 ‘부탁’이라는 게 설마 자신이 검술을 연습하는 모습을 지켜봐 달라는 것은 아니겠지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