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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 다정하지 마세요-8화 (8/110)

내게 다정하지 마세요 8화

그러자 말없이 연고를 바르던 체이스가 툭 내뱉었다.

“곧 알게 될걸.”

“응?”

“온다.”

다다다다다다-.

체이스의 나직한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마치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바닥이 울리기 시작했다.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오는 모양이었다. 얼핏 들어도 한두 명이 아니었다.

혹시 전쟁이라도 났나? 과장이 아니라 정말 그 수준이었다.

놀라서 눈을 크게 뜬 유디트와 달리, 체이스는 늘 있던 일인 것처럼 태연했다. 체이스는 손가락을 들어 느릿하게 문 쪽을 가리켰다.

“내 약혼녀 행세 좀 제대로 해 줘.”

손가락을 따라 문 쪽을 보자, 다닥다닥 붙어 있는 학생들이 보였다.

그들은 문 뒤에 반쯤 몸을 숨기고, 빼꼼히 고개를 들어 체이스를 보고 있었다.

난생처음 보는 이상한 광경이었다. 시선이 닿는 게 자신도 아니건만 유디트의 몸에 소름이 오소소 돋았다.

“아는 사람들이야?”

“아니.”

“그럼 왜……?”

체이스가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헝클었다.

“몰라, 자꾸 귀찮게…….”

털썩.

그때 문 쪽에 서 있던 학생 한 명이 심장을 부여잡고 주저앉은 게 보였다.

그러더니 그 학생은 곧 주변의 다른 학생들의 손에 붙들려 신속하게 어디론가 이동되었다.

하아, 체이스가 피곤한 듯 눈가를 찌푸리며 한숨을 쉬었다.

“봤지? 네가 좀 내쫓아 줘.”

유디트는 난감해졌다. 쉬운 부탁일 줄 알았는데 이런 거였다니.

힐끗 문 쪽을 쳐다보던 유디트는 강렬한 시선에 놀라서 몸을 움찔 떨었다. 그들을 애써 외면하며 체이스에게 조곤조곤 말했다.

“저 사람들을 내가 어떻게 해. 네가 하면 되는 거 아니야?”

“내가 말을 걸기라도 하면 소리를 지르면서 기절해. 그리고 말 걸어 줬다면서 다음날에도 또 온다고.”

체이스는 덥석 유디트의 손을 잡았다.

아까 유디트가 체이스의 손을 만졌을 때는 치를 떨더니 지금은 아무렇지도 않아 보였다.

아무래도 저가 유디트를 잡는 건 괜찮고 유디트가 저를 잡는 건 신경이 쓰이나 보다.

참 세상 편하게 사는 듯했다.

털썩.

그때 문 쪽에서 누군가 또 쓰러지는 소리가 났다. 아마 체이스가 제 손을 잡았기 때문인 것 같았다.

체이스는 이번에는 그쪽을 보지도 않았다. 그의 붉은 시선은 오롯이 유디트를 향했다.

“한마디만 해 줘. 약혼녀로서, 자신의 약혼자에게 눈독 들이는 게 상당히 불쾌하다고.”

“…….”

“도와준다고 했잖아.”

유디트의 입에서 쉽게 대답이 나오지 않았다. 잠시의 침묵 동안 체이스의 속은 새카맣게 타들어 가고 있었다.

설마 여기서 거절하려나?

체이스는 솔직히 자신이 봐도 무리한 부탁이었기에 유디트가 거절할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뭔가를 고심하던 유디트가 말했다.

“내가 네 부탁 들어주면, 너도 내 부탁 들어줄 거야?”

체이스는 잠시 동그랗게 눈을 떴다. 그녀의 제안이 의외였으므로. 하지만 곧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피식 웃었다.

“뻔하네. 네가 할 부탁.”

뭐 같이 데이트해 달라거나 그런 거겠지.

체이스가 느긋하게 팔짱을 끼고 유디트를 내려다보았다.

유디트의 황금색 눈동자에는 결연한 의지가 담겨 있었다. 아무래도 체이스가 들어줄 부탁이 몹시 기대되는 모양이었다.

자꾸 웃음이 나오려는 걸 삼키며 체이스는 거만하게 턱을 까딱였다.

“그래, 성공만 한다면야. 그런데 그렇게 쉬울까 모르겠네.”

그리하여 체이스는 한발 물러서 방관자처럼 상황을 지켜보기 시작했다.

유디트는 모여 있는 인파에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그리고는 정말 하기 말하기 싫다는 얼굴로 “제 약혼자가 혼자 검을 수련하고 싶어 하니 모두 방해하지 말아 주세요.”라고 말했다.

당연히 학생들은 눈치만 볼 뿐이지 쉽게 비키지 않았다. 하지만 유디트는 단 하나의 대사로 상황을 말끔하게 해결해 버렸다.

“방해하지 않으시는 분께는 카렐 교수님의 고급 회계학 예상 문제 노트를 드릴게요.”

유디트의 말이 끝나자 학생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프로이센 아카데미에는 학생들 사이에서 암암리에 불리는 ‘3대 교수’가 있다.

특히 그 3대 교수 중 한 명인 카렐 교수는 시험 문제를 악독한 난이도로 내는 것으로 유명했다.

언제나 학생들이 전혀 예상하지 못한 부분에서, 매번 새로운 방식의 문제를 내 주는 교수님.

그래서일까, 어쩌면 카렐 교수는 학생들이 쏟아부은 노력이 물거품이 되어 절망감에 빠지는 걸 즐기는 게 아닌가 하는 소문이 돌 정도였다.

특히 시험 기간만 되면 악당처럼 킬킬거리는 웃음소리가 복도 가득히 울려 퍼지며 소문에 대한 신빙성을 더해 주고 있었다.

그런 카렐 교수의 시험에서 유일한 만점자가 바로 유디트였다. 카렐 교수가 프로이센 아카데미에 부임한 이래 최초의 만점자.

이에 유디트가 카렐 교수에게 부정 청탁을 한 게 아니냐는 논란이 잠시 일었으나 곧 쉽게 사그라들었다.

고아에 평민인 유디트에게 그런 돈이 있을 리가 없으므로.

그러면 혹시 돈이 아닌 다른 것으로 카렐 교수를 포섭한 게 아니냐는 저질스러운 논란도 아주 잠깐 생겨났지만, 곧 누군가에 의해 쥐 죽은 듯이 사라졌다.

어쨌든 그런 유디트가 만든 고급 회계학 예상 문제.

그것은 돈을 주고도 못 사는 귀중한 것이었다.

회계학을 듣지 않는 학생들도 있었지만 그걸 손에 넣으면 다른 과목의 소스와 바꿀 수 있으니 상관없었다.

곧 유혹적인 제안이 통한 모양이었다.

망설임 없이 미끼를 받아 든 학생들은 우르르 몰려왔을 때처럼 우르르 사라졌다. 일련의 과정을 보던 체이스의 눈에 살짝 이채가 돌았다.

유디트에게 쫓아 달라고 부탁했긴 했다. 하지만 이렇게 빠르게, 그리고 정말 쫓아낼 수 있을지는 몰랐는데…….

속으로 감탄을 하는 체이스를 향해 유디트는 성큼성큼 다가왔다.

“내 부탁 들어준다고 했었지.”

유디트는 마치 기다렸다는 듯 요구해 왔다. 그런 그녀를 보며 체이스는 또 피식 웃을 수밖에 없었다.

그래, 이 정도 정성이라면 부탁을 들어주지 않을 수가 없지.

유디트는 이제 제 약혼자가 되었으니 어느 정도 장단을 맞춰 주는 것도 나쁘진 않을 것이다.

무엇보다 그녀의 재치 어린 대처에 약간의 호기심이 생기기도 했다.

그는 벽면에 비스듬히 기대 짝다리를 짚은 채 유디트를 응시했다.

저 붉은 입술에서 흘러나올 말은 역시나 뻔할 거라고 예상하며.

“단 걸 좋아하려고 노력해 봐.”

“뭐?”

그런데 생각지도 못한 말이 유디트의 입 밖에 나왔다.

너무 의외의 말에 체이스는 자신도 모르게 속으로만 하던 생각을 내뱉고 말았다.

“데이트하자는 게 아니었단 말이야?”

“갑자기 데이트가 왜 나와?”

유디트가 고개를 갸웃하며 되물었다.

아니, 그럼 단 걸 좋아하라는 말은 왜 나오는 건데?

체이스는 황당해하다가 이내 납득했다.

아아, 혹시 지난번처럼 디저트 카페에 같이 가 주길 원하는 건가.

체이스는 거만하게 팔짱을 꼈다. 자신의 어깨에 겨우 닿는 조막만 한 유디트를 빤히 내려다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런데 유디트는 그치지 않고 한마디 더 내뱉었다.

“그리고 가능하다면 앞으로 점심 식사도 같이했으면 좋겠어.”

“……점심도 나랑 같이 먹고 싶다는 거야?”

체이스가 끼고 있던 팔짱을 풀고 눈만 깜박거렸다. 그 반응을 뭐라고 생각한 건지 유디트는 황급히 덧붙였다.

“분명 너에게도 좋은 제안이라고 생각해. 나랑 같이 점심을 먹으면 오늘처럼 너를 귀찮게 하는 학생들을 내가 떼어 내 줄 수 있을 테니까.”

체이스는 요목조목 말하는 유디트를 응시하다 못 말리겠다는 듯이 어깨를 으쓱했다.

이것저것 핑계를 대곤 있었지만, 유디트가 바라는 바는 분명했다.

어쨌거나 자신과 함께 시간을 보내고 싶다는 것.

체이스는 픽 웃음을 흘렸다.

“은근슬쩍 부탁을 두 개나 하다니, 너 은근히 고단수구나?”

“…….”

유디트는 할 말이 없는지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내게 관심 없다는 듯한 태도는 내 방심을 유도하기 위해서였어?”

“그건 무슨 말이야?”

“발뺌하는 것까지.”

유디트는 체이스가 왜 이런 말을 하는지 모르겠단 얼굴로 눈을 끔벅이고 있었다.

커다란 황금색 눈동자와 끝이 살짝 내려간 눈매는 일순 순진해 보였다.

하지만 체이스는 방심해선 안 되겠다고 생각하며 유디트를 향해 읊조렸다.

“다시 말하지만 유디트. 나는 널 사랑할 생각이 없어.”

“…….”

“그러니까 너도 나를 사랑하지 않으려고 노력이라도 해 봐.”

입을 조금 멍하니 벌린 유디트는 체이스를 마치 ‘답 없다’라는 듯이 쳐다보았다.

체이스는 그 눈빛을 받으며 자신의 약혼녀는 눈빛 연기까지 잘한다고 생각했다.

* * *

사람들에게 이리저리 치이며 시달려 왔을 체이스가 불쌍하긴 했다.

하지만 불쌍한 것과 도와준다는 것은 다른 선상에 있었다. 한순간의 동정심으로 이런 일에까지 나설 만큼 유디트는 여유 있고 자비로운 사람이 아니었으니까.

사실 유디트는 자신의 안위만 챙기기에도 바빴다.

그렇기에 그녀는 체이스를 도와 학생들을 내쫓을 때의 부작용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무리 약혼자라고 하나 이런 일이 반복되면 많은 학생이 유디트에게 반감을 품게 될 것이다.

유디트가 아카데미에 처음 입학했었던 그때처럼, 몇몇 학생들은 유디트를 괴롭히며 못살게 굴지도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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