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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 다정하지 마세요-11화 (11/110)

내게 다정하지 마세요 11화

힐끗 르데샤를 살펴봤는데 다행히 기분 나빠 보이진 않았다. 다만 주황색 눈동자가 흔들리는 게 상당히 당황한 듯싶었다.

내쫓아야겠다.

유디트는 그렇게 마음먹었다.

“갑자기 여기는 왜 온 거야?”

“네가 여기 있길래.”

그 천연한 대꾸에 유디트는 잠시 말문이 막혔다. 눈만 깜박거리다가, 문득 든 생각에 혹시나 해서 물어보았다.

“……설마 내가 같이 점심 먹자고 했던 부탁 들어주려고 여기에 온 거야?”

정말 설마 싶었는데, 체이스는 가볍게 어깨를 한번 으쓱했다.

“귀찮긴 해도 어쩔 수 없지. 네가 그렇게 애원하는데.”

“애원까진 안 했어.”

말을 하면서도 유디트는 의외라는 얼굴을 했다. 체이스가 부탁을 들어줄 줄은 몰랐으니까.

갑자기 자길 사랑하지 말라며 뜬금없는 말만 늘어놓기에 당연히 거절인 줄 알았다. 그런데 부탁을 들어주려고 했었다니.

그때 체이스가 툭 내뱉었다.

“거짓말. 거절하면 울 것처럼 쳐다봐 놓고선.”

내가 언제? 라고 물으려다가 참았다. 의미 없는 실랑이만 길어질 것 같았으니까.

그러는 사이 체이스는 유디트 쪽으로 완전히 몸을 돌렸다.

식사할 때는 강아지도 방해하지 않는다는 말이 있는데, 체이스는 그녀를 강아지만도 못하게 취급했다.

방해가 될 정도로 아주 집요하게 유디트를 쳐다봤다는 얘기다.

뭐라고 하려는 찰나, 체이스는 테이블 위에 팔꿈치를 대고 턱을 괴더니 물었다.

“그런데 그동안은 왜 카페테리아에 안 왔던 거야? 굶었어?”

언뜻 들으면 걱정이었지만 체이스가 자신에게 그런 말을 할 리가 없었다. 그럼 뭘까 고민하다 유디트는 내뱉었다.

“혹시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 나를 계속 기다렸던 거야?”

“내가 너를 왜 기다려. 착각도 유분수지.”

“…….”

유디트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체이스에게 착각이 심하다는 말을 듣다니. 어불성설도 이런 어불성설이 없었다.

유디트는 딸기잼을 뜯어 나이프로 빵 위에 고르게 펴 발랐다.

“그럼 내가 안 온 건 어떻게 알았는데?”

체이스는 말이 없었다. 그냥 유디트를 빤히 바라보다가, 시선을 돌려 유디트의 접시 위를 향했다.

딸기잼이 올려진 빵과 김이 모락모락 나는 수프. 그리고 포도 주스를 샅샅이 살피던 체이스는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였다.

“간식 먹는 거야?”

“점심인데.”

체이스가 충격받은 얼굴을 했다.

“이런 빵조각이 점심이라고?”

“응.”

간단히 대꾸하곤 빵을 한 입 베어 물었다. 아주 맛있는 건 아니었지만, 맛이 없지도 않았다. 그냥 적당히 먹을 만했다.

입에 넣고 씹고 있는데 가만히 유디트가 먹는 걸 쳐다보던 체이스가 휙 접시 위 포도 주스를 가져가 버렸다. 당연히 유디트에겐 아무런 양해도 구하지 않았다.

빵을 한가득 베어 무는 바람에 목이 멨는데 마실 걸 가져가 버리다니.

주스도 없이 퍽퍽한 빵을 먹어야 하는 끔찍한 상황에 처해 버리고 말았다.

고문에 비견될 만큼 너무 잔인한 처사 아닌가?

제 약혼자의 인성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하는 찰나였다.

본인이 마시려고 가져간 거라는 생각과는 다르게, 체이스는 포장을 벗기고 빨대까지 손수 꼽아서 유디트의 식판 위에 다시 얌전히 올려 주었다.

마치 처음부터 이럴 심산이었다는 듯이.

왜 이러지?

유디트는 입 안의 빵을 꿀꺽 삼킨 뒤 말했다.

“체이스, 너 오늘 뭐 잘못 먹었어?”

“나는 너랑 다르게 고기에 샐러드까지 든든하게 먹었으니까 걱정하지 않아도 돼.”

걱정해 준 거 아니었는데. 역시 착각 왕이었다.

유디트는 포도 주스를 쭉 들이켰다. 체이스 때문에 체한 듯이 답답했던 가슴이 그제야 뻥 뚫렸다.

하지만 뿌듯하다는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체이스 때문에, 또 속이 꽉 막히고 말았다.

다시 빵을 오물거리며 생각해 보니, 곧 그럴듯한 이유가 떠올랐다.

아마 체이스는 자신과의 관계를 사방에 알려 다른 여자들의 접근을 차단하려는 게 아닐까.

그들이 비집고 들어올 틈조차 없어 보이도록 말이다.

지금도 깜짝 놀란 눈으로 체이스와 유디트를 번갈아 쳐다보며 수군거리는 학생들이 제법 많았다.

바로 앞의 르데샤 또한 놀란 토끼 눈을 하고 있다가 유디트와 눈이 마주치자 황급히 수프를 떠먹는 체를 했고 말이다.

그제야 르데샤도 그날 체이스를 구경하러 온 무리 중 하나였다는 게 떠올랐다.

혹시 그녀도 체이스를 흠모하고 있는 건 아닐까. 만약 그렇다면 눈앞의 상황을 보고 충격받진 않을지 걱정이 되었다.

그러는 사이 체이스는 냅킨까지 뽑아 와 유디트의 식판 옆에 살포시 올려 두고 있었다.

더 내버려 두었다간 체할 것만 같아 유디트는 기어코 체이스에게 따지고 말았다.

“갑자기 나한테 왜 이러는 거야?”

그러자 체이스가 무슨 생각을 한 건지 고개를 절레절레 젓더니 피식 웃었다.

그는 선명한 붉은 눈동자로 유디트를 응시하며, 검지로 테이블 위를 여유롭게 톡톡 두드렸다.

“왜? 내가 자꾸 잘해 주면, 나한테 반해 버릴까 봐 두려워?”

재수 없게 들릴 정도로 거만한 말이었다. 그에 유디트가 비꼬듯이 중얼거렸다.

“아주 틀린 말은 아니네.”

우당탕.

그 순간 건들거리던 체이스의 의자가 뒤로 넘어가더니 그대로 쓰러져 버렸다.

놀라서 먹던 것도 멈추고 체이스를 보자 은발 사이로 터질 듯이 빨개진 귀 끝이 보였다.

“너, 너. 내가 말했잖아. 분명 나 좋아하지 말라고. 그런데 왜…….”

소스라치게 놀란 듯한 체이스를 우선 진정시키기 위해 유디트가 말했다.

“진정해. 나 아직은 너 전혀 좋아하지 않으니까.”

“아, 아직은? 그렇다는 말은……?”

체이스는 귀신이라도 본 것처럼 하얗게 질려선 바닥에 넘어진 채 일어설 생각이 없어 보였다.

넘어진 체이스를 본 학생들의 웅성거림이 더 커졌고, 르데샤 또한 턱이 빠지기 직전까지 입을 벌리고 있었다.

뭔가 영혼이 빠진 듯한 모습에 유디트가 서둘러 체이스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팔을 잡아 일으켜 주려고 하는 찰나.

“왜 갑자기 만져!”

체이스가 무슨 날아오는 화살을 피하는 것처럼 재빠르게 그녀의 손길을 피했다.

유디트는 팔을 뻗는 동작 그대로 굳어 버렸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곧 어이가 없어졌다.

“나는 너 만지면 안 돼?”

붉게 달아오르는 체이스를 내려다보며 유디트는 이어 말했다.

“너는 내 어깨도 막 끌어안고 그랬었잖아. 그것도 첫 만남에서.”

“……그때는!”

금붕어처럼 입만 뻐끔거리는 체이스에게 다가가 팔을 잡았다.

“실례 좀 할게.”

유디트는 자신보다 체격이 큰 체이스를 간신히 일으켜 세웠다. 돌덩이처럼 굳어 버린 체이스를 끙끙거리며 겨우 끌고 와 자리에 앉혔다.

밥 먹다 말고 이게 무슨 고생을 하는 건지 모르겠다.

체이스는 자리에 앉고 나서 한참이 지나서야 퍼뜩 정신을 차렸다. 그리고 자신을 보고 있는 학생들을 향해 사납게 일갈했다.

“구경났어?”

구경 맞았다. 그것도 아주 대단한.

재밌는 구경을 보여 준 장본인인 체이스는 부릅뜬 눈으로 위협하듯 학생들을 바라보았고, 그런 체이스와 눈이 마주친 학생들은 몸을 움찔 떨며 시선을 돌렸다.

웅성거리던 공간에 한순간 적막함이 내려앉았다.

질식 같은 침묵.

겨우 말 한마디로 이 사단을 만든 체이스는 뻔뻔히 다리를 꼬고 앉아있었다.

유디트는 빨리 먹고 나가야겠다고 생각했다.

주변 공기마저 불편해졌기 때문이다. 안 보는 척하지만 은근한 시선들이 유디트를 향했기에.

유디트는 체할 각오까지 하고서 허겁지겁 빵을 입 안으로 넣었다.

그런데 그때, 뭔가 망설이는 듯하던 르데샤가 입을 열었다.

“둘은…… 정략 약혼이 아니야?”

“맞는데.”

입에 빵이 한가득한 유디트를 힐끔 본 체이스가 대신 대답해 주었다.

딱 거기서 멈추면 좋았을 텐데 체이스는 무심한 말투도 한마디 더 덧붙였다.

“근데 곧 아니게 될 수도 있어. 쟤가 나 좋아할지도 모르거든.”

체이스는 유디트를 빤히 바라보았다. 유디트가 무슨 반응을 보일지 구경하는 것처럼.

하지만 그가 원하는 반응을 보여 주기 싫었던 유디트는 빙긋 웃기만 했다.

“맞아. 그러니까 너 조심 좀 해.”

유디트는 체이스의 반응을 예상했다. 보나 마나 또 피식 웃으며 “내가 조심한다고 해서 네가 안 반할 수 있을 것 같냐.” 하며 건방을 떨겠지.

하지만 의외로 체이스는 그녀의 웃는 얼굴에 입만 벙긋거린 채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또 한바탕 난리를 치리라 예상했던 유디트는 조금 머쓱해졌다.

그때, 체이스가 자신의 어깨너머에 시선을 두었다. 누군가를 발견이라도 한 것처럼.

그가 눈썹을 구기며 입을 열었다.

“또 만나네?”

뭔가 못마땅해 보이는 얼굴. 순간 유디트는 목덜미가 서늘해지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설마, 설마 싶었는데.

“유디트?”

아셀이었다.

그는 체이스와 함께 있는 자신을 발견하더니 곧 두 사람을 번갈아 응시하기 시작했다.

한순간에 속이 더부룩해지며 뒤집히는 감각이 유디트를 휩쓸었다.

짝사랑을 잊는 법. 최대한 안 보기.

그 엉성한 계획은 금세 실패해 버렸다, 그것도 아주 처참하게.

* * *

사실 르데샤 로지에나가 유디트에게 접근한 건 다분히 의도적인 일이었다.

평소 그녀는 회계학에서 늘 2등으로 밀려나 있는 자신을 몹시 수치스럽게 생각하곤 했다.

물론 그녀의 성적도 객관적으로 봤을 때는 무척 우수했지만, 로지에나 가문의 기준에서는 턱도 없는 수준이었다.

이제 졸업이 코앞이었다. 이만 차석에서 벗어나 수석 자리를 한 번쯤은 거머쥐어 보고 싶었다.

굳게 다짐한 그녀는 곧 계획을 짜 실행에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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