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게 다정하지 마세요-12화 (12/110)

내게 다정하지 마세요 12화

말만 거창하지 실상 르데샤의 작전은 간단했다. 유디트의 친한 친구가 되어서, 그녀에게 온갖 정보를 빼내는 것.

정석적으로 공부해서 유디트를 제치고 수석을 차지한다는 계획은 옛날 옛적에 실패했으므로 이제는 야비한 술수를 써 봐야 할 때였다.

그래서 한동안 그녀를 졸졸 따라다닌 끝에 마침내 유디트의 <고급 회계학 예상 문제> 노트를 얻어 낼 수 있었다.

비록 카렐 교수에게 그 노트를 들키긴 했지만, 그 사실이 전혀 미안하진 않았다.

하지만 일부러 유디트 앞에선 죄책감을 느끼는 척 울먹거렸다. 그렇게 하면 그녀와 더 친해질 수 있을 거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계획대로 마음이 약한 유디트는 자신을 달래 주었고, 그렇게 그녀와 함께 카페테리아에 오는 것까지 성공했다.

같은 메뉴의 음식을 먹으며 이야기를 나눈다. 짧은 시간 내에 친해지기에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었다.

하지만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아마도 체이스 카르단디가 유디트의 옆자리에 앉았던 그 순간부터였던 것 같다.

즉, 르데샤의 계획은 초장부터 완전히 꼬였다고 할 수 있었다.

뭔가 기분이 좋지 않아 보이는 체이스 때문에 그렇지 않아도 눈칫밥을 먹고 있었는데, 아셀 페델리안이 등장한 후로부터는 완전히 살얼음판이었다.

르데샤는 이미 오래전부터 빵이 코로 들어가는지 입으로 들어가는지 모를 지경이었다.

유디트를 이용해 먹을 계획을 세워서, 그런 못된 마음을 품은 벌을 받게 된 걸까?

신이 있다면 당장 그 계획을 폐기 처분할 테니 이만 벌을 끝내 달라고 하고 싶었다.

“유디트, 이런 데서 다 만나네.”

아셀 페델리안이 평소처럼 나긋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그러나 언제나 반듯한 미소를 달고 있던 학생회장의 입가에는 웃음기라고는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온기가 식은 듯이 보이는 청회색 눈동자. 평소의 그 우아하던 사람이 맞나 싶을 정도로 사뭇 다른 모습이었다.

“요즘 얼굴 한 번 보기가 참 힘들던데, 체이스와 함께 점심을 들고 있었구나.”

그는 거만한 자세를 취하고 있는 체이스를 잠시 응시하다 다시 유디트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내 착각이 아니지? 네가 나 일부러 피하는 거.”

르데샤는 마주 앉은 유디트를 힐끔 바라보았지만, 그녀에게서는 아무런 대답도 들려오지 않았다.

결국 그녀 대신 입을 연 것은 체이스였다. 그가 아셀에게 빈정거리듯이 말했다.

“일부러 피한다는 걸 알면 그만 좀 가지?”

“체이스 카르단디, 자꾸 유디트 대변인인 것처럼 굴지 좀 마.”

작게 한숨을 내쉰 아셀이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거슬리니까.”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감지한 학생들이 하나둘씩 카페테리아를 빠져나가고 있었다.

르데샤도 그 무리에 끼어 밖으로 빠져나가고 싶은 마음은 굴뚝 같았지만, 무리였다.

현재 르데샤가 앉아 있는 자리는 바로 유디트의 앞자리였기 때문이다.

태풍의 눈 한가운데에 위치한 르데샤가 몸을 조금이라도 움직인다면 저 칼날 같은 시선들이 르데샤를 향할지도 모른다.

르데샤는 몸을 꼼짝도 하지 않고 죽은 것처럼 숨을 죽였다.

어느새 카페테리아 안은 텅 비어 단 네 사람밖에 남지 않았다.

유디트, 아셀 페델리안, 체이스 카르단디, 그리고…… 르데샤 로지에나.

자신이 이 공간에 왜 끼어 있는 건지, 그녀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할 수만 있다면 소리라도 지르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때 유디트의 눈길이 르데샤에게 닿았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난처하게 굳어 있는 르데샤를 본 유디트는 미안하다는 듯한 눈빛을 보냈다.

르데샤는 괜찮다는 말도 나오지 않아서 어색하게 고갯짓만 했다.

유디트의 눈동자가 데룩 굴러가더니 마침내 아셀을 향했다. 아셀은 유디트와 눈이 마주치자 처음으로 표정이 풀어졌다.

유디트가 어딘지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아셀, 나중에 얘기하자.”

“나중에 언제?”

잠시 말을 멈췄던 아셀이 이어 물었다.

“내가 언제까지 기다리면 돼?”

간절하게까지 느껴지는 그 물음에 유디트는 간단히 답했다.

“오늘 저녁.”

그제야 르데샤는 숨 막히는 긴장감에서 해방될 수 있었다.

* * *

아셀과 만나기로 해 버렸다. 나쁘지는 않다.

사실 유디트가 노력해 봤자 아카데미라는 한정된 공간 안에선 피하는 데에도 한계가 있었다.

겹치는 수업도 있었고, 복도를 지나치다 마주치기에 십상이었다.

혹여 아셀을 만날까 봐 맘졸이며 다니는 것보다는 이렇게 약속을 잡고 깔끔하게 만나는 편이 더 나을 것이다.

어차피 각오하고 있긴 했었다. 언젠가는 그녀가 이러는 이유에 대해 한 번쯤은 설명할 순간이 올지도 모른다고.

이번에야말로 유디트는 아셀에게 자신이 왜 그를 피했는지 솔직하게 털어놓을 생각이었다.

물론 짝사랑하고 있어서, 보기만 해도 가슴이 아파져서, 사랑하는 감정을 잊기 위해서라는 말은 할 생각이 없었다.

괜히 그런 말을 하면 아셀은 곤란해지고 죄책감만 느끼게 될 테니까.

유디트는 자신이 아셀을 좋아하는 감정이 아셀에게는 부담감으로 다가온다는 걸 알았다. 그건 예상이 아니라 진실이었다.

왜냐하면 실제로 유디트는 아셀에게 고백을 한 적이 있었으니까.

물론 자신이 아셀과 어울리지 않는다는 사실은 오래전부터 깊이 통감하고 있었다.

스스로의 처지에 대해 잘 파악하고 있었고, 페델리안 부인이 했던 말 또한 계속 머릿속을 맴돌았으니.

하지만 어쩔 도리가 없었다.

나날이 그에 대한 마음이 커져, 툭 치기라도 하면 금방이라도 와르르 쏟아질 것만 같은 상황이었으므로.

아셀에게 고백을 하면서도 그게 성공할 거라는 기대는 없었다. 유디트는 이미 결과를 알고 있었다.

차일 걸 알면서도 그 말을 한 이유는 단순했다.

아셀이 유디트의 고백을 깔끔하게 거절해 주면, 그러면 유디트도 마음을 고이 접을 수 있을 테니까.

‘아셀, 나 사실 널…… 좋아해.’

몇 년 동안 숨기고 있던 속마음을 입 밖으로 내는 것은 정말 힘든 일이었다. 고작 몇 글자 내뱉지도 않았는데 심장이 터질 것만 같았다.

유디트는 치맛자락을 꽉 잡았다 놓으며 아셀의 시선을 피했다.

아셀은 생각보다 아무 말이 없었다.

많이 당황했으려나?

어쩌면 그의 반응을 기다리고 있는 자신보다 아셀이 더 난처해하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다정한 아셀은 어떻게 해야 유디트에게 상처를 주지 않고 고백을 거절할 수 있을지 고민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유디트는 자신 때문에 아셀이 곤란을 겪는 것은 싫었다.

그래서 겨우 용기를 내서,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들었다.

하지만 막상 본 아셀의 반응은 유디트의 예상과는 달랐다.

어쩌면 식은땀을 뻘뻘 흘리며 난처해하고 있을 거라 생각했던 아셀은, 그런 기색이 하나도 없었다.

그 순간 눈이 마주쳤다. 아셀은 유디트를 직시하다 느릿하게 눈을 감았다 떴다. 그리고 입가에 아름다운 미소를 머금었다.

유디트를 향한 청회색 눈동자는 언제나처럼 온기를 품고 있었다.

혹시 자신의 말을 못 들었나? 너무나 태연한 반응에 유디트는 순간 그런 생각까지도 했다.

그때 나긋한 음성이 귓바퀴를 굴러떨어졌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감정을 착각할 수 있어, 유디트.’

상냥하게 말한 아셀이 손을 들어 눈물을 닦아 주었다.

길고 하얀 손가락이 유디트의 눈가와 뺨 위를 쓰다듬듯이 스치고 지나갔다. 손가락이 스치고 간 자리가 불에 덴 것처럼 화끈거렸다.

‘물론 우리가 너무 어릴 때부터 함께해 왔기 때문에, 서로가 아니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을 수도 있지. 하지만 그런 건 사랑이 아냐.’

아셀이 눈물을 닦아 주고 나서야 자신이 볼썽사납게 울고 있다는 사실을 자각했다.

그는 눈물을 흘리고 있는 유디트를 가만히 내려다보며 마지막으로 다정히 속삭였다.

‘우린 친구잖아. 그치?’

미안해. 나는 너를 좋아하지 않아.

차라리 그렇게 말해 줬더라면 좋았을 것을.

그러면 유디트도 가망 없는 마음을 접을 수 있었을 텐데. 이런 괴로운 사랑 따위 미련 없이 버릴 수 있었을 텐데.

하지만 아셀은 그러지 않았다.

평소와 똑같은 태도로, 눈빛으로, 온기로, 다정히 유디트에게 속삭였을 뿐이다.

‘그러니까 유디트, 너도 네 진심이 무엇인지 다시 잘 생각해 봐.’

아셀은 필사적으로 말했다. 유디트에게 주문을 걸듯이, 그렇게.

유디트의 고백은 애초에 진심으로 취급해 주지도 않았다.

잠시 다물린 채 미소만 머금고 있던 입이 또 열렸다. 또 무슨 말을 할까.

유디트는 자신의 심장에는 더 난도질 될 자리도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뭔가를 말하기 전, 아셀은 조금 고개를 기울이더니 가볍게 입술을 축였다.

매끄러운 입술이 불빛 아래에서 발갛게 젖은 모습이 보였다. 순간 정신이 아득히 고양되는 현기증이 느껴졌다.

‘네가 계속 좋은 친구로 머물러 준다면, 우리는 평생 함께할 수 있어.’

더 난도질 될 자리가 없다고 생각했는데, 착각이었구나.

아셀은 말 한마디로 유디트를 자신의 곁에 묶어 버렸다.

어쩌면 그는 알고 있었을까. 그 말을 들은 유디트는 영영 자신의 곁에서 벗어나지 못할 거란 걸.

완전히 거절당한 건 아니라는 것에서 오는 두루뭉술한 희망.

유디트의 짝사랑은 접히지도, 피지도 못한 어중간한 상태로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뺨을 타고 흐르는 뜨거운 눈물, 그걸 닦아 주는 고운 손길. 유디트는 눈을 감고 처음으로 생각했다.

아셀 페델리안은 다정하지만 잔인한 사람이라고.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