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게 다정하지 마세요 13화
* * *
아셀과는 저번에 만났던 그 디저트 카페에서 보기로 했다.
물론 아셀이 단것을 싫어한다는 걸 아는 유디트였기에 다른 곳에서 봐도 된다고 말했으나 아셀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거기서 보자.’
아셀이 덧붙였다.
‘내가 불쑥 찾아오는 바람에 너는 디저트 못 먹었었잖아.’
그 말을 들은 유디트는 문득 사랑에 빠진 아셀의 모습은 어떨지 궁금해졌다.
상상이 잘 되지 않았다. 상상하기 싫어서가 아니라 불가능했다. 유디트의 상상력 밖이었다.
사랑하지 않는 내게도 이리 다정한데 사랑하는 이에겐 얼마나 더…….
유디트는 더 거절하지 않고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딸랑-.
유디트는 약속 시각에 맞춰 카페 안으로 들어갔다.
예쁜 인테리어와 맛있는 디저트로 인기 있는 카페라 그런지 저녁 시간임에도 아직 사람이 많았다.
유디트는 이번에도 수많은 사람들 틈에서 아셀을 단번에 찾아내고 말았다.
그는 동그란 테이블 앞에 앉아 있었다.
크림색 셔츠와 검은 바지를 입은 깔끔한 차림이었는데, 그의 성격을 대변하듯 옷에는 작은 구겨짐조차 없었다.
사복이었지만 아카데미 교복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은 단정한 차림.
하지만 평소 목 끝까지 단추가 채워져 있던 것과는 다르게 두어 개가 풀려 평소보다 느슨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한동안 그런 아셀을 관찰하다 고개를 돌렸다. 유디트는 그만 깜짝 놀라고 말았다.
그 자리에는 아셀만 있는 게 아니었기 때문이다.
멀리서부터 확 눈에 띄는 은발에 설마 싶었는데 설마가 맞았다.
체이스 또한 자리에 앉아 있었다. 그것도 무척 삐딱한 자세로.
체이스가 왜 여기 있는 건지 알 수 없어서 유디트는 움직이던 다리를 잠시 멈췄다.
“유디트.”
아직 아셀 쪽으로는 가까이 다가가지도 않았는데, 어떻게 알았는지 아셀이 벌떡 일어나더니 유디트의 이름을 부르며 사르르 녹듯이 웃었다.
순간 주변에 조명이 드리운 것처럼, 유디트는 사방이 환해진 느낌이 들었다.
“안녕, 아셀.”
목구멍이 꽉 막힌 듯 조여 왔지만, 유디트는 겨우 내뱉었다.
오늘 아셀을 보는 건 두 번째지만 이제야 인사를 건넸다. 아셀은 눈을 조금 크게 뜨더니, “안녕, 유디트.” 하고 받아 주었다.
이럴 상황이 아닌데도 심장은 눈치가 없었다. 마치 멀미하듯 울렁거렸지만 애써 태연한 얼굴을 하며 걸어가 아셀과 대각선 자리 쪽에 앉았다.
즉, 아셀의 옆자리가 아닌 체이스의 옆자리에 앉았다는 얘기다.
아셀의 시선이 조금 떨렸고, 체이스는 기고만장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유디트는 체이스를 힐끗 보고 물었다.
“아셀, 네가 체이스를 부른 거야?”
“아니. 설마 그럴 리가.”
그럼 왜 얘가 여깄냐는 눈빛에 체이스는 입을 열었다.
“약혼녀를 외간 남자랑 단둘이 남겨 둘 수 없지.”
아셀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멍청한 유디트는 그런 아셀이 순진한 토끼처럼 귀엽다고 생각해 버렸다.
곧 그가 갸웃, 고개를 기울였다. 조명 아래에서도 새까만 머리카락이 하얀 이마 위에 부드럽게 흩어졌다.
“자신 없나 보네?”
“……아니거든!”
아셀이 별로 대단한 말을 한 것도 아니었는데, 체이스는 엄청난 도발을 들은 사람처럼 흥분했다. 붉은 눈동자가 열기를 품었다.
“어두컴컴한 밤중에 왜 내 약혼녀를 이런 음침한 곳으로 부르냔 말이야. 누가 봐도 수상하기 짝이 없으니까 따라올 수밖에 없었지.”
체이스는 엉터리 말을 내뱉었다. 하도 틀린 부분이 많아서 어디부터 지적해야 할지 모르겠다.
우선 지금 시간대는 밤이 아니었다. 게다가 여름이라 낮이 길었다. 해가 늦게까지 떠 있었기 때문에 하늘이 어둡지도 않았다.
그리고 여기는 음침한 곳도 아니었다. 파스텔 색조의 아기자기한 소품들로 꾸며져 있는 동화 같은 카페였다. 주변에 사람도 많았고.
터무니없는 체이스의 말에도 아셀은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구나. 결국엔 못 믿는다는 거네.”
“그래. 아셀 페델리안, 내가 너를 어떻게 믿어?”
이글거리는 시선이 허공에서 맞부딪혔다.
“음, 나는 꽤 신뢰성 있는 이미지라고 생각했는데.”
아셀은 오직 학생들의 투표로만 선출되는 회장직에서 압도적인 표를 받아 학생회장이 되었다.
물론 뛰어난 외모와 권세 높은 가문의 위력이 전혀 없다고 볼 순 없지만, 그래도 ‘아셀 페델리안’이라는 사람 자체에 신뢰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상대방을 편하게 해 주는 행동과 말투, 고민 상담이나 비밀을 털어놓아도 절대 발설하지 않을 것 같은 믿음직한 분위기.
하지만 체이스는 코웃음을 쳤다.
“신뢰는 무슨. 그 흉흉한 눈부터 치우고 말하지?”
흉흉한 눈?
아셀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수식어였다. 그래서 유디트는 체이스를 쳐다보던 시선을 돌려 아셀을 보았다.
눈이 마주치자 아셀의 입가에 걸려 있던 미소가 짙어졌다. 아무리 보아도 아셀은 여전히 순진한 토끼 같은 눈망울을 하고 있었다.
쾅!
갑자기 체이스가 테이블을 주먹으로 내리쳤다. 둥근 테이블이 한차례 진동했다.
“여우 같은.”
“체이스, 갑자기 왜 이래?”
체이스가 금방이라도 아셀에게 달려들 것처럼 성을 냈다.
아무래도 안 되겠다. 설마 저녁을 걸러서 난폭해진 건가?
배가 고프면 사람이 충동적이고 폭력적으로 변한다는 논문을 어디선가 읽은 적이 있었다.
물론 체이스는 그것과는 별개로 원래 인성이 좋지 않긴 했지만…….
유디트는 종업원을 불러 우선 메뉴판을 받아 들었다.
메뉴를 쭈욱 훑은 유디트는 아연해지고 말았다.
여름이라 시원한 디저트류들이 대부분이었는데 아이스크림, 셔벗, 파르페, 아이스 수플레 등 모두 단것투성이였기 때문이다.
물론 그게 당연한 거겠지만.
“온통 단것밖엔 없네…….”
유디트의 중얼거림에 체이스가 피식 웃었다.
“난 괜찮으니까 아무거나 너 먹고 싶은 거로 시켜.”
유디트는 힐끗 아셀을 쳐다보았다. 아셀이 눈을 접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 메뉴 결정권은 유디트에게 있나 보다.
유디트는 종업원을 불러 주문했다.
“딸기 아이스크림 세 개 주세요. 그중 한 개는 설탕 빼서요.”
괜히 메뉴를 다르게 했다가 불상사가 일어날 수 있으므로 간단하게 통일했다.
딸기 아이스크림에 추천이라고 적혀 있기도 했고 가장 무난할 것 같아서 그걸로 주문한 것이다.
그런데 주문이 끝나자 체이스가 턱을 괴고 유디트를 빤히 바라봤다. 그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하…… 유디트.”
딸기 아이스크림이 마음에 안 드나? 하지만 아무거나 시키라면서?
떨떠름한 얼굴의 유디트에게 체이스는 고개를 절레절레 젓더니 어깨를 으쓱했다.
“네 부탁 들어준다니까? 내가 단 걸 좋아해 보기로 했잖아.”
“응. 왜?”
“정말이지 넌…….”
어딘가 책망하는 어투였다. 하지만 말투와 달리 체이스는 입꼬리를 씰룩쌜룩하고 있었다. 마치 금방이라도 터져 나올 것 같은 웃음을 간신히 참는 사람처럼.
왜 저러지?
체이스가 이상 행동을 하는 건 한두 번이 아니었지만, 지금은 도통 이유를 모르겠다.
디저트는 빨리 나왔고, 유디트는 무설탕 딸기 아이스크림을 아셀 앞에 놓아 주었다. 그러자 웃음기를 간신히 억누르고 있던 체이스의 입매가 딱딱하게 경직되었다.
“뭐야?”
“뭐가?”
체이스가 못마땅한 티를 팍팍 내며 아셀 앞에 놓인 딸기 아이스크림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왜 저걸 쟤한테 주는 건데?”
“아셀은 단 걸 싫어해. 너도 안 좋아하는 건 알지만, 내 부탁대로 앞으로는 좋아해 본다면서?”
체이스의 붉은 눈동자가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사정없이 진동했다. 뭔가 충격받은 모양새기에 유디트는 조금 눈치를 보다 물었다.
“아니면 다시 주문할까?”
“……됐어.”
그때부터 체이스는 풀이 죽어 보였다. 어깨가 축 처졌다.
유디트는 자신이 뭔가 실수한 게 있나 생각해 봤지만 아무래도 없는 것 같았다.
유디트는 그냥 체이스를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애초에 체이스는 불청객에 지나지 않았으니까.
차가운 물방울이 매달려 있는 크리스털 잔을 손으로 매만지다가 고개를 들었다.
그런데 아셀 또한 어딘가 충격받은 듯한 얼굴이었다. 청회색 눈동자가 요동쳤다.
“유디트. 아까 체이스가 한 게 무슨 말이야?”
“응?”
“언제 체이스한테 단 걸 좋아해 보라고 했었어?”
유디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걸 본 아셀이 말없이 눈을 내리깔았다.
긴 속눈썹이 시원하게 트인 눈매를 살포시 감췄다. 검은 머리카락 아래 피부는 하얀 걸 넘어서 창백해 보였다.
“……나한텐 그런 부탁한 적 한 번도 없었잖아.”
마치 배신이라도 당한 것만 같이 새하얗게 질린 안색. 애처롭게 파르르 떨리는 기다란 속눈썹.
유디트는 아셀의 생경한 반응에 눈만 끔벅였다.
이러는 사이에도 죄 없는 아이스크림은 점점 녹아내리고 있었다.
유디트는 서둘러 녹아내린 겉면을 훑어 올리듯이 아이스크림을 한술 뜨며 말했다.
“내가 너한테 그런 이상한 부탁을 왜 하겠어?”
“하지만 체이스한테는 했다면서?”
아셀이 말끝을 살짝 흐렸다.
“나도 네 부탁이라면 그런 것 정도야 들어줄 수 있는데…….”
유디트는 말을 잃었다. 당황한 눈빛은 애써 고개를 숙여 감췄지만 어색한 몸짓은 감추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