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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 다정하지 마세요-14화 (14/110)

내게 다정하지 마세요 14화

아이스크림을 뜨는 스푼이 길을 잃은 듯 허공에서 잠시 헛돌았다.

누가 봐도 어쩔 줄 몰라 하는 것이 티가 났기에 잠시 스푼을 크리스털 잔 위에 꽂아 두었다.

어차피 그런 부탁을 할 필요도 없이 아셀은 단 음식을 잘 먹는 체하지 않았던가.

그렇기에 도리어 유디트가 억지로 입 안에 넣을 필요는 없다고 옆에서 말려야 할 지경이었다.

무책임한 다정함.

책임지지 못할 거면 수시로 다정하게 굴지나 말지.

속으로 아셀을 책망하는데, 체이스의 목소리가 공기 중을 훅 가르고 들어왔다.

“그걸 몰라서 물어? 뻔하지 뭐.”

체이스는 들고 있던 스푼으로 아이스크림을 푹, 크게 뜨더니 망설임 없이 입 안으로 집어넣었다.

아까까지 불만 가득한 얼굴이라 걱정스러웠는데, 예상보다 체이스는 아이스크림을 잘 먹었다.

그는 다시 멀쩡해진 모습으로 깔보는 듯이 입을 열었다.

“유디트는 앞으로 나랑 쭉 같이 디저트 카페에 다니고 싶은 거야. 그래서 나한테 단 걸 좋아해 보라는 부탁을 한 거였고, 나는 좀 귀찮긴 하지만 부탁이니 거절을 못 한 거고.”

유디트는 기가 막혀서 체이스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유디트와 눈이 마주친 체이스는 하얗고 고른 이를 드러내며 씨익 웃었다.

마치 나 잘했지? 하는 표정이었다.

유디트의 말을 저 좋을 대로 해석한 체이스였지만, 유디트는 딱히 부정하지 않았다.

그냥 앞에 놓여 있던 아이스크림만 떠먹을 뿐이었다. 차갑고 달콤한 그것은 혀에 닿자마자 솜사탕처럼 사르르 녹아 사라졌다.

조금 시간이 흐른 뒤 아셀이 자신을 바라보며 항변하듯이 말했다.

“유디트, 나는 하나도 귀찮지 않아. 오히려 좋은데.”

그렇게 말하며 아셀은 갑자기 자신의 스푼을 유디트에게 내밀었다.

유디트는 아셀이 왜 스푼을 내밀고 있는지 몰라 멀뚱히 쳐다봤다. 아셀은 그런 유디트에게 양해를 구하듯 말했다.

“나 한 입만 줄 수 있어?”

유디트와 아셀은 똑같은 딸기 아이스크림이었다. 맛도 똑같고 다른 점이라면 달기만 할 뿐이었다.

그래서 한 입만 달라는 아셀을 이해할 수 없어 유디트는 아셀을 쳐다보았다.

“왜? 굳이 억지로 먹을 필요는 없다니까?”

하지만 유디트와 눈이 마주친 아셀은 아이스크림보다 더 달콤하게 웃어 보였다.

“네가 맛있게 먹는 거 보니까 나도 먹고 싶어졌어.”

“…….”

유디트는 입 안의 혀를 짓씹었다. 다행히 얼굴은 붉히지 않았지만, 유디트의 스푼이 이번에도 또 허공에서 몇 번 헛돌았다.

체이스는 마치 집안의 원수를 보는 듯한 사나운 눈빛으로 아셀을 응시하더니 낮게 내뱉었다.

“질척거리기는. 먹고 싶으면 이거나 먹어. 그건 나 주고.”

체이스는 인상 하나 쓰지 않고 멀쩡한 얼굴로 아이스크림을 먹고 있긴 했지만 역시 억지로 단 걸 먹는 게 곤욕이긴 했나 보다.

자신의 것을 아셀 쪽으로 들이밀고 대신 아셀의 앞에 놓인 크리스털 잔을 슬쩍 가져오려고 하는데 아셀이 가로막았다.

“못 줘. 유디트가 내게 준 건데 너를 어떻게 줘.”

뜻밖의 반응에 유디트는 조금 놀랐다. 아셀은 원래 배려심 많고 양보를 잘하는 친구였으니까.

게다가 아셀은 식탐도 없었다. 맛있는 음식이 있어도 유디트에게 다 양보할 만큼.

곧 체이스가 단호한 표정의 아셀을 가만히 바라보다 나직히 말했다.

“돼지.”

자신을 폄하하는 말에도 아셀은 빙긋 웃어 보였다.

“여우보단 낫네.”

“하, 좀생이처럼 그걸 마음에 두고 있었어?”

아까 체이스가 아셀더러 여우 같다고 했을 때 아무런 반응이 없었기에 별로 마음에 담아 두지 않았다고 생각했었는데 아무래도 조금 언짢기는 했나 보다.

이글거리는 눈빛이 허공에서 또 부딪혔다.

아무래도 체이스와 아셀은 서로 상성이 맞지 않는 듯했다.

유디트는 아셀과 십 년이 넘게 알았지만, 그가 이렇게 경계하는 모습은 처음 보았다.

유디트가 본 아셀은 누구와도 잘 어울리고 쉽게 친해지곤 했으니까.

그래서 그 모습에 알게 모르게 질투도 많이 했었으니까 말이다.

“체이스, 아셀. 유치하게 서로 왜 그래?”

난처해하는 유디트를 본 둘은 이글거리는 눈빛을 거뒀다.

하지만 체이스는 여전히 못마땅하다는 듯이 팔짱을 꼈고, 아셀은 체이스 쪽으론 눈길 하나도 주지 않은 채 유디트만 바라보았다.

유디트는 뺨에 닿는 아셀의 선명한 시선에 조금 난감함을 느꼈다.

아무래도 이제 빨리 문제의 원인을 해결해 버려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애초에 그걸 위해 아셀과 만났던 거니까.

자꾸 주책없이 뛰려는 심장을 억누르며 유디트가 입술을 열었다.

“아셀, 아까 하려던 얘기나 마저 하자.”

아셀이 자신을 빤히 쳐다보는 게 느껴졌지만, 유디트는 시선을 내리깔고 빈 그릇만 만지작거렸다.

손바닥에 닿는 크리스털 그릇은 아직 한기를 머금고 있어 차가웠다. 유디트는 그 서늘함에 마치 체온을 뺏기는 것만 같다고 생각했다.

“내가 너를 일부러 피하냐고 물었었지? 맞아.”

“……왜?”

대답은 조금 늦게 나왔다. 왜냐고 묻는 아셀의 목소리는 끝이 조금 떨렸다.

대답이 바로 나오지 않는 것은 유디트도 마찬가지였다. 유디트는 잠시 입을 다물고 가만히 혀로 볼 안쪽을 훑어보았다.

입 안에 남은 아이스크림의 여운이 조금 쓰게 느껴졌다. 그럴 리 없는데도.

“너는 나를 소중한 친구로 여기지?”

아셀은 예상처럼 쉽게 대답했다. 확신을 가진 태도였다.

“응.”

욱신, 심장이 또 저렸다.

튀어나오려는 감정의 잔재들을 애써 갈무리한 유디트가 그제야 고개를 들었다. 아셀의 청회색 눈동자와 눈을 마주치며 또렷하게 말했다.

“그래서야. 졸업하면 우린 결국에 헤어져야 하잖아. 서로 사는 세계가 다르니까.”

아셀이 눈을 크게 뜨며 붉은 입술을 멍하니 벌렸다. 생각지도 못한 말을 들었다는 듯이.

아셀의 입매가 서서히 경직하는 것처럼 굳어 갔다. 그 모습을 보았지만, 유디트는 말을 멈추지 않았다.

“그래서 미리 선을 긋는 거야.”

“…….”

“지금 긋지 않으면 나중에 더 괴로워질 테니까.”

어차피 헤어지는 게 예정된 미래였으니, 지금부터 선을 그으면서 헤어짐을 대비하자는 말.

감기로 심하게 앓는 것을 피하고자 예방 접종을 하는 것처럼 이것도 덜 아프기 위한 방편 중 하나였다.

아플지라도 면역력을 미리 길러 놔야 한다. 그게 유디트가 생각해 낸 변명이었다.

이런 이유라면 아셀도 납득할 테고 거부하지 못할 테다.

추가적인 설명 없이도 아셀은 유디트의 뜻을 이해했다.

그런데도 상처받은 눈을 했다. 마치 유디트에게 심한 독설을 들은 것처럼.

“정말이야?”

유디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셀의 눈에 담긴 괴로움이 짙어졌다.

그러나 그보다 더 고통스러운 것은 아마 자신일 것이 분명했다.

오래전부터 일그러지고 찢긴 심장은 더는 성한 곳이 없었으니까.

수백 번 생각해도 아셀에게는 죄가 없다. 그렇다면 이 원망은 누굴 향해야 하는 걸까?

갈 곳 없는 원망은 돌고 돌아 자신에게로 향했다. 현실을 모르고, 순간이지만 달콤한 미래를 꿈꿨던 자신을.

이 마음이 좀 더 작았을 때, 그때 접었다면 훨씬 수월했을 텐데 유디트는 미루고 미루다 결국엔 이 지경까지 오고 말았다.

바닥까지 가라앉은 분위기를 깬 것은 체이스였다.

“그래, 유디트 말이 다 맞아.”

유디트와 아셀이 대화를 나누는 동안 그는 흥미 없다는 표정으로 의자에 눕듯이 등을 기대고 앉아 있었다.

언제 끝나나만 기다리고 있던 체이스는 대화가 대충 종결된 것 같자 허리를 바르게 세워 앉았다.

“그리고 이미 몇 번이나 말했었지만, 너 자꾸 유디트한테 질척거리지 좀 마. 너도 약혼자가 있다면서 왜 임자 있는 사람한테 자꾸 매달리는 거야.”

그 말을 들은 아셀이 되물었다.

“지금 질투하는 거야?”

“……뭐?”

그때 유디트의 금빛 시선이 체이스에게 닿았다. 체이스는 손사래까지 치며 황급히 수습했다.

“내가 질투를 한다고? 그럴 리가 없잖아. 질투할 사람은 오히려 유디트겠지.”

체이스는 왜 자꾸 헛소리를 늘어놓는 걸까?

타박하는 유디트의 시선이 느껴질 텐데도 체이스는 무시했다. 곧이어 아셀이 미간을 찌푸리며 느릿하게 물었다.

“질투를 한다고? 유디트가?”

그는 도통 처음 듣는 이야기라는 반응이었다.

“유디트는 질투 같은 거 없는데.”

아셀의 저런 반응은 당연했다.

저열한 감정이 치솟을 때마다 그 마음을 아셀에게서 숨기기 위해 얼마나 노력했던가.

유디트는 스스로가 생각하기에 질투가 많은 편은 아니었다. 하지만 하나도 없지는 않았다.

그러고 싶지 않아도 누구에게나 쉽게 호감을 사고 마음을 얻는 아셀을 보면 자꾸 못난 질투심이 불쑥 생겨나곤 했으니까.

한편 체이스는 그런 아셀의 반응을 즐기는지 손가락으로 테이블 위를 톡톡 두드리며 자랑하듯 말했다.

“대체 무슨 소리야? 그 얘기 못 들었어? 유디트가 날 위해 연무장에 쫓아오던 귀찮은 날파리들을 쫓아내 줬다는 거. 그것도 고생해서 만든 회계학 예상 문제까지 줘 가면서 말이야.”

체이스가 피식 웃었다.

“다 질투가 나서 그런 거겠지, 뭐.”

남들이 보기엔 근사한 미소겠지만 유디트의 눈에는 재수 없게만 보였다.

체이스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자꾸 혼자서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입꼬리를 씰룩거렸다.

어쩌면 체이스의 머릿속 유디트는 질투심을 못 이겨 사람들을 쫓아내고, 같이 디저트 카페를 가고 싶어서 단 걸 좋아해 보라는 부탁을 한 사랑에 빠진 소녀가 되어 있는 건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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