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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 다정하지 마세요-15화 (15/110)

내게 다정하지 마세요 15화

진짜 그런 착각을 하고 있나?

아무리 착각 왕이라지만 설마 그런 괴상한 착각을…….

유디트는 저도 모르게 핏기가 빠져나간 창백한 낯을 하며 체이스를 바라보았다.

그런데 그 시선을 느낀 체이스는 고개를 돌려 유디트와 시선을 맞추더니 또 피식거렸다.

못 말리겠다는 듯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턱을 괴고 유디트를 응시했다.

“지금도 햇병아리처럼 나만 빤히 바라보고 있네. 유디트, 걱정하지 마. 너 두고 다른 데 안 가니까.”

“체이스, 너 지금 뭔가를 착각…….”

“아니면 뭐. 손이라도 잡아 줘?”

유디트는 황당해서 말이 나오지 않았다.

아무래도 하루 정도는 날을 잡아서 체이스의 괴상망측한 착각을 정정해 줘야겠다.

물론 하루로 해결되는 문제면 정말 다행이겠지만…….

그러는 사이 뭔가 혼자서 곰곰이 생각하던 아셀은 차분하게 중얼거리며 시선을 내리깔았다.

“그게 그렇게 된 거였구나.”

긴 속눈썹이 어두운 그림자를 짙게 만들었다.

“다른 사람을 통해서 듣는 유디트의 소식은 마냥 기쁘지만은 않네.”

“그거참 안 됐네. 하지만 익숙해지려고 노력해 봐. 앞으로는 평생 내 입을 통해서 들어야 할 테니까.”

체이스는 한껏 빈정거렸다. 하지만 아셀은 체이스의 말을 원천 차단한 것처럼 그의 말을 듣고도 아무런 대꾸가 없었다.

그저 혼자만의 생각에 깊숙이 빠진 듯했다.

“너 왜 대답이 없어. 내 말 안 들려?”

이번에도 아셀은 대꾸를 해 주지 않았다.

기가 막힌다는 듯이 한숨을 내뱉는 체이스는 안중에도 없이, 그저 의미를 알 수 없는 눈빛으로 유디트를 주시해 왔다.

“유디트, 일단 오늘은 네 입장을 들은 것으로 만족할게. 하지만 이 문제는 나중에 다시 이야기할 필요가 있을 것 같아. 난 도무지 납득하기 어렵거든.”

그렇게 말하며 아셀이 작게 입 모양을 벙긋거렸다.

가능하면 저 녀석은 빼고 얘기하자.

하지만 유디트는 그런 그의 말에 아무런 대답도 할 수가 없었다.

물론 아셀의 마음도 이해가 갔다.

오랜 세월 쌓아 왔던 관계를 사는 세계가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하루아침에 선을 긋겠다니, 아마 납득하기 어렵겠지.

그러나 다시 만나 이야기한다고 해서 뭐가 달라진단 말인가?

끝까지 본인을 밀어내려는 유디트를 보며 아셀은 또 상처만 받게 될 게 뻔했다.

그렇기에 유디트는 오늘 여기서 단호하게 끝내기로 마음먹었다.

“난 더 할 얘기 없어.”

“난 있어.”

“아셀, 자꾸 곤란하게 하지 마.”

유디트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는 체이스를 향해 말했다.

“가자, 체이스.”

그러자 부름을 받은 체이스가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우쭐거리는 눈으로 아셀을 내려다보았다.

반면 아셀은 믿을 수 없다는 듯, 상처받은 눈으로 자신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유디트는 애써 일렁이는 마음을 가다듬기 위해 노력했다.

아셀은 자신의 외견이 가진 힘을 잘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자신에게 주어진 그 힘을 사용하는 걸 마다하지 않았다.

아마 지금도 애처롭고 처량하게 굴면 유디트의 마음이 약해질 거라고 생각하는 거겠지.

하지만 그것도 오늘로서 끊어 내야 했다.

“계산은 내가 할게. 그럼 안녕, 아셀.”

겉으로는 침착하게 말하려고 노력했지만, 속은 미어지는 것만 같았다.

하지만 이것도 언젠가는 다 거쳐야 할 과정이겠지.

그 어느 때보다도 아셀에게서 냉정하게 돌아섰지만, 유디트의 마음 한구석은 저리도록 아려 왔다.

* * *

기숙사 방으로 들어온 유디트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문을 열자마자 앞에 오도카니 서 있는 한나를 마주했기 때문이다.

설마 자신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던 걸까?

유디트는 방문을 잡은 채로 굳어져서 눈만 깜박였다.

그런데 한나가 입꼬리를 광대까지 올리며 환한 미소를 짓더니 유디트를 와락 끌어안았다.

“유디트! 소문 들었어. 축하해!”

얼떨결에 따뜻하고 포근한 품에 안긴 유디트는 생각했다. 아마 자신이 카렐 교수에게 수습 교수직을 제안받은 것을 알게 된 모양이라고.

“이게 무슨 경사니! 평민 중에 최초로 네가 프로이센 아카데미의 교수가 되는 거 아냐?!”

한나가 마치 자기 일처럼 기뻐해 주며 유디트의 두 손을 꼭 잡고 방방 뛰었다.

유디트는 그런 한나를 애써 진정시키며 침대 위에 앉혔다. 그들의 방은 2층이었기 때문에 너무 소란스럽게 굴면 1층에서 항의차 올라올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한나, 고마워. 하지만…….”

“뭘 망설여? 사랑도 없는 약혼보다야 이게 훨씬 더 좋은 기회잖아!”

한나가 유디트의 양어깨를 잡고 흥분하여 마구 흔들어 댔다. 유디트는 시야가 빙빙 돌았다.

“솔직히 너무 잘됐어. 뭐? 약혼은 하지만 너를 절대 사랑하지 않을 거다? 그게 무슨 할 말이니? 잘생기면 다야? 얼굴만 보면 모든 게 용서가 돼?”

유디트의 어깨를 마구잡이로 흔들던 손이 잠시 멈췄다.

“……대부분의 일은 용서가 되겠지만, 하여튼!”

머리끝까지 흥분한 한나를 유디트가 조심스럽게 불렀다.

“저기, 한나.”

“물론 걱정도 돼. 다른 교수님도 아니라 소문의 그 카렐 교수님이니까. 하, 생각해 보니까 체이스 카르단디만큼이나 카렐 교수님도 만만치는 않은 분이시구나.”

유디트가 뭔가를 말하려고 입을 여는데 자꾸 가로막혔다. 거기서 유디트는 기시감을 느꼈다.

일전의 카렐 교수님과의 대화에서도 이랬던 것 같은데…….

“어쨌든 선택지가 넓어졌다는 거니까 좋은 거네! 맞지?”

“응, 축하해 줘서 고마워.”

물론 좋은 제안인 건 확실했다. 아무나 프로이센 아카데미의 교수직을 맡을 수 있는 건 아니었으니까.

더군다나 평민이 교수가 될 가능성은 더더욱 희박한 편이었다.

하지만 졸업하자마자 아셀과 멀어지기를 바라는 공작 부인의 명 때문에라도 유디트는 그 제의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

물론 한나는 그런 사정을 모르고 있을 테니 웃을 수 있는 거겠지만 말이다.

그때 한나가 유디트 얼굴을 유심히 보더니, 혀를 차며 물었다.

“그런데 유디트. 너 무슨 일이라도 있어? 혹시 체이스, 그놈이 괴롭히거나 나쁜 말이라도 한 건 아니겠지?”

그 말에 유디트는 손을 들어 제 얼굴을 만져 보았다.

태연한 척하고는 있었는데 얼굴에서 티가 났나? 멀쩡한 척 웃고는 있다지만 아무래도 안색이 좋지 않았나 보다.

“아니야.”

하지만 유디트가 안색이 안 좋은 건 체이스 때문이 아니었다. 그냥 마음이 복잡했다.

오랜 친구이자 가족과도 같았던 아셀을 처음으로 단호하게 끊어 낸 날이었다.

더 이상 아는 척하지 말자고 완벽하게 선을 그어 버렸다.

기분이 정상일 리가 만무한 것이다.

유디트는 시간이 약이라는 말을 떠올렸다.

그 말처럼 지금의 감정도 시간이 흐르면 차츰 나아질까. 낙엽처럼 시간 앞에 바래질까.

그래서 언젠가 지금을 돌이켜 봤을 때, 아무것도 아닌 일에 속상해했다며 웃어넘길 수 있을까.

잠시 말을 멈췄던 유디트가 간신히 평소의 목소리를 내었다.

“한나, 몇 번 만나 봤는데 체이스는 나쁜 애 같지는 않아.”

그 말을 들은 한나가 어딘가 떨떠름한 얼굴을 했다. 유디트의 표정을 구석구석 살피더니 입을 열었다.

“……좋은 애도 절대 아니란 거 알지?”

유디트는 무심코 체이스를 떠올렸다.

자신을 빤히 바라보는 붉은 눈동자, 은발 사이 보였던 빨개진 귀, 허둥지둥 손사래를 치던 팔 같은 것들.

투덜거리는 말투지만 은근히 배려심 깊은 행동들이 떠올랐다.

유디트는 혼잣말하듯 중얼거렸다.

“오히려 좋은 애 쪽에 가까운 것 같아. 솔직히 평민이라며 날 무시하지 않았다는 것만으로도 꽤 착한 거잖아.“

자신이 왜 체이스를 옹호하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물론 조금 착각이 심하고, 가끔 잘난 체를 하긴 해도 유디트가 수용할 수 있는 범위 내였다.

그런데 그 말을 들은 한나가 연두색 눈을 크게 떴다. 어린 나뭇잎이 바람에 흔들리듯 그녀의 눈동자가 요동치기 시작했다.

“유디트, 너…….”

한나가 손으로 입을 가리더니 경악했다.

“이래서 저번에 짝사랑에 관해서 물어봤던 거였어?!”

“그게 갑자기 왜 나와?”

“이런 줄도 모르고…… 미안, 내가 그땐 너무 눈치가 없었지.”

어딘가 우물쭈물하던 한나가 유디트의 손을 꼬옥 붙잡고 외쳤다.

“유디트. 잊으려고 하지 마. 아직 포기하긴 일러! 콧대 높은 체이스라도 너라면 함락시키는 게 가능할 거야.”

“너 지금 무슨 말도 안 되는 착각을.”

“아니야, 나는 네 마음 다 이해해. 그래. 인성이 별거니? 얼굴이 별거지.”

한나는 한참 동안 얼굴과 인성은 반비례할 수 없다, 비례하는 경우가 굉장히 희귀한 거라며 세상의 모든 남자가 아셀 페델리안 같진 않다는 이상한 강연을 벌였다.

그러던 한나가 잠시 말을 멈췄다. 자신의 침대 쪽으로 터벅터벅 걸어가더니 위에 나뒹굴고 있던 붉은색 표지의 소설책을 꼭 쥐었다.

한나는 결연하게 말했다.

“내가 꼭 도와줄게.”

폭풍처럼 몰아쳤던 한나의 뜬금없는 말들에 눈만 끔벅이고 있던 유디트는 그제야 입을 열었다.

“뭔가 이상한 착각을 하고.”

“나 믿지, 유디트? 이래 봬도 간접 경험은 누구보다 많다고 자신할 수 있어.”

한나가 자신의 허리께에 손을 올리며 자신만만하게 외쳤다.

유디트는 섣불리 뭐라 말을 했지만, 한나는 유디트의 말을 들을 생각이 전혀 없어 보였다.

홀로 상상의 나래를 펼쳐 나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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