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게 다정하지 마세요 16화
“체이스가 아무리 철벽을 치더라도 네가 마음만 먹으면 가능할 거야.”
“……한나, 나는 체이스를.”
“쉿, 말하지 않아도 돼. 나는 네 마음 다 안다니까?”
한나가 인자한 미소를 띠었다. 그러더니 소설책을 팔랑팔랑 넘기기 시작했다. 공부라도 하듯이 펜까지 손에 쥐고 집중해서.
자신의 주변엔 왜 이렇게 착각에 빠진 사람이 많은 걸까.
유디트는 심각하게 고민했다.
* * *
고대 역사학 수업이 끝난 후, 아셀과는 필연적으로 마주칠 수밖에는 없었다.
아셀은 늘 그렇듯이 교복을 단정하게 차려입고 있었다. 유디트는 자신도 모르게 멀리서 걸어오고 있는 아셀을 살펴보았다.
검은색 바탕에 금색 테두리의 재킷은 아셀만을 위해 맞춤 제작된 것처럼 잘 어울렸다.
여름이라 실내에서 재킷을 입고 있기엔 더웠던지 아셀은 재킷을 천천히 벗어 팔에 걸쳤다.
손을 들어 조금 구겨진 셔츠 손목 부분을 매만지는 것까지, 일련의 행동들이 모두 예법 교과서에서 튀어나온 것처럼 근사했다.
멍하니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는데 문득 아셀과 시선이 마주쳤다.
자신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아셀이 곧 인사를 건네 왔다.
“안녕, 유디트.”
행동이 어찌나 태연한지 하마터면 자신도 마주 인사할 뻔했다. 유디트는 혀를 깨물며 가까스로 참아 냈다.
아셀은 그런 유디트를 향해 빙긋 웃어 보이곤 용건은 끝이라는 듯 뒤돌아 사라졌다.
유디트는 미련 없이 멀어져 가는 그 뒷모습을 가만히 쳐다보았다.
사실 아셀의 저런 반응은 이미 예상했다. 유디트는 예전에도 이런 비슷한 일을 겪은 적이 있었으니까.
아셀은 유디트의 고백 다음 날에도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먼저 인사를 걸었었다.
바로 오늘처럼.
‘안녕, 유디트.’
앞으로 어떻게 아셀의 얼굴을 봐야 하나, 설마 아셀이 바로 따지고 들러 오진 않을까 밤새 걱정했던 유디트의 고뇌를 한꺼번에 날려 버릴 만큼 천연한 얼굴이었다.
아셀은 사실 누구보다도 단호한 면이 있었다. 아무리 어려운 일이라도 마음먹고 한다면 하는 사람이었다.
그걸 유디트도 알았고, 그렇기에 미리 마음의 준비는 끝마쳤다.
그런데 왜 이렇게 가슴이 아린 걸까.
예상했다고 해서 아프지 않은 것은 아니라는 걸, 예상치 못한 고통보다 때로는 예상한 고통이 더 아플 때도 있다는 걸 유디트는 뒤늦게 깨달았다.
저 멀리서 아셀이 누군가와 함께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보였다.
입가에는 그린 듯한 미소를 짓고, 유디트가 아닌 다른 사람들을 향해 즐겁다는 듯이 웃고 있었다.
‘이 문제는 나중에 다시 이야기할 필요가 있을 것 같아. 난 도무지 납득하기 어렵거든.’
분명 그렇게 말했으면서.
역시 그 애처로운 말은, 처연했던 눈빛은 철저하게 계산된 일부였나보다.
유디트는 기계처럼 다리를 움직이며 생각했다. 아셀은 자신이 없어도 외로울 틈은 없겠다고.
유디트는 불과 며칠이 지나지 않았지만 벌써 아셀의 빈자리가 크게 느껴졌다.
하지만 아셀은…….
그렇게 오랜 시간을 알고 지냈는데도 여전히 아셀의 속은 알 듯 모를 듯했다.
유디트는 문득 어딜 가나 주변 사람들에게 인기와 관심을 끄는 체이스와 아셀이 각각 어떻게 다른지를 떠올렸다.
체이스는 사람들의 관심을 몹시 부담스러워하며 질색하는 사람이었다. 반면 아셀은 이를 적당히 받아들일 줄을 알았다.
둘의 대처 방법은 크게 달랐다.
체이스는 겉으로 무척 짜증을 내고 곤란해하는 듯 보여도, 그들에게 욕설을 늘어놓거나 강압적으로 끌어내려 하진 않았다.
싫다고 말하면서도 어찌 보면 그들의 존재를 은근히 용인해 주는 것 같달까.
하지만 아셀은 달랐다. 물론 그도 신고하거나 욕설을 늘어놓지는 않았지만, 적어도 체이스보다는 단호하게 선을 그을 줄 알았다.
예의 바르게 웃으며, 하지만 명확하게 자신의 의사를 표명하곤 했지.
그렇기 때문에 집요할 정도로 아셀을 따라다니는 열성적인 학생들은 없는 듯했다.
체이스도 아셀만큼만 요령이 좋다면 좋았을 텐데. 아니, 그 이전에 왜 아셀처럼 단호하게 선을 긋지 못하는 걸까.
어쩌면 체이스는 생각보다 정에 굶주린 게 아닐까?
사랑받기 싫다고 하지만, 막상 사랑받으면 어쩔 줄 모르는.
그러다가도 자신에게 쏟아지던 관심들이 사라질까 무서워 애초부터 자신을 사랑하지 말아 달라고 하는…… 그런.
“유디트!”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소리에 유디트가 고개를 들었다. 눈꼬리가 뾰족하게 올라간 단발머리의 소녀가 바로 옆에 와 있었다.
르데샤였다.
그녀는 유디트의 옆자리에 두꺼운 회계학 책을 올려 두며 조용히 속삭였다.
“저번에 미안해.”
“응? 왜?”
유디트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미안하다고 말할 사람은 오히려 자신이 아닌가?
느닷없이 나타난 체이스와 아셀 때문에 르데샤는 제대로 식사도 못 했을 텐데.
“그 왜, 그때 내가 제대로 인사도 못 하고 허겁지겁 사라졌었잖아. 그땐 너무 당황스러워서…….”
아, 아셀이 사라지자마자 바쁜 일이 있다며 급하게 자리를 떴었지.
하지만 미안하다고 사과할 만한 일은 아니었다. 얘초부터 그녀를 불편하게 만든 자신의 잘못이기도 했고.
르데샤는 여전히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듯한 유디트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이내 눈을 질끈 감고 고백했다.
“사실 너를 이용하려고 했어. 회계학 수석이 되기 위해서, 너한테 일부러 접근해서 친한 친구가 된 다음 요점 정리 노트 같은 걸 공유받으려고 했지.”
르데샤는 무슨 엄청난 범죄 사실을 고백한 사람처럼 어깨를 움칠 떨었다.
마치 이 얘기를 들으면 유디트가 크게 화가 날 거라고 생각하는 듯이.
하지만 르데샤의 말을 들은 유디트는 아무렇지도 않았다. 오히려 그게 무슨 문제가 있냐는 듯, 대수롭지 않은 반응을 보였다.
“그거라면 그냥 보여 줄게.”
“뭐?”
“굳이 내 친구가 되려는 노력할 필요 없다고, 자.”
유디트는 르데샤에게 노트 한 권을 내밀었다. 그녀가 평소 수업을 들으며 정리해 두었던 요점 정리 노트였다.
얼떨떨한 얼굴로 노트를 받아 든 르데샤는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이내 눈물이 그렁그렁 맺힌 상태로 외쳤다.
“……유디트!”
르데샤가 몹시 감동했다는 듯 유디트를 와락 끌어안았다. 어찌나 세게 끌어안았던지 유디트는 금방이라도 질식할 것만 같았다.
“너 정말 천사구나! 고마워, 진짜. 이 은혜는 꼭 잊지 않을게!”
그녀의 숨이 턱 끝까지 차올랐을 때 르데샤가 겨우 팔에 힘을 풀었다.
초롱초롱한 주황색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르데샤 때문에 유디트는 몹시 부담스러울 따름이었다.
“르데샤, 별로 그렇게 고마워할 필요는 없어.”
“무슨 소리야, 이게 얼마나 귀중한 건데! 네가 고생해서 정리한 노트를 선뜻 빌려주다니…… 유디트, 뭐 먹고 싶은 거 없어? 뭐든 말만 해!”
르데샤는 유디트가 원한다면 하늘의 별이라도 따 줄 기세였다.
여기서 괜찮다며 사양해 봐야 통하지 않을 것 같다. 유디트는 눈동자를 데구루루 굴리며 르데샤의 시선을 피하다 마지못해 말했다.
“그럼, 카페테리아에서 밥이라도 사 줄래?”
르데샤는 마치 유디트가 자신의 생명의 은인인 것처럼 굴었다. 하지만 유디트의 입장에서는 정말 별것 아닌 일이었다. 그래서 그에 어울리는 작은 답례를 받기로 했다.
그런데 르데샤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떻게 그렇게나 욕심이 없을 수가 있어? 고작 그걸로 돼?”
잠시 말이 없던 르데샤는 짓궂게 웃었다.
“아니면 내게 이런 노트를 보여 준다 해도 수석 자리를 차지할 수 있다는 자신감 때문이야? 너무 방심하지 않는 게 좋을걸?”
혹시 르데샤의 눈에는 자신이 자만하는 것처럼 보였을까?
그럴 의도는 전혀 없었던 유디트는 힐끔 르데샤의 눈치를 살폈다.
하지만 그녀의 기분은 전혀 상해 보이지 않았고 두 눈은 유디트를 향한 호의로 가득 차 있었다. 그래서 유디트도 조용히 미소를 지을 수 있었다.
잠시 노트 표지를 만지작거리던 르데샤가 물었다.
“내가 너랑 일부러 친해져서 너를 이용하려고 했는데 기분 나쁘지 않아?”
“난 괜찮아.”
“정말?”
“응.”
르데샤는 가늘게 눈을 뜨고 유디트를 보았다.
유디트가 짓고 있는 미소는 진실한 것 같았다. 자신을 이용하려 했다는 사실이 정말 괜찮은가 보다.
오히려 유디트는 이렇게 덧붙이기까지 했다.
“또 필요한 거 있으면 말해.”
“……너 정말 천사야?”
감격한 르데샤의 눈에 또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다. 유디트는 그냥 말없이 웃고 말았다.
그녀는 진심으로 르데샤에게 노트를 넘긴 일이 아무렇지 않았다.
애초에 유디트가 학업에 열중한 목적도 그저 아카데미 생활을 편하게 하기 위해서, 남들에게 호의를 얻어 내기 위해서였다.
심층적으로 학문을 탐구하고 싶다는 열정이나 모르는 문제를 풀며 느끼는 희열 같은 것은 애초에 유디트에겐 존재하지 않았다.
아버지를 따라 의학의 길을 걸었다면 또 모르겠지만, 불행히도 피를 잘 못 보는 성격 탓에 회계학은 그저 편의하에 선택한 전공에 불과했다.
그러나 그런 사실을 전혀 모르는 르데샤는 노트를 차근차근 넘기며 무슨 보물이라도 발견한 사람처럼 눈을 총명하게 빛냈다.
“와…… 이게 수석의 요점 정리 노트구나.”
노트 구석에 조그마하게 적어 놓은 암기법을 보고는 감탄사를 내뱉기도 하고, 입으로 중얼거리며 뭔가를 골똘히 고뇌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