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게 다정하지 마세요 17화
그녀의 주황색 두 눈에는 흥미와 열의가 가득 차 있었다.
유디트는 그런 르데샤를 보며 생각했다. 자신과 다르게 열정이 넘치는 아이라고.
르데샤는 귀족 영애였다. 굳이 취직을 위해 회계학을 공부할 필요가 없었다. 취업을 하지 않아도 풍족하고 여유로운 생활을 영위할 수 있을 테니까.
그러니 르데샤가 회계학을 공부하는 건 자신처럼 현실적인 이유가 아니라 어떤 목표를 성취하기 위해서겠지.
르데샤는 유디트를 멋지고 대단하다는 눈으로 보고 있었지만, 유디트는 오히려 그런 르데샤가 멋지고 대단하게 느껴졌다.
그때 갑자기 주변의 학생들이 수다 떨던 걸 멈췄고 사방이 고요해졌다.
“크흠.”
앞에서 들리는 헛기침 소리에 유디트가 정면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러자 뒷짐을 진 채로 자신을 물끄러미 내려다보고 있는 카렐 교수와 곧장 눈이 마주쳤다.
카렐 교수는 여느 때처럼 정돈되지 않고 덥수룩한 회색 머리를 한 채였다. 그는 혼탁한 잿빛 눈으로 유디트를 빤히 응시하고 있었다.
수습 교수 제안을 받은 이후 카렐 교수와 마주친 건 처음이었다.
회계학 시간이었기에 교수님과 마주치는 건 어쩔 수 없다 치지만, 삼자대면하자고 한 것도 어물쩍거리며 넘어간 상태라 조금 신경이 쓰였다.
설마 그거에 대해서 말씀하시려나?
유디트는 굳은 채로 입가에 어색한 미소를 띄웠다.
“아카데미 내에 소문이 돌더구나. 내가 네게 수습 교수 제안을 했다고.”
카렐 교수의 등장으로 쥐 죽은 듯이 조용하던 교실에 잠시 웅성거림이 돌았다.
그저 정확지도 않은 소문인 줄만 알았는데, 카렐 교수의 입에서까지 나오다니.
설마 그 소문이 진짜였던 걸까?
학생들이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유디트와 카렐 교수를 번갈아 살폈다. 유디트는 당황한 얼굴로 눈을 깜박이다 변명을 내뱉었다.
“교수님, 제가 그런 소문을 낸 것은 아니에요.”
“물론 안다. 그 소문은 내가 냈으니까.”
그 말에 당황한 유디트가 한 박자 늦게 반응했다.
“……네?”
어수룩한 유디트의 반응을 보고도 카렐 교수는 대수롭지 않은 듯 말했다.
“지나가는 교수들을 하나하나 붙잡고 너를 내 뒤를 이을 수습 교수로 점찍어 놨다고 표명했지. 얍삽한 다른 교수가 너를 낚아챌 수도 있으니까 말이다.”
방금 카렐 교수가 한 말은 분명한 애정이었다. 그래서 유디트는 황급히 눈동자를 굴려 주위를 살폈다.
교수가 한 학생만을 차별하듯이 대우한다면, 혹시 다른 학생들이 거기에 대해 불만을 품게 될지도 모르니까.
유디트는 시기나 질투 어린 눈빛이 쏟아지진 않을까 걱정했다.
하지만 막상 본 학생들의 시선은 생각과는 달랐다. 그들은 모두 유디트를 불쌍하고 안타깝다는 눈으로 보고 있었다.
저 멀리 앉아 있던 반장과 시선이 마주쳤다. 반장은 ‘어쩌다 카렐 교수님에게 걸려선…….’ 하는 얼굴로 그녀를 가엽다는 듯 보고 있었다.
이걸 다행이라고 여겨야 하나……?
복잡미묘해졌던 유디트는 카렐 교수를 향해 공손히 손을 모아 말했다.
“교수님. 과분한 제안을 해 주신 건 감사드리지만, 저는 수습 교수가 될 생각이…….”
카렐 교수는 중간에 말을 뚝 잘랐다.
“대체 왜지? 체이스 카르단디, 그 빌어먹을 놈팡이를 아름다운 회계학보다 더 사랑한다는 것이냐?”
얼토당토않은 말이었다. 회계학 어디가 아름답다고…….
아니지,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분명 카렐 교수님의 입에서, 자신이 회계학보다 체이스를 더 사랑한다는 말이 나왔다.
듣는 학생들이 많았다. 학생들은 언제나 물고 뜯을 수 있는 가십거리에 목말라 있었고, 그런 그들에게 진실 여부는 그리 중요한 게 아니었다.
유디트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카렐 교수님이 이런 말을 아무런 생각도 없이 입에 담았을 리가 없었다.
유디트를 곤란하게 만들고자 일부러 그런 말을 내뱉으신 것이 분명했다.
그걸 뒷받침하듯이 소곤거리는 학생들을 카렐 교수는 딱히 저지하지 않았다. 막는 이도 없자 학생들의 웅성거림은 점점 커져 유디트의 고막까지 닿았다.
카페테리아……. 디저트 카페……. 정략적인 약혼을 넘은 세기의 사랑…….
머리가 한순간에 어지러워졌다.
혼잡한 와중 카렐 교수만 차분했다. 굳게 닫힌 입술 사이에서 드디어 유디트가 외면하고 싶었던 대사가 나왔다.
“삼자대면하자고 한 것은?”
“그게, 시간이 잘 나지 않아서…….”
은근슬쩍 넘어가려는 시도는 카렐 교수의 집요함에 무너져 내렸다.
“유디트, 대체 언제까지 기다리게 할 셈이냐?”
아무래도 카렐 교수는 유디트가 일부러 그를 피하고 있다는 걸 알고 있던 모양이다.
상당히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한쪽 눈썹만 까딱이는 모습에, 더 미루기가 곤란해졌다.
유디트는 개미가 기어가는 것처럼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곧 날짜를 잡아서 알려 드릴게요.”
소란스러운 주변의 환경 때문에 들릴 듯 말 듯한 목소리였다. 하지만 카렐 교수는 그녀의 말을 알아들었는지 곧 주름졌던 미간에 힘을 풀었다.
그는 여전히 속닥거리고 있는 학생들을 그제야 제지했다.
“헛소문 퍼트릴 생각하지 말고 그럴 시간에 공식이나 하나 더 외워라. 아카데미에 이상한 소문이 돌면 손가락이 부러질 때까지 공식을 받아 적게 할 테니까.”
* * *
유디트는 난감한 상황에 미간을 찌푸렸다.
카렐 교수에게 알겠다고 대답하긴 했지만, 솔직히 체이스가 어떻게 반응할지 확신할 수 없었으니까.
물론 교수의 명령 운운하며 부탁을 해 볼 수는 있을 것이다.
그러나 체이스는 워낙 제멋대로인 성격으로 유명해서 교수의 부름이라 해도 순순히 응할지는 미지수였다.
유디트는 초조하게 손가락만 만지작거리며 연무장 문 앞에 서 있었다.
문은 조금 열려 있었기에 그 좁은 틈에 눈을 붙이고 안쪽을 살필 수 있었다. 다행히 체이스의 은발은 눈에 띄어서 금방 찾아냈다.
그런데 체이스는 뒤통수에 눈이라도 달린 걸까?
유디트의 시선이 닿기 무섭게 그가 곧바로 뒤돌아보았다. 그 바람에 그대로 둘의 시선이 마주치고 말았다.
멀리서 체이스가 놀란 듯 자신을 응시하는 게 보였다.
그는 눈을 가늘게 뜬 채 멍하니 자신을 바라보다가, 들고 있던 검을 검집에 도로 집어넣었다.
그리고는 마치 급한 볼일이라도 있는 사람처럼 후다닥 달려 나왔다.
마침내 유디트의 앞에 당도한 그가 머뭇거리다 입을 열었다.
“……뭐야, 너 나 보러 왔어?”
체이스가 다가오자 채 식지 않은 열기가 물씬 느껴졌다.
희미한 땀 냄새. 방금까지 검을 연마했다는 것이 온몸에서 티가 났다.
혹시 방해한 건가?
유디트는 땀에 젖은 매끄러운 목덜미를 보다가 시선을 돌려 체이스의 눈을 마주 봤다.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할지 몰라 망설이다가 겨우 입을 뗐다.
“체이스, 할 말이 있는데…….”
“……뭔데?”
“혹시 곤란하면 거절해도 돼.”
그러자 체이스의 동공이 지진이라도 난 듯이 흔들렸다. 그는 손으로 입가를 가린 채 한동안 아무 말이 없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곧 체이스는 손을 뻗어 약간 열려 있던 연무장 문을 거칠게 닫았다.
쾅!
폭탄이 터지는 듯한 굉음과 함께, 안에서 미세한 틈새로 유디트와 체이스를 지켜보고 있던 사람들의 시선들이 완벽히 차단되었다.
문을 굳이 저렇게 세게 닫을 필요가 있나?
그는 혹여 문을 열고 나오려는 사람들까지 차단하려는 듯 닫힌 문에 느릿하게 기대섰다. 그리고 여유로운 태도로 팔짱을 꼈다.
조명 아래 더욱더 붉게 빛나는 눈이 유디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네가 그걸 언제 말하나 싶었는데, 오늘일 줄이야. 그것도 연무장 앞에서.”
“……너 혹시 내가 무슨 말을 할지 알고 있는 거야?”
마치 유디트가 연무장까지 들른 이유를 안다는 듯한 태도에 유디트의 황금색 눈동자가 커졌다.
체이스는 한쪽 입꼬리만 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하지. 나는 눈치 없는 사람이 아니니까.”
“…….”
“낭만은 없지만 뭐, 나쁘다는 건 아니야. 한번 들어 보고 진지하게 고민은 해 볼게.”
아무리 눈치가 좋아도 지금 할 말까지 예상하는 게 가능한가?
유디트는 어쩌면 카렐 교수가 체이스에게 따로 언질을 준 게 아닐까 싶었다.
어쨌든 체이스가 상황에 대해서 알고 있다면 얘기는 더 편해진다. 다행이라고 느끼며 유디트가 입을 열었다.
“네가 안다고 하니 자세한 설명은 생략하고 본론만 말할게. 카렐 교수님과 만나는 자리에 함께 참석해 줄 수 있어?”
“뭐?”
느긋한 태도로 문가에 기대 있던 체이스가 잠시 중심을 잃고 휘청였다.
“갑자기 그 말이 왜 나와?”
“그러면?”
당황스럽다는 체이스의 태도에 유디트도 당황스러워졌다.
“내가 무슨 말 할지 알고 있다면서?”
“나는 당연히 네가 내게 고백을…….”
거기까지 말한 체이스가 혀를 짓씹었다. 얼굴에는 낭패라는 기색이 역력했다.
갑자기 고백이라니. 유디트는 두 눈만 끔벅거렸다.
“못 들은 걸로 해.”
이미 들었는데 어떻게 못 들은 거로…….
하지만 체이스는 손을 들어 신경질적으로 자신의 머리카락을 헝클어뜨렸다. 뭔가 불만이 가득한 태도였다. 그는 혼잣말하듯 작게 웅얼거렸다.
“왜 사람을 착각하게 만드냐고.”
복도에는 아무도 없이 고요했기 때문에 작은 중얼거림은 유디트의 귓가까지 닿았다.
멋대로 착각한 건 자기면서 기분 나쁜 티를 팍팍 내니 유디트는 퍽 당황스러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