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게 다정하지 마세요 18화
그리고 애초에 고백이 아니라면 다행인 일이 아닌가? 체이스는 자신을 사랑하지 말라고 입버릇처럼 말하곤 했으니까.
왜 실망한 티를 내는지 유디트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역시 체이스는 말로는 사랑을 원치 않는다면서 은근히 사람들의 애정을 갈구하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유디트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자세히 설명하긴 길어서 간략히 말하자면…… 카렐 교수님이 너와 함께 삼자대면하자고 하셨어.”
“나를? 왜?”
“네가 내 약혼자라서.”
머리를 헝클어뜨리던 손길이 멈췄다. 체이스가 어딘가 멍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못 들었어. 다시 말해 줘.”
“네가 내 약혼자라서.”
혹시나 하였는데 잠시 말이 없던 체이스가 또 물었다.
“너 방금 뭐라고…….”
“싫으면 할 수 없고.”
체이스가 들었으면서 굳이 못 들은 채 되묻는 이유는 뻔했다. 카렐 교수와의 만남이 귀찮아서겠지.
참석하고 싶지 않아 하는데 억지로 강요할 순 없었다.
유디트도 나름대로 노력했는데 체이스가 거절을 한 거였으니 카렐 교수에게 내세울 변명거리도 생겼고 말이다.
차라리 잘 된 건가?
용건도 끝났겠다, 홀가분한 마음으로 복도를 떠나려고 했는데 들릴 듯 말 듯한 목소리가 유디트를 붙잡았다.
“싫은 거 아니야. 크흠.”
잠시 헛기침하던 체이스가 명확하게 말했다.
“내가 네 약혼자니까 카렐 교수님께서 함께 보자고 한 거라고?”
“응. 물론 자세한 이유는 나도 잘 모르지만…….”
유디트가 말끝을 흐리는 그때, 체이스가 흔쾌히 대답했다.
“그래, 좋아.”
“정말?”
“언제, 어디로 가면 돼?”
이토록 쉽게 응해 주다니. 다른 교수님도 아니고 카렐 교수님과 만남이 달가울 리는 없을 텐데.
따로 대가를 요구하지도 않고 부탁을 들어주는 것이 의외였으나, 어쨌건 유디트에게는 다행인 일이었다.
* * *
카렐 교수와 만나는 자리는 수도에서 제일 유명한 고급스러운 레스토랑 안이었다.
처음 약속 장소를 알았을 때 유디트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카렐 교수는 별거 아니란 식으로 말했지만, 예약이 항상 꽉 차서 돈이 있어도 가기 어려운 곳이라고 들었기 때문이다.
깜짝 놀란 유디트에게 그는, 아카데미 교수쯤 되면 수도에서 제일가는 레스토랑 따위 예약하는 것은 일도 아니라며 회유하듯 말했다.
하지만 당연하게도 유디트는 넘어가지 않았다.
그녀는 보기만 해도 압도되는 거대한 문을 열고 조심스럽게 안에 발을 내디뎠다.
들어가자마자 고풍스러운 실내 장식과 분위기에 유디트는 약간 기가 죽고 말았다.
물론 페델리안가의 저택은 이보다 더 굉장했지만, 그곳에서는 따로 격식을 차릴 필요가 없어 편했다.
하지만 이곳은 격식과 품위를 갖춘 신사와 숙녀들로 가득했다. 여러모로 자신과 어울리지 않는 곳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유디트는 힐끔 자신의 파트너인 체이스를 살폈다. 그 역시 오늘따라 머리부터 발끝까지 맵시 있게 차려입은 상태였다.
하지만 격식 있는 복장과 다르게 짝다리를 짚은 태도는 여전했다.
그 태연한 얼굴을 보니 유디트도 조금 진정되었다.
한껏 빼입은 체이스만 못하긴 했지만 유디트도 오늘은 나름 꾸미고 온 상태였다.
혼처가 정해졌다는 소식에 페델리안 공작 부인이 기뻐하며 선물해 준 드레스, 그걸 오늘 이렇게 입게 될 줄이야…….
이렇게 좋은 걸 걸쳐 보는 것은 처음이라 무척 어색했다.
유디트는 애꿎은 드레스 자락만 만지작거렸다. 그때 체이스가 팔을 내밀며 짤막하게 내뱉었다.
“에스코트.”
“……고마워.”
유디트는 눈을 깜박이다 그의 팔 위에 손을 살포시 얹었다.
하지만 그래서는 안 됐던 걸까?
막 예약한 좌석으로 안내받으니 카렐 교수가 먼저 자리에 착석해 있는 게 보였다.
인사를 하려는 찰나, 그는 체이스팔 위에 얹힌 자신의 손을 보곤 눈썹을 꿈틀거렸다.
“가지가지 하는군.”
“네?”
깜짝 놀란 유디트가 손을 치웠다. 그러나 카렐 교수의 굳은 표정은 풀릴 기색이 보이지 않았다. 그는 대놓고 못마땅하다는 티를 내며 팔짱을 꼈다.
곧 카렐 교수가 체이스를 향해 적대적인 시선을 보냈다.
“자네가 유디트의 약혼자인가?”
“네, 저는 체이…….”
생각보다 체이스의 태도는 공손했기에 안심하고 있었는데, 카렐 교수가 체이스의 말을 뚝 끊더니 내뱉었다.
“이름은 당연히 알지. 약혼 취소하게.”
“네?”
“내 눈에 흙이 들어가도 안 돼.”
체이스는 황당하다는 표정을 했다. 그리고 그건 유디트도 마찬가지였다.
“교수님?”
카렐 교수가 유디트를 바라보았다. 체이스를 응시할 때와 달리 잿빛 눈엔 일말의 따스함이 섞였다.
“상황이 이해가 잘 안 돼서요. 체이스를 부르라고 하신 게 그러면…….”
“네 약혼을 취소시키기 위해서다. 아직 말로만 정했지, 정식으로 식을 올린 것도 아니니 상대방 동의만 있으면 취소는 쉬울 게 아니냐.”
카렐 교수가 나름대로 친절한 말투로 설명해 줬지만, 여전히 이해가 되지 않았다.
유디트를 신입생 때부터 눈여겨보고 있었다는 사실은 들어 알고 있긴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렇게까지 관여할 이유는 없지 않은가.
“아무리 유디트의 주전공 교수님이라고 하더라도 약혼을 막무가내로 취소시킬 수 있는 권한을 가지고 계신 건 아닙니다.”
체이스는 차분한 말투로 읊조렸지만, 눈은 활활 불타고 있었다.
유디트는 카렐 교수가 자신의 주전공 교수라는 걸 체이스가 알고 있다는 것에 조금 놀라고 말았다.
체이스는 진지하게 카렐 교수를 바라보고 있었고, 카렐 교수는 한쪽 눈썹을 삐딱하게 올렸다.
“막무가내?”
카렐 교수가 하, 하고 코웃음을 쳤다.
“체이스, 말은 똑바로 해야 하지 않겠나. 자네가 일단 졸업해야 약혼이든 뭐든 할 것 아닌가?”
그 말을 하며 카렐 교수는 품속에서 어떤 하얀 종이 다발을 꺼내 들었다.
뒷면 정중앙에 금색 매 문양이 그려진 그것은, 유디트도 익히 알고 있는 프로이센 아카데미 성적표였다.
체이스의 얼굴에 한순간 핏기가 사라졌다.
카렐 교수는 성적표를 이리저리 살피더니 혀를 쯧 찼다.
“허어, 예상은 했다지만 이렇게나 처참할 줄이야. 출석 일수 부족에 성적은 지렁이처럼 바닥을 기어 다니는군. 아니지, 바닥을 기는 걸 넘어서 곧 파고들겠어?”
카렐 교수가 매섭게 한마디씩 내뱉을 때마다 체이스는 어깨를 움츠렸다.
“이런 형편없는 점수는 프로이센 아카데미 교수 14년 재직 생활 중에 처음이다.”
대체 어느 정도길래?
유디트가 호기심 어린 눈으로 카렐 교수의 손에 들린 종이를 응시했다.
그 시선을 눈치챈 듯, 카렐 교수는 보란 듯이 체이스의 성적표를 건넸다.
하얀 종이를 건네받은 유디트의 황금색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이게 점수인가요?”
놀리려는 의도는 하나도 없었다. 하지만 유디트로서는 난생처음 보는 숫자들이었다.
그래서 정말 이게 성적표에 오류 없이 정상적으로 찍힌 점수인가 싶어서 물어본 거였다.
휙-.
눈을 한번 깜박이는 순간, 체이스가 날렵하게 성적표를 뺏어 갔다. 입술을 앙다문 채로 성적표를 쥔 손을 부들부들 떨고 있는 그는 정말 창피하고 분해 보였다.
유디트는 무례를 저질렀다는 생각에 미안해졌다.
“미안, 조금 신기해서.”
하지만 그 말에 체이스의 얼굴이 더욱 붉어졌다. 붉게 타오르는 안광을 한 채 카렐 교수에게 쏘아붙였다.
“아무리 교수님이라고 하더라도 제 성적표를 이렇게 멋대로 노출하는 건 사생활 침해 아닙니까?”
“흐음, 일반적으로는 그렇겠지. 하지만 유디트는 자네의 약혼녀 아닌가?”
카렐 교수가 건성으로 툭 내뱉은 말에 체이스는 한껏 당황하여 말까지 더듬었다.
“야, 약혼녀라고 하더라도 굳이 제 성적을 알 필요는…….”
카렐 교수는 그런 체이스는 가뿐히 무시하고 유디트를 바라보았다.
“낙제다.”
“네?”
“이대로라면 체이스 카르단디는 졸업 요건을 만족시키지 못해.”
유디트는 그만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아카데미를 졸업하기 위해선 두 가지 필수 조건을 만족해야 했다. 첫 번째가 수업 출석 일수였고, 두 번째가 시험 성적이었다.
출석 일수야 전체 수업 중 10% 정도만 채우면 되고, 시험 성적은 백지로 내지만 않으면 웬만해선 문제 될 게 없었다.
조건을 충족하기는 매우 쉬웠기 때문에 낙제를 받는 학생은 몹시 드문 편이었다. 그런데 체이스가 낙제 위기라니.
카렐 교수가 이어 말했다.
“아까도 말했듯이 시험 점수만이 문제가 아니다. 저놈은 출석 일수도 부족해. 물론 지금부터 빠짐없이 참석한다면 문제는 되지 않겠지만…….”
이에 유디트는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출석을 얼마나 안 했으면…….”
넋이 나간 유디트를 보던 카렐 교수는, 손가락으로 체이스를 가리켰다.
“재밌는 사실을 하나 알려 주마. 사실 저 녀석의 부전공은 회계다.”
“회계요? 하지만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는데…….”
“당연하지. 수업을 맨날 땡땡이쳤으니까.”
상황은 심각했다. 주전공 다음으로 수업 일수가 많은 게 부전공이었는데 유디트가 본 적이 없을 정도라니.
떨떠름한 표정을 알아챘는지 체이스가 변명을 내뱉었다.
“나도 이럴 줄은 몰랐어. 그간 출석과 시험 점수는 무투 대회 우승 가산점으로 대신해 왔으니까, 이번에도 가능할 줄 알았는데.”
4학년까지 낙제를 받지 않은 게 신기하다 싶었는데 체이스는 가산점 제도를 활용하여 겨우겨우 낙제를 면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하지만 이번 년에는 내부 공사로 인해 대회가 취소되어 체이스는 가산점을 획득할 수 없게 되어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