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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 다정하지 마세요-19화 (19/110)

내게 다정하지 마세요 19화

“그러면 정말 졸업하지 못하게 될 수도 있다는 거네?”

부루퉁한 얼굴을 한 체이스가 할 말 없다는 듯이 고개를 숙였다. 유디트는 잔뜩 기가 죽은 체이스를 우두커니 보다 중얼거렸다.

“다른 약혼자를 찾아봐야 하나…….”

“뭐?”

체이스가 고개를 벌떡 들었다.

“그게 무슨 말이야? 다른 약혼자라니?”

“그래, 유디트. 그게 무슨 말이냐.”

카렐 교수가 은근슬쩍 끼어들며 말했다.

“다른 약혼자를 찾기보다 그전에 수습 교수 제안을 받아들이는 게 옳은 수순이 아닐까 싶은데.”

“아직 안 깨졌습니다.”

체이스가 으득, 이를 악물었다. 턱뼈가 부러지는 듯한 엄청난 소리였기에 유디트는 체이스의 어금니가 과연 무사한가에 대해서 생각했다.

곧 체이스가 어쩐지 상처받은 듯한 눈빛으로 유디트를 힐끔거렸다.

마치 툭 치면 와르르 무너질 것만 같은 얼굴이었다.

머리가 아파진 유디트는 그만 그에게서 시선을 돌려 버렸다.

그러자 자신을 빤히 응시하고 있는 카렐 교수와 눈이 마주쳤다.

“아무튼 교수님, 제안은 거듭 감사드리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저는 그 자리에 어울리지 않는 것 같습니다.”

“어째서지? 지금 내 안목을 무시하는 게냐?”

카렐 교수는 겁이라도 주려는 모양인지 매섭게 말했다. 유디트는 어깨를 움찔 떨었다.

그래도 할 말은 해야 했기에 조심스럽게 입술을 열었다.

“그건 아니지만…… 저보다 더 회계학 수습 교수 자리에 어울리는 친구가 있어요.”

유디트는 르데샤를 떠올렸다. 주황색 두 눈에 열의가 가득 담겨 있었던 그녀를.

열정도 없는 자신보다야 그런 인물이 수습 교수 자리에 앉는 것이 더 나을 게 분명했다.

“같이 회계학을 듣는 친구 중에 르데…….”

“그만.”

그러나 르데샤를 추천하려는 시도는 곧장 막히고 말았다.

“너 말고 다른 이를 추천하려는 거라면 그만둬라.”

유디트가 당황하여 머뭇거리는 사이, 카렐 교수는 혀를 쯧 찼다.

“방금 들었다시피 네 약혼자는 낙제 직전이야. 이대로 낙제한다면 결혼하기엔 어려움이 클 테고, 너도 멍청이를 남편감으로 받아들이긴 싫을 테지.”

“멍청이…….”

체이스가 신랄한 말에 충격받은 듯 혼자 중얼거렸다. 카렐 교수는 그런 체이스를 신경도 쓰지 않은 채 읊조렸다.

“지금 체이스의 발목을 가장 크게 잡는 건 회계학 시험 성적과 출석 일수다.”

교수님께서는 이런 말을 자신에게 왜 하는 걸까. 유디트는 순간 불길한 상상에 사로잡혔다.

그것은 곧 현실이 되었다.

“그러니 네가 체이스를 무사히 졸업까지 시켜 봐라.”

“……네?”

“회계학 보충반을 개설해 줄 테니, 한번 운영해 봐.”

유디트는 둔기로 머리를 얻어맞은 듯 멍해졌다. 하지만 카렐 교수는 멈추지 않고 청천벽력 같은 말을 덧붙였다.

“겸사겸사 체이스 말고 보충반이 필요한 다른 녀석들까지 포함해서 말이다.”

“제가요?”

유디트는 카렐 교수와 왜 자신에게 이런 제안을 하는지 도무지 의도를 파악할 수 없었다.

대체 자신의 뭘 믿고?

하지만 카렐 교수는 단호히 말했다.

“수습 교수가 하기 싫다면서? 그건 그만큼 약혼하고 싶어서가 아니냐? 수습 교수 간접 경험이라고 생각해도 좋아. 의외로 적성에 맞을지도 모르는 거니까.”

“…….”

“물론 공짜로 부리겠다는 심보는 아니다. 정당한 보수는 아카데미 측에서 지급할 테니.”

유디트는 갑작스러운 제안에 눈을 끔벅이며 고뇌에 빠졌다.

머릿속에 수업 준비를 하느라 눈 밑에 다크서클이 진하게 드리워진 모습이 떠올랐다. 눈앞이 아찔해졌다. 상상만 해도 고생길이 훤했다.

아무리 교수님의 부탁이라지만 불합리한 일을 이대로 받아들일 수는 없었다. 유디트는 돈보다는 안락한 아카데미 생활을 중요시했기 때문에.

역시 체이스 말고 다른 약혼자를 찾아봐야 하나?

하지만 이제 와 다른 약혼자를 택하기엔 아셀의 반응이 걸렸다.

아마 자신이 진정성 없는 약혼을 했다는 것을 눈치채게 될 테지.

그렇게 해서 페델리안 부인과의 일이 들통난다면 그것만큼 큰 문제가 없었다.

그리고…… 일렁거리는 붉은 눈으로 자신이 내릴 결정만 기다리고 있는 체이스가 어쩐지 안타까웠다.

체이스의 집요한 시선을 느끼며, 유디트는 속으로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눈을 한 번 느리게 감았다 뜬 그녀가 결국 입술을 뗐다.

“교수님, 한번 해 볼게요.”

“잘 생각했다.”

그녀의 대답에 체이스가 작게 안도의 한숨을 내뱉는 것이 느껴졌다.

그는 테이블 위 물컵을 들고 물을 마시는 시늉을 했다. 하지만 정작 물컵에 담긴 물은 전혀 줄어들지 않았다.

잠시 후 물컵을 내려놓은 체이스는 말했다.

“……날 너무 좋아하는 거 아니야?”

“글쎄.”

유디트는 긍정도 부정도 아닌 애매한 대답을 내뱉었다.

“좋아하는 것까진 아니지만, 네가 약혼자로서 나쁘진 않다고 생각하고 있어. 그러니까 무사히 졸업할 수 있도록 도와는 줄게.”

“……유디트, 너.”

입술을 달싹거리던 체이스가 작게 내뱉었다.

“생각보다 좋은 사람이구나.”

유디트는 눈을 끔벅거리며 체이스를 바라보았다.

눈이 마주친 체이스는 화들짝 놀라 시선을 피했다. 또 애꿎은 물컵을 들곤 물을 마시는 척했다.

이번에야말로 확실히 알 것 같았다. 저건 부끄러워하는 거다.

여러모로 책임이 막중해지긴 했지만, 이번 일로 그가 자신에게 마음의 문을 조금이나마 열게 되었다면 나름 나쁘지 않은 결과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셀 때문에라도 그와 친근한 사이를 유지할수록 도움이 되었으니.

“물론 아무리 내가 열심히 도와줘 봤자 정작 네가 아무 노력도 안 하면 물거품이 되겠지만.”

체이스는 빨개진 얼굴로 잽싸게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열심히 노력해 볼게.”

* * *

귀찮은 일이 늘어 버렸지만 어쩔 수 없지.

보충반을 맡는다는 게 너무 귀찮아 잠깐 체이스를 포기할까도 생각해 보았지만, 그는 여러모로 놓치기 아까운 약혼자였다.

우선 자신에게 애정을 강요하지 않는 점도 좋았고…… 아셀의 접근을 막는 데에 그만큼 효율적인 체스 말도 없을 테니까.

결론적으로 여러 가지 요소를 종합해 봤을 때, 자신의 판단은 틀리지 않았다.

그렇게 유디트는 자신의 마음을 애써 납득시켰다.

대화가 오가는 동안 보기만 해도 군침이 도는 음식들이 차례로 나왔다.

체이스는 고개를 푹 숙인 채 기계처럼 스테이크를 썰어 먹고 있었고, 유디트도 포크로 샐러드를 콕 찍어 먹었다. 상큼한 드레싱이 입 안을 적셨다.

식사하는 그들 사이로 잔잔한 노래가 울려 퍼지는 가운데, 카렐 교수가 선율을 가르며 조용히 입을 열었다.

“그나저나 유디트. 지금 내 제안이 네겐 막무가내로 느껴져 곤란할 테지.”

알긴 아시는구나. 시종일관 너무 뻔뻔한 표정에 모르시는 줄 알았는데.

유디트는 어색한 미소를 입가에 걸쳤다.

카렐 교수는 잿빛 눈으로 그런 유디트를 빤히 바라보다가, 시선을 돌려 창밖을 보곤 중얼거리듯 말했다.

“그래도 내 욕심에 어울려 주어 고맙구나.”

* * *

대체 어쩌다 이렇게 된 걸까.

평소와 같이 회계학 수업에 참석한 유디트는 제 옆자리의 사람들을 번갈아 응시했다.

좌측엔 체이스가, 우측엔 르데샤가 앉은 상황.

홀로 수업을 듣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이런 갑작스러운 변화가 유디트는 어색하고 당황스럽기만 했다.

유디트는 자신의 옆에 앉은 이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처음으로 이 수업에 얼굴을 비춘 체이스. 그는 턱을 괴고 유디트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먼저 말을 꺼낸 것은 유디트였다.

“체이스, 너 회계학 수업 들으러 온 거 맞지?”

“당연하지.”

체이스는 가슴을 쭉 펴고 대답했다. 그 당당한 태도에 유디트는 휑한 그의 책상을 가리키며 물었다.

“책도 필기구도 없이?”

“…….”

미처 그것까진 생각하지 못했다는 표정. 체이스는 혀를 짓씹었다.

그때 소곤거림이 더욱 커졌다. 체이스가 교실 문을 열었을 때부터 학생들은 귓속말하면서 지켜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사실 신기할 만했다. 4년간 코빼기도 비추지 않던 사람이 어느 날 불쑥 나타나 교실에 앉아 있었으니까.

잠시 입술만 달싹거리던 체이스는 갑자기 벌떡 일어나 사납게 외쳤다.

“구경났어?”

모여서 웅성거리던 학생들이 뿔뿔이 흩어졌다.

폭주하는 체이스의 행동에 유디트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조심스럽게 그의 소매 끝자락을 잡아당겼다.

“수업을 듣는데 빈손으로 오는 사람이 신기한가 보지. 우선 다시 앉아.”

다행히도 체이스는 얌전히 자리에 앉았다. 그는 며칠 전 카렐 교수와의 만남 이후로 조금은 태도가 유순해진 듯했다.

한편 유디트의 옆에서 종알거리며 수다를 떨던 르데샤는 체이스가 등장한 이후부터 시선을 책에 고정한 채 열심히 공부하고 있었다.

역시 체이스가 불편한 걸까?

하지만 미리 양해를 구할 틈도 없이 체이스가 멋대로 들이닥친 터라 어쩔 수가 없었다.

체이스에게 자리를 옮겨 달라고 부탁해야 하나 고민하는 와중 귓가에 나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때, 나도 노력해 보겠다고 했지.”

“……그래서 온 거였어?”

“당연하지. 네가 도와주겠다고 했으니까.”

그렇게까지 말하는 그에게 차마 저리 가라고 할 수가 없어 유디트는 작게 한숨을 쉬었다.

그녀는 가방에서 여분의 펜과 노트를 꺼낸 후 체이스의 손에 들려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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