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게 다정하지 마세요 20화
“책은 나랑 같이 보면 되고, 노트랑 펜은 이거 빌려줄게. 그래도 나름대로 노력해 보겠다는 말을 지키려고 여기까지 왔으니까 빌려주는 거야.”
사실 무난한 노트를 주려고 했는데 정중앙에 떡하니 곰 인형이 그려진 노트밖에는 없었다.
너무 유치해서 구석에 박아 둔, 귀여움의 한계선을 돌파한 노트.
이런 걸 나한테 주는 거냐며 성을 내는 건 아닐까 걱정했었는데, 체이스 얌전히 받아 들었다.
그는 어딘가 생경한 눈으로 분홍색 앙증맞은 노트를 만지작거리며 물었다.
“혹시 우리는 이제 친구인 건가?”
“……친구?”
잘못 들었나 싶어서 되물었지만, 체이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체이스만큼 그 단어가 어울리지 않는 사람도 없을 거다. 유디트가 놀란 눈으로 그를 응시했다.
“그렇잖아, 필기구를 빌려줄 사이 정도면 친구 맞지.”
고작 필기구 하나 빌려주었다고 친구라니.
체이스는 이제껏 누군가에게 필기구 한번 빌려 본 적이 없는 걸까?
도대체 체이스가 친구에 관해 어떤 기준을 가지고 있는 건지 궁금해지는 순간이었다.
그런데 그때, 책에 머리를 박을 기세로 열심히 공부하고 있던 르데샤가 고개를 들었다.
르데샤는 공부를 하면서도 일련의 대화를 들었는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유디트, 네가 나한테 요점 정리 노트를 선뜻 빌려준 건 내가 너의 친구라서야?”
“…….”
“내가 너에게 거짓말을 했는데도 넌 나를 친구라고 여겨 준 거야……?”
르데샤가 손으로 입을 가리고 감격했다. 그녀도 어쩐지 착각하고 있는 듯했다.
솔직히 유디트는 뭔가 큰 의미를 가지고 르데샤에게 노트를 빌려준 것은 아니었는데.
그저 유디트는 지금까지 필기구부터 시작해서 숙제나 요점 정리 노트를 남에게 보여 주는 걸 단 한 번도 거절한 적이 없었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또랑또랑한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르데샤에게 차마 상처를 줄 수 없었다.
그런 르데샤의 말에 민감하게 반응한 건 다름 아닌 체이스였다.
“뭐라고?”
체이스는 어쩐지 복잡미묘한 눈빛이었다. 그는 뭔가 배신이라도 당한 사람 같은 반응이었다.
“너…… 나 말고 쟤랑도 그렇게 친했었어? 노트를 빌려줄 만큼?”
동시에 그의 붉은색 눈동자가 거세게 흔들리는 것이 보였다.
그 순간, 르데샤가 체이스 쪽으로 마치 뽐내는 것처럼 요점 정리 노트를 내밀었다.
“말은 정확하게 해 줄래? 이것 봐. 일반 노트가 아니야. 무려 요점 정리 노트라고.”
“…….”
“이런 귀중한 걸 선뜻 빌려준 걸 보면 유디트는 나를 분명 친한 친구로 생각하는 거겠지.”
“하.”
르데샤의 말을 가만히 듣고 있던 체이스는 더욱 분한 표정을 지었다.
그때, 모래 알갱이처럼 거친 목소리가 들려왔다.
“거기 세 사람, 딱 달라붙어서 뭐 하는 거지?”
카렐 교수님이었다.
유디트는 떨어지라는 뜻으로 팔꿈치로 옆에 있는 그들을 툭툭 쳤다.
카렐 교수는 체이스에게 닿아 있는 유디트의 팔을 보더니 못 볼 꼴을 봤다는 듯 혀를 쯧 찼다.
곤란한 얼굴로 굳어져 있는 유디트를 향해 르데샤가 눈을 찡긋했다. 의미 모를 눈짓이었다.
그 순간, 르데샤가 가지런히 손을 들고 말했다.
“체이스가 모르는 문제를 질문해서 함께 알려 주고 있었습니다.”
“그래?”
카렐 교수는 흐음…… 하며 체이스를 빤히 바라보더니 간단히 내뱉었다.
“앞으로는 친구들 말고 내게 질문해라. 질문하기 편하게 수업 시간 때마다 맨 앞자리에 앉도록 하고.”
“……교수님.”
“설마 내 성의를 무시하는 건 아니겠지?”
권유가 아니라 통보였다.
순식간에 체이스의 얼굴에서 핏기가 빠져나갔다. 하지만 카렐 교수의 강렬한 눈빛에 그는 결국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유디트는 그런 체이스가 안쓰럽긴 했지만, 열심히 위로해 주었다.
“체이스, 좋게 생각해. 잘된 거잖아? 너 어차피 공부해야 하니까.”
“…….”
“나보단 교수님이 훨씬 더 잘 가르쳐 주실 테니까 앞자리에서 열심히 들어.”
물론 그 속삭임은, 체이스에겐 전혀 위로가 되지 못했다.
* * *
수업을 마치고 교실을 나가기 전, 카렐 교수는 학생들에게 회계학 보충반을 개설했음을 공식적으로 알렸다.
하위 30%를 위한 수업이라 해당하는 이들은 그리 많지 않을 테다. 하지만 그런데도 학생들은 이 새로운 소식에 지대한 관심을 보였다.
덕분에 유디트는 눈코 뜰 새 없이 바빠졌다. 냉큼 자리를 뜬 카렐 교수 대신 그들의 질문을 감당하기 위해서였다.
한참 시달리다 보니 이미 정규 수업 시간은 끝난 지 오래였다. 하지만 유디트의 할 일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유디트는 텅 빈 회계학 교실에 남아서 할 일들을 끝내기로 했다.
홀로 책상에 앉았다. 책상 위 빼곡하게 들어차 있는 지원서를 보자 또 편두통이 도졌다.
저걸 언제 다 읽지?
심지어 유디트가 할 일은 지원서를 읽는 것에서 그치지 않았다.
수업 준비에 관한 것은 카렐 교수가 전적으로 자신에게 일임한 상황이라 모든 수업 계획과 자료들을 직접 마련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고득점을 바라는 학생들에게 약간의 정보를 알려 주는 것은 어렵지 않았지만, 대상이 대상이다 보니 눈높이를 낮출 필요가 있어 더욱 까다로웠다.
그녀는 시험 범위와 그간의 수업들을 요약해 둔 노트를 쭉 훑었다.
지끈거리는 머리에 손등을 갖다 대고 있는데, 바깥에서 정중한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똑똑똑.
“들어오세요.”
유디트는 또 지원서를 내러 온 학생이겠거니 하고 단순하게 생각했다.
쥐고 있던 펜을 놓고 한숨 돌릴 겸 고개를 들었다.
끼익-.
문이 열리는 소리에 유디트의 시선은 문을 향했다. 그런데 전혀 예상치 못한 인물이 등장했다.
바로, 아셀 페델리안이었다.
환각인가?
아셀이 여기에 있을 리가 없으니, 어쩌면 그를 보고 싶어 하는 내면의 깊은 무의식이 만들어 낸 환각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눈앞의 아셀은 그저 환각으로 치부하기엔 너무나도 뚜렷했다.
성큼, 아셀이 앞으로 다가오자 깨끗한 비누 향이 풍겼다.
이쯤 되니 지금 보이는 게 환각 같은 게 아니라 실제라고 생각할 수밖에는 없었다.
어느새 코앞에 다가온 아셀은 유디트를 향해 살짝 웃곤 말했다.
“회계학 보충반을 모집한다고 해서.”
고요한 바다 같은 눈이 유디트를 가만히 응시했다.
미친 듯이 뛰는 심장을 애써 진정시킨 유디트는 그제야 입을 열 수 있었다.
“그런데?”
“지원하려고 왔어.”
아셀이 품속에서 뭔가를 꺼내더니 책상 위에 올려 두었다.
가지런한 필체로 빼곡히 적힌 종이. 오른쪽 상단에는 아셀 페델리안이라고 쓰여 있었다.
유디트는 순간 자신이 헛것을 보는 건가 싶었다. 하지만 눈을 깜박여 봐도 종이 위에 적힌 글자는 똑같았다.
“네가 지원을 한다는 거야?”
“응.”
산뜻한 대답을 들었지만, 여전히 이해할 수 없었다.
어렸을 때부터 수준이 높은 교육을 받아 온 아셀은 회계에도 능통했으니까.
그렇기에 유디트는 미심쩍은 얼굴로 되물었다.
“어째서? 어차피 너한텐 아무런 도움도 안 돼.”
“아니, 도움 돼.”
단호한 대답이었다. 그 대답을 들은 유디트는 더 의문에 빠졌다.
도대체 무슨 생각인지 모르겠다.
탁탁, 종이를 책상 위에 내리치며 정리하는 척했다.
“하위 30%인 학생들만 지원할 수 있어. 너는 자격 미달이야.”
유디트의 말에 조금 멈칫했던 그가 입을 열었다.
“그럼 내가 이번 회계학 시험 때 백지로 내면 돼?”
“……뭐?”
“내가 이번 시험에서 꼴등을 하면-.”
유디트는 그의 말을 중간에 끊을 수밖에는 없었다.
“아셀.”
이름을 불러 놓고 말을 멈췄다. 이럴 때가 아닌데 그의 이름조차 그동안 너무나 그리웠어서.
유디트는 입 안의 혀를 아플 정도로 세게 깨물곤 말을 이었다.
“왜 그런 말을 해?”
“……“
“왜 기껏 잘 받아 둔 시험 성적을 망치려 하면서까지 보충반에 들어오려고 해?”
지금의 아셀은 이상했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아셀의 행동에 유디트는 또 헛된 착각에 빠지려고 했다.
지금 그가 하는 행동의 의도가 마치 그녀를 보기 위해 그러는 것 같아서.
“너는 왜 자꾸…….”
사람을 착각하게 만들어?
유디트는 가까스로 뒷말을 삼켰다. 그런 그녀를 물끄러미 쳐다보던 아셀이 뜬금없는 질문을 던졌다.
“네가 교수님한테 스카웃 제의를 받았다고 소문이 자자하던데, 사실이야?”
유디트는 별다른 대답을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침묵을 긍정으로 받아들였다.
“그렇구나…… 그래서 보충반 운영도 하게 된 거고.”
그의 말을 듣다 보니 이제야 알 것 같았다.
보충반이 필요하지도 않으면서 보충반에 참여하겠다며 찾아온 이유를.
아무래도 아셀은 유디트가 보충반 수업을 운영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다르게 이해한 듯했다.
그녀가 수습 교수 제의를 받아들였다고 말이다.
확실히 오해할 만한 상황이긴 했지만…….
굳이 아셀에게 사실을 정정하고 오해를 풀어 줄 생각은 들지 않았다.
“용건은 그게 다야?”
유디트의 질문에 아셀이 무언가를 말할 듯 말 듯 입술을 달싹거렸다. 조금 머뭇거리던 그가 입술을 뗐다.
“네가 전에 그랬었지. 미래를 위해서 미리 선을 긋는 거라고.”
아셀이 이어 말했다.
“하지만 사는 세계가 다르다는 이유로 우리가 멀어지는 건 말이 안 된다고 생각해.”
뭔가 했더니 저번과 똑같은 상황의 연장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