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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 다정하지 마세요-21화 (21/110)

내게 다정하지 마세요 21화

“네가 어떤 직업을 갖든, 누구와 결혼하든 교류는 계속 이어 갈 수 있을 거야. 서로가 노력한다면.”

아셀의 말은 틀렸다.

우선 그렇게 되는 것을 페델리안 부인이 좌시하지도 않을 것이다.

또한 지금 같은 관계를 유지했다가는 제 마음만 계속해서 너덜너덜해질 것이 분명했다.

유디트는 피곤이 역력한 목소리를 내었다.

“이미 말했잖아, 아셀. 그럴 수 없다고. 난 이미 너랑 멀어지기로 결심을 굳혔어.”

아셀은 혼란스러운 얼굴이었다. 그는 흔들리는 눈동자로 물었다.

“……이게 온전히 네가 생각해서 내린 결정이 맞아?”

“응.”

“대체 왜? 혹시 다른 사람이 관여한 건 아니야?”

날카로운 질문이었다. 물론 아셀이 의도하고 한 건 아니겠지만.

유디트는 잠시 표정이 흐트러질 뻔했으나 다행히 유지했다.

“그게 무슨 말이야.”

당황을 숨기려고 일부러 화가 난 것처럼 쏘아붙였다.

“너는 내가 다른 사람에게 휘둘려서 마음에도 없는 말을 할 사람처럼 보여?”

갑자기 화를 내는 것에 덩달아 그가 화를 내거나 당황할 법도 하건만, 아셀은 침착했다.

“네가 줏대 없는 사람이라는 뜻으로 한 말은 아니었어.”

그는 잔잔히 말을 이었다.

“하지만 내가 아는 너는…… 그런 이유로 나랑 멀어지려고 할 것 같지 않으니까.”

그의 말에 마음이 울렁거렸다.

아셀이 아는 유디트는 뭘까 싶어서.

대체 네가 나에 대해서 알기는 뭘 아는데. 십 년이 넘는 세월 동안 짝사랑하고 있다는 것도 모르면서…….

유디트는 더 볼 것 없다는 듯이 책상 위 서류들을 탁탁 정리하며 말했다.

“용건 끝났으면 이제 나가 봐. 나는 이거 확인해야 해서 바쁘니까.”

하지만 아셀은 여전히 나가지 않았다. 또 한소리를 하려는 찰나, 나직한 음성이 귀를 파고들었다.

“유디트.”

이름이 불리자 유디트는 순간적으로 고개를 들었다.

“너는 내가 없어도 괜찮아?”

“…….”

갑작스러운 질문에 유디트는 입술이 딱 달라붙은 것처럼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아셀은 왜 이런 질문을 하는 걸까?

도무지 그의 의도를 알 수가 없어서 대답할 말도 떠오르지 않았다.

왜냐하면 괜찮냐는 물음은, 적어도 유디트에겐 아무런 의미가 없는 질문이었으니까.

만약 괜찮지 않으면? 그래 봤자 달라지는 게 있나?

아셀이 곁에 없어서, 그래서 견디기 힘들어지더라도 그녀로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 아닌가.

문득 머릿속에 누군가와 즐겁게 이야기를 나누던 아셀의 모습이 떠올랐다. 인사를 건네고 미련 없이 등을 돌리던 뒷모습도.

유디트는 주먹을 세게 쥐며 입을 열었다.

“물론 마음이 편치는 않겠지. 하지만 금방 익숙해지겠지. 네가 나 없이도 잘 지내고 있는 것처럼.”

자신의 말에 한동안 아셀이 침묵하다, 이내 조용히 입을 열었다.

“내가 잘 지내고 있다고?”

“…….”

“나는 괜찮은 척한 것뿐이야.”

찰나지만 영원 같은 정적.

잠시 시간이 멈춘 듯한 기분이었다.

실제로는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 모르겠다. 뒤늦게 정신을 차린 유디트는 간신히 입을 열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목소리가 조금 떨리고 말았다.

“왜?”

벽 쪽에 서 있던 아셀이 낮게 읊조리며 한 발짝 다가왔다.

“너와의 관계에 뭔가 문제가 있다는 티를 내면 너한테 이목이 쏠릴 테니까.”

고작해야 한 발자국일 뿐인데 마치 아셀이 바로 코앞까지 다가온 것 같아 유디트는 숨을 멈췄다.

고개를 들어서 본 그 하얀 얼굴은, 어쩐지 표정 없이 서늘했다.

“너는 주목받는 걸 좋아하지 않잖아. 나 때문에 네가 부담을 겪는 건 싫었어.”

그가 이어서 말했다.

“그래도 네가 이대로 멀어지려는 걸 지켜만 보고 있을 수는 없었어.”

어느새 가까이 온 아셀이 비스듬하게 유디트를 내려다보았다. 청회색 시선은 유디트에게 붙어서 떨어질 줄 몰랐다.

“내게 알리지도 않고 약혼을 한 것도, 수습 교수직을 맡게 된다 해도 다 이해해 줄 수 있어.”

어느새 아셀의 목소리가 무겁게 가라앉았다.

“그렇지만 이런 식으로 나를 밀어내지는 말아 달란 얘기야.”

줄곧 유디트만을 응시하고 있던 시선이 비껴갔다. 아셀은 시선을 내리깔고 어딘가를 쳐다보았다.

한동안 무거운 침묵이 두 사람이 있는 공간을 가득 메웠다. 유디트는 파도처럼 울렁거리는 마음을 애써 가다듬었다. 그리고 생각했다.

아무리 좋게 판단해 보려고 해도, 자신의 존재는 아셀에겐 부정적으로밖에 작용하지 못한다.

아카데미를 수석으로 졸업했다고 하더라도 평민이라는 자신의 신분은 지워지지 않을 테니까.

오히려 지금이 신분의 제약이 덜한 편이었으니 졸업하고 나면 더욱 큰 구설에 휘말리게 되겠지.

마음을 독하게 먹어야 할 때였다.

“나는 널 위해서 이러는 거야.”

“이게 어떻게 날 위해서야?”

아셀은 한쪽 눈을 찌푸리며,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되려 질문했다.

그 모습을 보자 문득 페델리안 부인의 목소리가 머릿속에 머물렀다.

‘아셀은 똑똑한 아이랍니다. 지금은 유디트와 격 없이 어울리곤 있다지만 커 가면서 알아서 처신을 잘하겠죠. 장차 페델리안 가문을 이끌 하나뿐인 후계자가 그런 것도 못 하겠나요?’

그래, 자신은 부인에게 갚을 은혜가 아직 남아 있지 않은가.

가슴이 아팠지만, 자세한 설명을 요구하는 눈빛에도 유디트는 그저 뭉뚱그려 내뱉을 수밖에 없었다.

“아무튼 널 위해서가 맞아.”

“…….”

끝내 자세한 답변을 피하는 유디트를 보며, 아셀은 말없이 입술을 짓씹었다.

* * *

힐끔거리며 유디트의 표정을 살피던 한나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유디트, 혹시 무슨 일 있어?”

유디트는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한나는 그런 유디트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생각했다.

신입생 때부터 별다른 문제가 없는 한 룸메이트는 고정이었기 때문에 한나가 유디트를 알아 온 지도 벌써 4년이었다.

하지만 그 긴 세월 동안 유디트는 한 번도 자신의 속마음을 드러내지 않았다.

돌이켜보면 늘 고민을 털어놓는 건 한나였고 유디트는 그걸 상담해 주는 역할이었다.

그러므로 한나는 이번에는 자신이 유디트의 고민을 들어주고 싶었다.

“혹시 회계학 보충반 때문에 피곤해?”

“아니.”

“그러면?”

유디트가 뭐라고 말하려고 하자 한나는 불쑥 말을 가로막았다.

“아무것도 아니라고 하지 마.”

“…….”

“너 방금 괜찮다고 하려고 했지?”

한나의 예상이 적중한 듯 유디트가 어색하게 미소 지었다. 그 모습에 한나는 또 내뱉었다.

“웃음으로 얼렁뚱땅 넘어가려고 하지도 말고.”

유디트가 웃는 채로 돌덩이처럼 굳었다. 한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뭔가 고민이 있으면 털어놔 봐. 친구 좋다는 게 뭐겠니? 물론 너무 복잡한 고민이라 내가 해결해 주지 못할 수도 있어. 하지만 적어도 네 마음은 편해질 거야.”

한나는 문득 불안해졌다.

그러고 보면…… 유디트를 친구로 생각하는 건 자신만이 아닌가 싶어서.

생각해 보면 한나가 유디트에 대해 알고 있는 정보는 극히 적었다.

유디트가 자신의 가족 관계, 좋아하는 음식, 취미 등을 모두 꿰뚫고 있는 것에 반해서 말이다.

당연했다. 유디트는 언제나 자신에 관해서 말을 아끼는 편이었으니까.

아마 자신이 꼬치꼬치 캐묻지 않았더라면 그녀의 생일조차 몰랐을 것이다.

한나가 불편한 마음을 애써 눌러 삼키고 있는데, 꾹 다물려 있던 유디트의 입술이 열렸다.

“있잖아.”

조금 머뭇거리던 유디트가 이어 말했다.

“짝사랑을 잊기 위해선 안 보면 된다고 했잖아. 최대한 피하다 보면 언젠가 감정도 사라질 거라고.”

이야기를 듣자마자 한나는 지금 그녀가 하려는 말이 저번 얘기의 연장선이라는 걸 깨달았다.

곧 유디트가 끊어질 듯 가느다란 목소리를 내었다.

“하지만 상대와 부딪힐 일이 계속 생긴다면 어떻게 해야 하지?”

세상에나.

한나는 감격하여 두 손으로 자신의 입을 막았다.

유디트가 처음으로 자신의 고민에 대해 털어놓다니.

역시 4년의 세월이 완전히 헛된 것만은 아니었나?

하지만 감격하며 놀란 건 잠시였고 곧 그녀는 인자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리고는 초조해 보이는 유디트를 향해 최대한 온화한 목소리를 내었다.

“저번에 내가 말했잖아. 또 다른 새로운 사랑을 찾으면 된다고. 원래 좋아했던 사람보다 더 좋아하는 사람이 생기면 자연스럽게 잊히게 되거든.”

“그건 들었지만…….”

유디트가 말끝을 흐리더니 내뱉었다.

“노력한다고 해 봤자 더 좋아하는 사람이 생길 것 같지 않아서.”

“……맙소사.”

한나는 떡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유디트가 체이스 카르단디에게 이 정도로 빠져 있었을 줄이야.

대체 어떤 매력 때문에 반하게 된 걸까?

유디트가 잘생긴 얼굴에 혹할 것 같지는 않았는데, 다른 매력이라도 있나?

어쩌면 체이스 카르단디는 남들에겐 까칠하지만, 약혼자에게는 은근히 잘 챙겨 주는 그런 사람일지도 모른다. 보통 그런 면에 반하곤 하니까.

한나는 수심이 깊어 보이는 유디트에게 불쑥 다가갔다.

그리곤 그녀의 옆자리에 냉큼 궁둥이를 붙이고 앉아 오늘따라 더 가녀려 보이는 어깨를 도닥거렸다.

“유디트, 포기하지 마. 아직 포기해 버리긴 이르잖아?”

“……이르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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