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게 다정하지 마세요 24화
유디트와 아셀은 다 큰 남녀였고, 그런 둘이 붙어 다닌다면 아셀이 좋지 못한 가십에 휘말릴 수도 있으니까.
그래서 유디트에게 적당한 혼처를 소개해 그런 불상사를 막고자 하신 게 분명했다.
실로 현명한 판단이었다.
페델리안 부인이 주선하시는 약혼이라면 유디트 입장에서도 그리 나쁜 조건은 아닐 것이다. 아니, 어쩌면 무척 좋은 기회일지도 몰랐다.
그런데도 아셀은 그 사실에 제법 불만이 많아 보였다.
‘그래서?’
‘나 때문에 원치도 않는 약혼을 하게 둘 순 없잖아.’
아셀이 부드럽게 웃으며 대꾸했지만, 세드릭은 그저 기가 막힐 뿐이었다.
한마디로 희생될 유디트 대신 스스로 약혼을 택했다는 게 아닌가.
세드릭은 못마땅한 듯이 팔짱을 끼고 물었다.
‘그럼 너는 이 약혼을 원했고?’
‘그렇다기보다 어차피 나는 언젠가는 해야 할 일이니까. 그리고 리아나랑 서로 상의해서 약혼을 결정한 거니 괜찮아.’
‘…….’
기가 막혀서 뭐라고 더 묻지도 못했다.
그저 딱딱하게 굳어져 가는 머릿속에 오직 한 가지 질문만이 계속해서 떠올랐다.
대체 왜? 그 여자애가 뭐라고 이렇게까지?
세드릭의 사고로는 아셀이 도무지 납득이 가지 않았다.
하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세드릭은 아셀이 유디트에게 갖는 애착이 제 예상보다 좀 큰 것 같다고만 판단했다.
하지만 지금 눈에 띄게 힘들어하는 아셀의 모습을 보니 다시금 그때의 의뭉스러웠던 감정이 되살아났다.
아셀이 두 눈을 내리깐 채 중얼거렸다.
“다시 찾아가서 무릎이라도 꿇고 빌어 볼까. 그러면 나를 다시 만나 줄까.”
“야…… 너.”
소유물에 대한 집착이라면 차라리 납득이 갈 것 같았다. 하지만 이건 그것과는 조금 결이 달라 보였다.
그도 그럴 게, 그 여자애를 단순한 소유물로 여긴 거라면 이렇게 일일이 상대의 말과 행동에 휘말릴 이유는 없을 테니까.
순간 세드릭의 머릿속에 어떤 가정이 스쳐 지나갔다.
정말 말도 안 되는 가정이.
세드릭은 침을 꿀꺽 삼키고 입을 열었다.
“혹시나 해서 묻는 건데.”
아셀이 이어질 말을 기다리는 것처럼 느릿하게 고개를 기울였다. 무슨 질문인지 해 보라는 태도였다.
세드릭은 아셀을 빤히 쳐다보며, 그럴 리 없다는 걸 알면서도 그만 묻고 말았다.
“너 유디트 좋아해?”
세드릭은 바보 같은 질문이라고 생각했다. 너무나 답이 뻔했으니까.
보잘것없는 평민 소녀와 모든 걸 다 갖춘 아셀 페델리안.
사실 그 정도로 기울어지는 관계면 한데 엮는 것조차 미안해질 정도였다.
그런데 아셀의 반응이 조금 이상했다.
보통 누군가를 좋아하냐는 물음을 들으면 전혀 마음이 없다고 하더라도 당황으로 흔들리기 마련이다.
하지만 아셀은 전혀 동요가 없었다. 그저 무감하게 세드릭을 쳐다볼 뿐이었다.
그 눈빛에는 그저 왜 이런 질문을 하냐는 듯한 궁금증만 담겨 있을 뿐, 다른 감정은 눈에 띄지 않았다.
아셀은 여느 때처럼 부드러운 어조로 대꾸했다.
“내가 유디트를 좋아할 리가 없잖아.”
“그렇지?”
아셀의 명확한 대답을 들었음에도 세드릭은 마음 한편에 남아 있는 찝찝함을 완전히 지울 수는 없었다.
남은 의구심을 마저 털어 내고자 세드릭이 눈을 가늘게 뜬 채 또 질문했다.
“근데 왜 그래?”
뭐가? 청회색 눈이 그렇게 되묻고 있는 듯했다. 세드릭이 천천히 이유를 덧붙였다.
“너 지금 행동하는 게 꼭 좋아하는 여자한테 거절당한 사람 같아서.”
“…….”
굳어 있던 아셀이 한참 후 가까스로 대답했다.
“그럴 리가. 몇 번이나 말했지만, 유디트는 그냥 친구야.”
그냥 친구?
기가 막혔다.
세드릭은 아셀이 유디트에게 어떤 감정을 품고 있는진 정확히 알 순 없었다.
하지만 아셀이 유디트를 단순한 친구로 여기고 있지 않은 건 분명했다.
왜냐하면 아셀이 유디트와 자신을 대하는 태도에는 분명한 차이가 있었으니까.
하지만 세드릭은 곧 생각을 바꾸었다.
차라리 잘 된 거 아닌가?
그는 이 상황이 어쩌면 오히려 기회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사실 아셀이 유디트에게 품은 감정이 어떤 것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두 사람의 신분이 그렇게 차이 나는 이상, 아무리 친구라고는 해도 이제는 슬슬 관계에 선을 긋는 편이 나을 테니까.
아셀이 감정을 자각하는 건 불필요한 일이다. 지금처럼, 앞으로도 쭉 모르는 대로 사는 게 낫겠지.
그렇게 결론 내린 세드릭은 어깨를 으쓱이며 입을 열었다.
“아셀, 내가 친구로서 하나 조언하자면 말이야.”
“……뭔데?”
“남들에게 오해받지 않게 똑바로 처신하는 게 좋을걸.”
아셀이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이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였다. 그런 그에게 세드릭은 친절히 설명해 주었다.
“네가 그 여자애 때문에 이렇게 동요하는 걸 너희 집안에서 알면, 걔한테도 피해가 가지 않겠어? 그리고 그건 네가 바라던 바는 아닐 거 아냐.”
자신의 말을 들은 아셀의 동공이 커졌다. 뭔가 깨달음을 얻은 것처럼.
세드릭은 그런 아셀의 어깨를 몇 번 두드려 준 뒤 뒤돌아섰다.
이 정도로 말해 두었으면 똑똑한 아셀도 알아서 처신을 할 테지.
수업이 끝나고 어둠 속에 잠긴 복도는 고요했다. 그 속을 가로질러 가면서 세드릭은 조용히 생각에 빠졌다.
그런데 그 여자애는 어쩌다 약혼을 하게 된 것일까? 그토록 좋아하는 사람을 두고서?
혹시 누군가 강제하기라도 했나? 아셀이 리아나와 원치 않는 약혼을 한 것처럼?
‘…….’
거기까지 떠올린 세드릭은 곧 눈을 질끈 감았다. 그리고 귀찮다는 듯 머리칼에 손을 넣고 속을 마구 헤집었다.
아셀, 넌 나한테 고마워해야 할 거야.
이번 한 번만 그릇된 길로 빠지지 않게 네 친구로서 도와줄 테니 말이야.
* * *
르데샤 로지에나는 우등생이란 것 외에도 다양한 이유로 교수님들의 주목을 받는 인물이었다.
아마 가장 큰 이유 중 하나는 바로 그녀의 쌍둥이 동생, 르데인 로지에나 때문일 것이다.
그 역시 현재 프로이센 아카데미에 1학년으로 재학 중인 학생으로서, 누나와 마찬가지로 대단한 우등생이었다.
하지만 그 사실을 제외하면 르데인과 르데샤 두 인물 사이에 그다지 접점은 없었다.
부모님께 물려받은 주홍빛 눈동자와 머리색만 제외하면 외적인 것은 물론, 성격적으로도 서로 정반대였기 때문이다.
특히 르데인은 수석 한 번 하지 못한 제 누나를 무척 한심하게 여겼다.
마찬가지로 르데샤 역시 동생의 버릇없는 태도를 질색했기에 둘의 사이는 무척 나쁜 편이었다.
“누나, 같잖은 평민에게 수석 자리를 뺏긴 게 자랑이야? 나라면 그 평민 코를 납작하게 눌러 줄 수 있는데.”
“싹퉁바가지 없는 건 여전하구나.”
르데샤는 오랜만에 만났어도 여전히 버르장머리없는 자신의 동생을 향해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르데인은 어렸을 때부터 머리가 명석하다며 오냐오냐 자랐다.
그런데 그 인성과 성적이 반비례하기라도 하듯 얼마 전 1학년 수석 자리에 앉은 후 더 되바라진 모습을 보이기 시작했다.
집안의 어른들은 성품보다는 성적을 우선시했기에 그의 버릇없는 태도를 딱히 바로잡아 주지도 않았다.
르데샤가 다리를 꼬며 내뱉었다.
“너는 참 어쩜 그렇게 시간이 갈수록 재수가 없어지니?”
“누나는 시간이 갈수록 성적이 떨어지던데. 그것보단 내가 낫지 않을까?”
자신보다 세 살이나 어리면서 한마디도 지는 법이 없었다. 르데샤는 그에게 꿀밤을 먹이고 걸 겨우 참았다.
그렇게 르데샤가 속을 부글부글 끓이는 동안 르데인은 신경 쓰지 않고 제 할 말만 해 댔다.
“회계학 수석 자리는 대대로 로지에나 가문의 것이었어. 안 되겠다. 나라도 누나 대신 그 평민 코를 납작하게 눌러 줘야겠어.”
이래서 만나자고 한 거였구나. 대외적인 이미지를 위해 겉으로만 친한 척 달라붙는 르데인이 왜 개인적으로 약속을 청한 건가 궁금했었다.
하지만 유디트에게 가진 악의적인 감정은 이미 모두 사라진 르데샤였기에, 그저 어깨만 으쓱해 보일 뿐이었다.
“유치하긴. 뭐, 해 보던가.”
말로는 해 보라고 했지만 르데샤는 ‘네가 그럴 수 있을 것 같냐’라는 눈빛으로 자신의 동생을 쏘아보고 있었다.
그 눈빛의 의미를 알아채지 못할 르데인이 아니었다. 르데인은 기가 찬 듯 하, 하고 탄식을 내뱉더니 말했다.
“아니, 도와주겠다는데 대체 반응이 왜 그래?”
“당연하지. 난 네 편이 아니라 유디트 편이니까.”
얼굴을 구긴 동생을 향해 르데샤는 태연한 얼굴로 대꾸했다.
“유디트는 너랑은 다르게 공부도 잘하고 인성도 좋거든. 얼마 전엔 내게 요점 필기 노트까지 빌려줬어.”
“누나 정말 멍청하구나? 그건 경쟁 상대도 안 된다는 거야.”
말만 누나지 르데인은 르데샤를 한껏 얕잡아 봤다. 르데샤는 어이가 없었다.
“너라고 다를 것 같니? 어차피 너도 유디트의 경쟁 상대는 되지도 못해. 걔는 카렐 교수님 마음에 들어서 수습 교수 스카우트까지 받은 애라고.”
“……나한테 다 계획이 있어. 그 계획대로 접근할 테니 누나는 방해만 하지 마.”
“퍽이나 가능하겠다.”
르데샤는 르데인이 쓸데없는 짓으로 또 기력만 소모한다고 생각했지만, 가만히 놔두면 제풀에 지쳐 꺾여 나갈 것으로 판단했기에 굳이 말리진 않았다.
그렇게 대화를 나눈 지 얼마 안 된 어느 날, 르데인은 고급 회계학 수업이 시작하기 직전에 직접 유디트를 찾아왔다.
그것도 평소와 달리 사근사근하게 웃는 얼굴로.
“선배님께 한 수 가르침을 받고 싶습니다. 저를 제자로 받아들여 주시면 안 될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