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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 다정하지 마세요-25화 (25/110)

내게 다정하지 마세요 25화

* * *

유디트는 생긋 웃으며 친근하게 말을 거는 소년을 쳐다보았다.

그녀로서는 처음 보는 인물이었지만 노을 같은 주황색 머리칼은 유독 눈에 익었다.

분명 낯설지 않은 그 색감에 저도 모르게 옆에 앉아 있는 르데샤를 쳐다보았다.

유디트의 시선을 눈치챈 르데샤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아, 응. 내 동생이야.”

눈꼬리가 위로 올라간 르데샤와는 다르게 동생은 눈매가 유순했다.

르데샤의 동생이 왜 자신에게 살갑게 말을 거는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유디트도 살갑게 웃으며 인사를 받아 줬다.

“안녕.”

“선배님, 너무 기뻐요. 제 인사를 받아 주시다니…….”

소년은 별거 아닌 인사에도 감동한 듯 눈을 반짝거렸다. 부담스러워서 아무 말도 못 하고 웃고 있는데 저 멀리서 체이스가 다가오는 게 보였다.

기다란 다리로 휘적휘적 걸어올 때마다 바닷물이 갈라지듯 학생들이 우르르 길을 터 주었다.

체이스는 요즘 따라 성실하게 회계학 수업에 출석 중이었다. 물론 출석만 하는 건지, 수업도 제대로 듣고 있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다가온 체이스는 미간을 와락 구겼다.

“얘는 뭐야? 왜 떨거지가 하나 더 늘었지?”

유디트는 대꾸 없이 옆자리 의자를 턱 끝으로 가리켰다. 그러자 체이스가 얌전히 자리에 앉았다.

며칠 전 카렐 교수는 체이스에게 분명 맨 앞자리에 앉으라고 요구했었다.

하지만 키가 큰 체이스가 맨 앞자리에 앉으니 뒷자리 학생들이 잘 안 보인다며 항의했고, 덕분에 다시 유디트의 옆에 앉게 된 것이었다.

그런데 그 모습을 본 소년이 무슨 생각을 했는지 눈을 반짝 빛냈다.

“대단해요, 유디트 선배님! 말 한마디 없이 손짓만으로도 체이스 선배님을 다루시다니요.”

언뜻 들으면 칭찬으로 들렸지만 체이스가 동물도 아니고 다루긴 뭘 다룬단 말인가.

마치 조련되는 동물처럼 취급하는 말에 찝찝함을 느낀 체이스가 한쪽 눈썹을 삐딱하게 올렸다.

“너 나 알아? 뭐 하는 녀석인데 갑자기 시비야?”

체이스가 당장이라도 덤벼들 것처럼 책상을 들썩였다. 놀란 유디트가 황급히 말렸다.

가뜩이나 덩치가 큰 체이스라 조금만 성을 내도 무척 위협적으로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으르렁거리는 사나운 말투에 상대가 기가 죽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순간, 소년이 눈을 동그랗게 뜬 채 되물었다.

“어라, 그러면 희대의 검술 천재 선배님이라고 불러 드릴까요?”

“……그냥 체이스라고 해.”

사람을 휘어잡는 게 상당히 능숙한 친구 같았다. 유디트는 조금 감탄했다.

어쨌든 빠르게 상황을 정리한 소년은 다시 눈을 반짝반짝 빛냈다.

그러면서 유디트를 향해 자신의 이름을 정중히 소개했다.

“말씀드린 대로 르데샤 누나의 동생이고요, 제 이름은 르데인이라고 합니다. 사실 선배님께 개인적으로 회계학을 배우고 싶어서 찾아왔어요. 예습과 복습을 철저히 하고는 있지만, 혼자만의 노력으로는 한계가 있는 것 같아서요.”

“…….”

“안 될까요?”

예의 바른 간청에 유디트는 눈만 몇 번 깜박였다. 뭔가를 생각하는 듯 고개를 갸웃한 유디트가 내뱉었다.

“르데샤에게 배우면 되잖아?”

르데샤는 회계학 차석이었고 솔직히 성적도 크게 차이가 나진 않았다. 겨우 시험 문제 한두 개를 더 맞추고 틀렸고의 차이밖에는 없었으니.

그러니 르데샤도 1학년을 가르쳐 줄 만큼의 실력은 충족하고도 남을 것이다.

하지만 자신의 대답이 그다지 달갑진 않았는지, 르데인이 잠시 굳어 있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누나도 물론 회계학 실력이 뛰어나신 걸 알아요. 저는 당연히 그런 누나를 존경하고 있고요. 하지만…….”

르데인은 말을 조금 흐리다 어딘지 처량한 목소리로 말했다.

“저희 누나는 누군가를 가르치는 데에는 소질이 없으셔서요. 아니지, 누나는 아무 잘못도 없으세요. 모든 건 다 비상한 누나의 설명을 이해하지 못하는 제 탓인걸요…….”

때마침 창밖에서 바람이 불어와 르데인의 머리카락을 휘날렸다. 주황색 머리카락은 눈부신 여름의 태양 빛을 받아 유독 붉은 빛을 띠었다.

차분하게 흩날리는 머리카락을 보고 있자니 푸른 하늘에 노을이 번져 가는 것만 같아서 절로 눈길을 사로잡았다.

“마침 선배님께서 카렐 교수님께 실력을 인정받아 보충반을 운영하게 되었다는 소식을 들었어요. 비록 학년이 다르긴 하지만 제가 그 수업에 참여할 수는 없을까요?”

유디트를 응시하는 눈가가 머리칼처럼 애처롭도록 붉었다. 더위 때문인지 아니면 그만큼 간절했기 때문인지는 모르겠다.

어쨌든 주황색 눈과 딱 시선이 마주치자 유디트는 난처해지고 말았다.

“음…….”

유디트는 애매하게 웃었다. 다른 때라면 몰라도 지금 르데인을 받아들여 주긴 곤란했다.

왜냐하면 바로 며칠 전 말을 바꾸어 지원한 학생의 대부분을 모집 대상에서 제외한 참이었으니까 말이다.

자신들은 받아들여 주지 않았는데 난데없이 1학년을 받아들였다간 형평성에 어긋난다며 반발하는 학생이 있을지도 몰랐다.

그러니까 안 된다고 해야 하는데, 거절의 말이 잘 나오지 않았다.

르데인을 보고 있자니 문득 1학년 때 자신의 모습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절대 뚫을 수 없는 단단한 벽 앞에 가로막힌, 그 무기력한 느낌.

문제를 풀 때마다 막막하고 속상한 감정에 사로잡혔던 그때가 무심코 떠올랐다.

신입생이던 유디트는 시험 기간 때 모르는 게 생겨도 주변에 물어볼 사람이 없었다.

보통은 과목 교수님께 질문을 한다곤 하지만 아카데미에 무섭기로 손에 꼽히는 카렐 교수님에게 일일이 질문하러 찾아갈 수도 없는 노릇이었으니 말이다.

물론 아셀에게 물어봤다면 친절히 설명해 주었겠지만, 아셀도 시험을 대비하여 자신의 공부를 해야 하는데 자꾸 방해할 수는 없었다.

혹시 지금 르데인도 그때의 자신과 똑같은 막막함을 느끼고 있지 않을까?

유디트가 대답을 망설이고 있는 그때, 옆에서 상황을 구경하듯 보고 있던 체이스가 끼어들었다.

“그거 어렵겠는데. 유디트는 날 가르치느라 바빠서.”

체이스는 팔짱을 끼며 대수롭지 않다는 듯 이어 말했다.

“원래 유디트는 보충반을 맡을 생각도 없었어. 그런데 날 무사히 졸업시켜 주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하게 된 거라고.”

“…….”

“그런데 너 같은 꼬맹이를 받아들여서 일거리를 또 늘리고 싶겠냐?”

안 그런 척하면서 체이스의 말을 듣고 있던 학생들의 웅성거림이 커지자, 체이스는 입가에 씨익 만족스러운 미소를 띄웠다.

사람의 관심을 싫어하던 체이스는 어쩐지 지금만큼은 학생들의 속닥거림을 즐기는 것처럼 보였다.

체이스는 내친김에 유디트 쪽으로 휙 돌아보더니 물었다.

“맞지, 유디트?”

“……응. 그렇지.”

표현이 좀 거칠긴 했지만 곱씹어 봐도 틀린 부분은 없었기에 선선히 동의했다. 그러자 체이스의 입가에 걸린 미소가 더욱 짙어졌다.

“이제 알았지? 쉬는 시간도 끝나 가니까, 너도 얼른 네 반으로 돌아가. 자꾸 옆에서 알짱거리면서 유디트 귀찮게 하지 말고.”

체이스는 정말로 귀찮다는 듯이 손을 내저으며 쫓아내는 시늉을 해 보였다.

그의 말에 입술만 꾹 다물고 있던 르데인이, 이내 울음 섞인 목소리로 다시 입을 열었다.

“……수업을 참관하기도 어려울까요? 꼭 가르침을 받고 싶습니다.”

자세히 보니 눈가가 무척 붉어져 있었다. 마치 금방이라도 눈물을 터뜨리기라도 할 것처럼.

이에 당황한 유디트가 고개를 돌려 주변을 훑었다.

교실에 착석한 다른 친구들이 모두 흥미진진하다는 얼굴로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러다가 이대로 수업이 시작하면 무척 곤란해질 것 같았다.

그 사실을 르데샤도 눈치챘는지, 그녀가 낮은 목소리로 제 동생에게 속삭였다.

“유디트가 어렵다잖아! 그리고 이미 보충반 인원이 확정됐는데 너만 받아 주면 형평성에 어긋나는 걸 왜 몰라? 자꾸 떼쓰지 말고 어서 네 반으로 돌아가.”

르데샤의 사나운 일갈에 르데인은 몸을 움찔 떨었다. 이내 명목이 없다는 듯이 고개를 푹 떨궜다.

“죄송해요, 역시 무리한 부탁이었나 보네요……. 실례했습니다, 선배님.”

어쩔 수 없다는 듯 르데인이 뒤돌아섰다. 축 처진 처량한 어깨를 바라보고 있자니 어쩐지 마음이 영 불편했다.

교실 밖으로 터덜터덜 옮기는 걸음.

그것을 바라보던 유디트는 곧 무슨 생각을 했는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리곤 급히 뒤따라가 르데인의 어깨를 붙잡았다.

덥석-.

놀란 듯이 눈을 동그랗게 뜬 르데인이 뒤를 돌아보았다. 유디트는 터져 나오려는 한숨을 삼키며 말했다.

“르데인이라고 했지? 미안하지만 보충반은 르데샤 말대로 이미 모집이 끝난 상태야.”

대체 왜 이런 행동을 하는 거지.

스스로를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의기소침해진 르데인을 보고 있자니 1학년 때의 자신이 떠올라 가만히 내버려 둘 수 없었다.

스스로 일거리를 만든다고 생각하면서도 유디트는 침착하게 말을 이었다.

“하지만 모집 기준은 카렐 교수님이 정하신 거니 한 번 가서 여쭤보도록 해. 교수님께서 허락하시면 받아 줄게.”

“저, 정말요?”

침울했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유디트는 다급히 말을 덧붙였다.

“아직 확정 난 건 아니야. 일단 교수님께 허락을 받아야 하니까.”

르데인의 주황색 눈동자가 촉촉해졌다. 감동한 눈빛으로 그가 입술을 뗐다.

“그래도 감사합니다! 가르쳐야 할 학생이 늘어서 귀찮아질 텐데도 신경을 써 주시다니…….”

유디트는 왠지 민망하여 큼, 하며 고개를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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