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게 다정하지 마세요 26화
* * *
보충반에 르데인을 추가하게 되면 유디트뿐만 아니라 카렐 교수의 일까지 늘어나는 셈이었다.
아카데미 측에 관련 서류들을 올려야 하기 때문이었다.
그렇기에 유디트는 귀찮은 일을 질색하는 카렐 교수가 그의 요청을 단번에 거절하리라고 예상했다.
연구실로 찾아오라는 카렐 교수의 부름을 받기 전까지만 해도 말이다.
끼익-.
쿵쾅거리는 심장을 겨우 진정시키며 연구실 문을 연 순간, 회색 눈과 눈이 마주치고 말았다. 카렐 교수가 문 바로 앞에 서 있었기 때문이다.
카렐 교수는 유디트를 환영하듯 두 팔을 벌렸다. 예상치도 못한 성대한 환영이었다.
“유디트, 나는 네가 그럴 줄 알았다.”
“…….”
교수님이 왜 이러시는 걸까?
유디트는 문고리를 잡은 채로 굳어 버렸다.
일단 인사부터 건네려고 하는데, 카렐 교수가 어딘가 감격에 젖은 목소리로 먼저 입을 열었다.
“나는 네게 회계학 보충반 제안할 때부터 이런 날이 오리란 걸 알고 있었어.”
“네?”
언제나 초점 없이 흐릿했던 카렐 교수의 잿빛 눈동자.
하지만 오늘따라 이상하게 생기있고 초롱초롱해 보였다. 유디트를 응시하는 두 눈이 안개가 걷힌 것처럼 더할 나위 없이 또렷했다.
대체 왜 저러실까?
유디트는 짐작을 못 하겠기에 눈만 끔벅거렸다. 하지만 카렐 교수는 화가 난 것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카렐 교수는 어리둥절한 유디트에게 여기로 와 보라는 듯이 손짓했다. 그곳은 고풍스러운 책상 앞이었다.
책상 위에는 새까만 명패 하나가 올려져 있었다. 그리고 그 명패에는 유디트라고 적혀 있었다.
이상한 일이었다. 왜 카렐 교수의 연구실 책상에 자신의 이름이 적힌 명패가 올려져 있을까?
유디트는 땅바닥에 발이 붙은 듯이 가만히 서 있다가 할 수 없이 책상 쪽으로 다가갔다.
책상 위에는 책과 노트, 펜 등으로 가득 채워져 있었다. 마치 주인이라도 있는 것처럼…….
……설마?!
유디트의 안색이 귀신이라도 본 것처럼 순식간에 파리해졌다.
“한번 앉아 보렴.”
이상하게도 카렐 교수의 목소리가 부드러웠다. 봄바람을 타고 살랑이는 꽃잎처럼 말이다.
하지만 따스한 권유에도 불구하고 유디트는 가만히 있을 수밖에 없었다.
왠지 저 의자에 앉으면 더는 돌이킬 수 없다는 불길한 예감이 들었기 때문이다.
“앉는다고 닳는 것도 아니다.”
“……네.”
그러나 계속되는 카렐 교수의 재촉에 어쩔 수 없이 자리에 앉아야 했다.
의자는 편안했다. 다리가 바닥에 끌리지도, 발이 동동 뜨지도 않았다. 꼭 유디트에게 맞춤 제작을 한 것만 같았다.
유디트의 안색이 더욱 파리해졌다.
일순 찬바람이 목덜미를 휘감고 지나간 느낌에 어깨를 움찔 떠는 그때, 카렐 교수가 중얼거렸다.
“역시 잘 맞는구나. 기간은 오래 걸렸지만 맞춤 제작을 한 보람이 있어.”
진짜로 맞춤 제작을 한 거였다는 말이야?
유디트의 동공이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떨렸다. 소스라치게 놀란 유디트를 아는지 모르는지 카렐 교수가 흡족한 얼굴을 했다
그리고는 더욱 소름이 돋는 말들을 늘어놓았다.
“회계학 교실의 의자는 네게는 좀 높으니까 말이다. 앞으로 오래 앉아 있어야 할 텐데, 다른 건 몰라도 의자는 편안해야지.”
“…….”
“이 책상도 너를 위해 마련한 것이다.”
유디트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명패를 봤을 때 직감했던 불길한 상상이 현실이 되고 말았으니까.
입술만 빠끔거리는 유디트를 본 카렐 교수는 말했다.
“그런데 혹여 말하는데 부담스러워하진 말거라. 그저 내가 선물해 주고 싶어서 해 주는 것뿐이니까.”
부담스러워하지 말라고는 해도…….
상당히 부담스러웠다.
유디트는 어찌할 바를 몰라 손가락만 꼼지락거리며 카렐 교수를 올려다보았다.
카렐 교수의 이마에는 언제나 주름이 그어져 있었다. 수업할 때나 복도를 지나갈 때나 똑같았다.
하지만 어찌 된 일인지 지금의 카렐 교수는 짙은 주름을 풀고 인자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나는 언젠가 이런 날이 올 줄 알았다. 유디트, 수습 교수 일에 흥미가 생긴 모양이더구나.”
유디트는 갑자기 닥친 이 상황이 몹시 당황스러웠으나 더 이상 듣고만 있을 순 없었다.
“흥미가 생겼다뇨? 저로서는 교수님이 갑자기 왜-.”
유디트의 말은 끝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카렐 교수가 말을 딱 자르고 내뱉었기 때문이다.
“너는 르데인을 회계학 보충반에 넣고 싶어 했다. 맞지?”
“……네, 맞아요.”
순순히 대답한 유디트는 고개를 푹 숙였다.
“죄송합니다, 교수님. 르데인이란 친구가 엄청 간절하게 부탁해서 차마 거절할 수가…….”
그런데 카렐 교수는 고개를 내저었다.
“사과할 것 전혀 없다. 오히려 훌륭하다.”
예상치 못한 말에 유디트는 고개를 들었다. 온기를 품은 잿빛 눈동자가 보였다.
“르데인을 굳이 회계학 보충반에 넣으려던 것은 한 명이라도 더 많은 학생에게 가르침을 주고 싶다는 의미가 아니냐.”
사실 유디트가 르데인을 보충반으로 받아 준 것은 그런 의도는 아니었지만…….
왠지 카렐 교수는 심각한 오해를 한 듯했다. 이미 그의 눈빛 속에는 유디트를 향한 대견함이 가득 어려 있었다.
“역시 내 안목이 틀리지 않았어. 너는 딱 내 뒤를 이을 교숫감이다.”
교수님께서는 아직도 포기하지 않으셨나?
유디트는 눈동자가 사정없이 흔들렸다.
우선 자신을 혼낼 생각은 없으신 듯해 다행이라면 다행이지만, 이 상황도 난감하긴 마찬가지였다.
“……제가 잘못 들은 것 같은데요.”
애써 모른 척해 봤지만 그것도 소용없었다.
“당장 내일부터라도 좋으니까 내 연구실에 오도록 해. 너도 여태까지 자각만 하지 못했다뿐이지 역시 본능적으로 수습 교수의 길을 걷고 있었지 않느냐.”
카렐 교수는 만면에 흐뭇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유디트는 덜컥 겁이 났다. 이대로 어영부영하다가 빼도 박도 못하고 결국 카렐 교수에게 끌려다니게 될 미래가 순간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퀭해진 눈으로 카렐 교수의 옆에서 산더미처럼 쌓인 논문을 읽는…….
안성맞춤인 의자가 왠지 고문 의자처럼 느껴져 유디트는 벌떡 일어섰다.
“갑자기 왜 일어서는 거지? 혹시 어디가 불편한 거냐?”
“아니요, 의자 자체는 편했어요. 다만.”
잠시 숨을 고른 유디트가 와다다 변명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뭔가 착오가 생긴 것 같습니다. 저는 교수님이 생각하시는 그런 의도로 르데인을 받아 준 건 아니에요.”
“그러면?”
“그저 르데인이 수업에 따라가기가 힘들다고 해서 안타까운 마음에 받아 준 것뿐이에요. 딱 동정심으로요.”
르데인을 팔아먹는 꼴이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이것저것 따지기에는 상황이 급했고, 우선 자신이 살아남는 게 먼저였으니까.
그런데 유디트의 말을 가만히 듣고 있던 카렐 교수가 의아한 듯이 한쪽 눈을 찌푸렸다.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거냐? 르데인이 수업에 따라가기 힘들다니?”
”듣기로는 복습해도 그날 배운 내용을 이해하기가 어렵다고 하더라고요.“
미안, 르데인.
자꾸 이름이 거론되는 불쌍한 르데인에게 속으로 사과했다. 이렇게 된 이상 성심성의껏 르데인을 가르쳐 줘야겠다고 다짐했다.
그런데 카렐 교수는 뭔가 생각하는 듯 턱을 매만졌다.
“흐음, 거참 이상하구나. 1학년 수석이 그런 말을 하다니.”
“수석이요?”
“그래, 질문을 던질 때마다 준비해 온 것처럼 곧잘 대답하던데 말이다.”
유디트는 어안이 벙벙해졌다. 르데인과 카렐 교수의 말이 서로 달랐다.
그렇다면 둘 중 한 명은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건데…….
머릿속이 복잡해진 그 순간, 노크 소리가 들렸다.
쾅쾅쾅!
마치 문을 부숴 버릴 듯한 거친 소음이었다.
유디트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카렐 교수님 연구실 문을 저렇게 거칠게 노크하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에.
“예의를 팔아먹은 이 몰상식한 인간은 누구지?”
짓씹듯 내뱉은 카렐 교수가 성큼성큼 문 쪽을 향해 걸어갔다.
그 흉포한 발걸음에서 카렐 교수의 불편한 심기가 그대로 드러나는 것만 같았다.
누군진 모르겠지만 큰일 났구나.
유디트가 강 건너 불구경하는 것처럼 상황을 지켜보았다.
카렐 교수가 힘차게 문을 열었고, 문이 활짝 열리자마자 불순물 하나 섞이지 않은 순수한 은발이 보였다.
“허?”
유디트의 입이 떡 벌어졌다.
예의를 팔아먹은 몰상식한 인간, 그것은 다름 아닌 체이스였던 것이다.
“누군가 했더니만 너냐?”
기가 막힌다는 듯이 카렐 교수가 이마를 짚었다.
죄송하다며 얼른 허리를 굽혀도 모자랄 판이었는데 체이스의 허리는 꼿꼿하기만 했다.
순간 체이스와 눈이 마주쳤다. 체이스는 이글거리는 붉은 눈으로 자신에게 힐끗 눈길을 주며 외쳤다.
“대체 왜 또 유디트를 연구실로 부르신 겁니까?”
“뭐어?”
카렐 교수가 기가 막힌 듯 침음성을 흘렸다.
갑자기 자신의 이름은 왜 나오는 거지?
왠지 조마조마한 마음에 유디트는 카렐 교수의 눈치를 살폈다. 유디트가 잘못한 것은 하나도 없는데 유디트만 눈치를 보는 이상한 상황이었다.
그러는 사이에도 카렐 교수와 체이스의 대화는 이어졌다.
“내가 유디트를 부른 게 불만이냐?”
“불만이 아니라 궁금합니다. 교수님께서 왜 자꾸 일개 학생을 연구실로 부르시는 건지.”
누가 봐도 불만이 가득한 얼굴로 체이스가 그렇게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