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게 다정하지 마세요 27화
카렐 교수는 더욱 언짢다는 듯이 팔짱을 꼈다.
“내가 왜 대답해 주어야 하지? 네게 그런 걸 알 권리는 없는데 말이다.”
“대답해 주지 않으실 거면 유디트에게 직접 물어보겠습니다.”
“허어?”
어이가 없다는 헛웃음에도 체이스는 전혀 기죽지 않은 채, 성큼성큼 유디트를 향해 걸어왔다.
곧 그가 비장한 눈빛으로 물었다.
“유디트, 카렐 교수님이 왜 너를 여기에 부르신 거야?”
“그냥 수습 교수 관련해서 이야기했어. 별거 아니야.”
대체 무슨 오해를 했길래 체이스가 막무가내로 찾아온 걸까?
제 말을 듣고 무슨 생각을 했는지 잠시 침묵하던 체이스가 다시 입을 열었다.
“역시 그랬구나. 찾아오길 잘했네.”
“…….”
이제 유디트는 그가 무슨 짓을 저지를 생각인지 조마조마하기만 했다.
곧이어 체이스는 유디트에게서 시선을 떼더니 매의 눈으로 연구실을 살펴보기 시작했다.
구석구석을 살피던 시선은 카렐 교수가 유디트를 위해 마련한 책상 앞에서 딱 멈추었다.
체이스가 벌레라도 본 듯이 와락 인상을 썼다.
“대체 저 책상은 뭡니까? 왜 명패에 유디트의 이름이 있는 거죠? 유디트가 수습 교수를 할 거라고 지레짐작해서 저런 걸 가져다 두신 겁니까?”
턱-.
도를 넘도록 예의가 없는 말이었다. 기겁한 유디트가 황급히 손바닥으로 체이스의 입을 막았다.
하지만 이미 늦어 버렸다. 카렐 교수는 체이스가 했던 말들을 다 들어 버린 뒤였으니까.
카렐 교수는 듣기만 해도 등골이 오싹해질 정도로 서늘한 목소리로 말했다.
“들고 있던 사탕을 빼앗긴 어린애같이 굴지 좀 말지? 자꾸 피해자인 척하는데, 피해자는 다름 아닌 나다. 너만 아니었어도 유디트는…….”
말을 하던 카렐 교수가 분에 찬 듯이 이를 악물었다.
서로를 잡아먹을 듯한 거친 눈빛. 허공에서 팽팽한 눈싸움이 이어졌다.
고래 싸움에 새우등이 터진다더니, 지금 유디트가 딱 그 꼴이었다.
긴장감으로 공기마저 얼어붙을 것 같은 분위기였다. 침을 삼키는 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완전한 정적.
그 치열한 눈싸움에서 시선을 먼저 돌린 것은 카렐 교수였다. 카렐 교수는 유디트를 향해 낮게 통보했다.
“유디트, 네게 볼일은 끝났으니 이제 나가 봐라.”
“네? 하지만…….”
유디트는 선뜻 연구실 밖으로 나가지 못했다. 자신이 나가고 두 사람 사이에서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른다는 불안감 때문이었다.
하지만 카렐 교수는 유디트를 밖으로 내보낼 손쉬운 방법을 알고 있었다.
“왜 나가지 않는 거지? 역시 입으로는 싫다고 하지만 마음속으론 수습 교수를 하고-.”
“다음에 뵙겠습니다, 교수님.”
쾅.
언제 망설였냐는 듯이 유디트가 연구실 밖으로 빠르게 사라졌다.
카렐 교수는 굳게 닫힌 문을 황망히 쳐다보다 시선을 돌렸다.
효과가 좋을 것은 예상했다지만 이렇게나 좋을 줄은 몰랐는데…….
뭐, 어쨌든 이제 연구실 안에는 자신과 체이스, 단둘뿐이었다.
카렐 교수는 지금 이 상황이 기가 차고 어이가 없을 지경이었다.
프로이센 아카데미 14년 교수 재직 생활 중에 제게 이토록 건방지게 구는 학생은 처음 봤다.
대체 왜 부전공으로 회계를 선택한 건지도 모를 만큼 땡땡이를 일삼던 체이스 카르단디.
체이스는 출석 일수 부족, 시험 성적 기준 미달로 졸업도 간당간당했다. 졸업하기 위해선 어떻게든 자신에게 잘 보여야 하는 상황이다.
하지만 알랑거려도 모자랄망정 시건방지게 눈을 치켜뜨고 있었다. 붉은색 눈동자에는 불만이 대놓고 넘실거리고 있었다.
뚜벅, 뚜벅.
카렐 교수는 끼고 있던 팔짱을 풀고 체이스에게 걸어갔다. 이젠 둘 사이를 중재시켜 줄 유디트도 없었다.
기가 죽을 법한데도 체이스는 자신을 앙칼지게 노려보고 있었다.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주제에 우습지도 않았다.
체이스 바로 앞에서 걸음을 멈춘 카렐 교수가 입을 열었다.
“체이스, 솔직하게 말해 봐라. 내가 유디트를 연구실로 부른 게 불만인 거냐?”
불만이냐 물었지만, 당연히 불만이라고 대답할 수 있을 리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체이스는 카렐 교수의 예상을 아득히 뛰어넘을 만큼 방자한 인물이었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유디트에게 수습 교수 제안을 하신 게 불만입니다.”
이것 봐라?
카렐 교수는 기가 막히고 코가 막혔다. 허리에 손을 얹고, 입꼬리를 비틀며 한껏 빈정거렸다.
“왜지? 설마 불안해서냐? 수습 교수가 된 유디트가 너와 약혼하지 않을까 봐?”
그동안 봐 온 체이스의 성정상, 대답하기를 망설일 거로 생각했다. 하지만 체이스는 유디트가 나간 문 쪽을 힐긋 보더니 거리낄 것 없다는 듯이 대답했다.
“네.”
“…….”
카렐 교수는 말문이 턱 막혔다. 지끈거리며 편두통이 도지는 느낌에 카렐 교수는 이마를 짚었다.
“너 설마 유디트를 좋아하기라도 하는 거냐?”
혹시나 해서 물었는데, 시종일관 건방진 표정을 하고 있던 체이스의 얼굴이 불타듯이 화르륵 달아올랐다.
“아닙니다! 대체 왜 그런 이상한 오해를-.”
“그럼 왜지?”
말을 중간에 뚝 자르고 하는 추궁에 체이스가 시선을 내리깔았다. 우물쭈물하며 중얼거렸다.
“유디트가 곁에 있으면 귀찮은 사람들이 접근하지 않아서 편하니까…….”
“정말이냐?”
잠시 머뭇거린 체이스가 덧붙였다.
“약혼을 깨고 다시 약혼녀를 찾는 건 귀찮은 일이니까 웬만해선 약혼을 깨고 싶지 않습니다.”
“흐음.”
카렐 교수는 뭔가를 생각하는 듯 턱을 매만졌다.
사실 가만히 체이스의 말을 듣고 있으면서도, 왠지 그가 하는 말들이 전부 변명 같이 느껴졌다. 자신의 눈을 살살 피하며 말끝을 흐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더 묻지는 않았다.
뭐, 정확한 이유는 모르겠지만 어쨌거나 체이스가 유디트와 약혼을 깨고 싶지 않아 한다는 사실만은 분명했으니까.
이제야 문을 부숴 버릴 듯이 두드리며 연구실로 냅다 찾아온 체이스가 이해될 것만 같았다.
물론 이해된다고 해 봤자 손톱 밑의 때만큼이지만. 그렇다고 버릇없는 태도가 용납되는 것도 아니었지만.
카렐 교수는 체이스의 기를 죽이기 위해 그를 깔보듯 내려다보려고 했다.
하지만 실패하고 말았다. 건방진 놈이 쓸데없이 키만 멀대 같이 컸기 때문이다.
더욱 불쾌해진 카렐 교수가 미간에 짙게 인상을 쓰며 따지듯 물었다.
“만약 유디트가 진심으로 교수직을 하고 싶다고 한다면 어떻게 할 거냐? 누가 봐도 좋은 기회인데 너 때문에 포기하게 할 거냐?”
체이스의 표정이 흐트러졌다. 붉은 눈동자가 죄책감으로 흔들렸다. 하지만 그건 잠시였고, 다시 표정을 굳힌 그가 말했다.
“만약 그렇다면 군말 없이 물러날 겁니다.”
체이스는 언제 눈을 피했냐는 듯이 카렐 교수를 쏘아보았다.
“하지만 어차피 지금 유디트는 수습 교수를 할 생각이 전혀 없어 보이니까요.”
“…….”
“교수님께서도 유디트에게 억지로 수습 교수직을 더 권하진 마세요.”
“이것 봐라?”
서로를 잡아먹을 듯한 거친 눈빛이 또 허공에서 맞부딪쳤다.
한참의 눈싸움 끝에 카렐 교수는 선포했다.
“난 유디트를 포기할 생각 없다.”
하지만 체이스도 지지 않겠다는 듯이 말했다.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끝까지 맞붙기를 주저하지 않는 불손한 눈빛.
그걸 본 카렐 교수는 허, 하고 헛웃음을 내뱉었다.
정말이지 새파란 놈이 건방지기가 하늘을 찌르고 있었다.
* * *
시간은 흘러 어느덧 보충반 수업 첫날이 되었다.
어젯밤 수업 준비를 한다고 밤을 새운 터라 몸 상태가 엉망이었다. 유디트는 떨어지지 않으려는 발을 겨우 옮기며 교실로 향했다.
문 앞에 멈춰 선 유디트는 잠시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 이 문을 열면 세드릭은 물론이고 리아나도 있겠지.
그들을 어떻게 봐야 할까.
그나마 피곤함으로 다크서클까지 낀 얼굴이라 다행이었다. 표정이 잠시 구겨진다 하더라도 피로로 인한 것이라 여겨 줄 테니까.
끼익-.
문을 열고 교실 안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교실 안 풍경을 본 유디트는 눈을 동그랗게 뜰 수밖에 없었다.
그도 그럴 게, 교실에는 단 한 사람밖에 없었다.
바로 세드릭이었다.
이제 막 수업 시간인데 왜 다들 오지 않은 거지?
당황한 유디트가 문 앞에 멈추어 섰다. 그런 유디트를 향해 세드릭이 태연히 말했다.
“유디트, 왜 안 들어와?”
“……왜 너 혼자 여기에 있는 거야?”
“글쎄, 다들 땡땡이라도 친 거 아냐?”
유디트는 눈을 끔벅거렸다. 만약 땡땡이를 친다면 세드릭이 칠 줄 알았는데.
혹시 뭔가 착오가 있는 건가?
상황을 알아보기 위해 교실 밖으로 나가려는데, 그런 유디트를 세드릭이 불러 세웠다.
“어디 가? 수업해야지.”
“아직 학생들이 오지 않았잖아. 이렇게 단체로 땡땡이를 치다니, 뭔가 문제가 생긴 게 분명해.”
“그럴 필요 없는데.”
분명 뭔가 알고 있다는 말투였다. 유디트는 의심스럽다는 눈빛을 보냈다.
그녀의 시선을 느낀 그는 빙긋 웃으며 입을 열었다.
“사실 내가 안내장을 조작했거든. 수업 시간을 실제 수업 시간보다 조금 늦게 변경했어.”
너무 태연히 말하는 바람에 의미 파악이 늦었다. 유디트는 눈을 몇 번 깜박이고 나서야 물어보았다.
“……왜 그런 짓을 한 거야?”
그녀의 말에 세드릭이 더욱 진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너랑 한 번쯤 대화해 보고 싶어서.”
“뭐?”
유디트는 그만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