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게 다정하지 마세요 28화
황당하다는 눈빛에도 굴하지 않고 세드릭이 말을 이었다.
“생각해 봐. 서로 알고 지낸 지는 오래됐는데 우리 제대로 된 대화 한 번 나눈 적이 없잖아?”
그건 맞지만, 그렇다고 이렇게 갑자기 단둘이 대화를 나눌 정도로 살가운 사이도 아니었다.
게다가 그는 아셀과 다르게 귀족 중심적인 사고로 가득한 인물이었다.
분명 뭔가 목적이 있어서 이러는 것일 텐데.
유디트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그녀가 속으로 잔뜩 경계하는 사이, 세드릭이 예상치 못한 질문을 던졌다.
“궁금해서 묻는 건데, 너 혹시 아셀이랑 싸우기라도 한 거야?”
의외의 질문이라 흠칫 몸을 떨 뻔했으나 다행히 그러진 않았다. 유디트는 냉정히 대꾸했다.
“네가 알 필요는 없잖아.”
“아, 반응을 보니 싸운 게 아니라 네가 일방적으로 밀어낸 거구나?”
세드릭은 보통 눈치가 좋은 게 아니었다. 그는 유디트의 미세한 표정 변화를 눈치채곤 혼자 고개를 끄덕거렸다.
“좋아하는 상대를 그렇게 매정하게 밀어낼 수 있다니, 너 용기가 제법 대단하네.”
“…….”
이미 충분히 놀랐다고 생각했는데 착각이었던 걸까.
이번에야말로 유디트는 심장이 쿵 떨어지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그녀는 숨을 쉬는 것도 잊은 채 세드릭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대체 언제부터, 어떻게?
무슨 수로 자신이 아셀을 좋아하는 걸 알았던 거지?
세드릭은 충격으로 굳어 버린 유디트를 보며 빈정거리듯 말했다.
“흠, 칭찬인데 표정이 왜 그래?”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왜 말이 안 돼? 너 아셀 좋아하잖아. 내가 모를 줄 알았어?”
“…….”
혼란스러웠다. 이미 세드릭은 확신하고 있었다. 변명을 해 봤자 통하지 않을 테다.
그때 유디트의 머릿속에 설마 하는 가정이 스쳤다.
세드릭이 이 사실을 알고 있다는 건 어쩌면 아셀도 제가 좋아한다는 걸 이미 알고 있는 게 아닐까?
만약 그동안 아셀이 그저 친구로 남기 위해, 어색해지기 싫어서 제 고백도 알면서 모르는 척했던 거라면?
혼란만 가중되는 와중에 세드릭은 뭔가가 떠올랐다는 듯이 짝, 박수를 쳤다.
“아 맞다. 늦었지만 축하해, 유디트.”
혼이 나간 유디트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고 있는 사이, 세드릭이 개의치 않으며 말을 이었다.
“그, 누구더라. 네가 검에 미친 녀석이랑 약혼했다는 소식 들었거든. 그런데 다시 생각해 봐도 신기하네.”
그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을 이었다.
“누군가를 좋아하는 와중에 다른 사람과 약혼할 생각을 하다니 말야. 보통은 그러지 못할 텐데.”
“…….”
“그거 진짜 네가 원해서 한 거 맞아? 아니지?”
그러나 그의 연이은 질문에도 머릿속이 복잡한 유디트는 가만히 서 있을 뿐이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세드릭은 멋대로 추측을 이어 나갔다
“아니면 혹시…… 페델리안 공작 부인이 시킨 건가?”
그 말을 듣고 나서야 유디트는 겨우 입술을 뗄 수 있었다.
대체 네가 그 사실을 어떻게 알았냐, 언제부터 알았냐를 물어보려다가 마음을 바꿔 다른 걸 먼저 물어보기로 하였다.
“아셀은.”
목구멍이 타들어 가는 것 같아서 멈칫했다가 다시 말했다.
“내가 자기를 좋아한다는 거 알고 있어?”
세드릭의 대답을 기다리는 일분일초가 마치 일 년 같았다. 체감상 긴 시간 후에 그가 대답했다.
“모르지, 당연히.”
아셀은 모르는구나.
이럴 때가 아니지만 유디트는 안도감을 느꼈다. 그가 모든 것을 알면서 자신을 기만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에.
하지만 아직 골칫거리는 남아 있었다.
세드릭은 자신이 아셀을 좋아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것은 물론, 이를 통해 페델리안 부인에게서 강제로 약혼을 주선 받은 게 아니냐는 추측까지 하고 있었다.
이미 좀 전에 어리숙한 대처로 그에게 확신을 심어 준 셈이었다. 지금 와서 발뺌을 해 봐야 늦었겠지.
유디트는 몇 분 전의 자신을 탓하려다가 그만두었다. 자책해 봐야 상황은 달라질 게 없었으니까.
이렇게 된 거 그에게 대놓고 물어보기로 하였다.
“너 혹시 이 사실들을 아셀한테 말할 거야?”
“아니? 내가 왜?”
의외의 대답이었다.
솔직히 세드릭의 성격상 본인의 재미를 위해서라면 아무렇지도 않게 폭로할 줄 알았는데 말이다.
그런데 세드릭이 진지한 눈빛으로 유디트를 바라보았다.
“유디트. 너는 약혼도 했겠다, 이제는 마음을 접고 완전히 아셀과 멀어질 셈이지?”
유디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끄덕임을 본 세드릭은 만족스럽게 웃었다.
“그게 바로 내가 바라던 바거든.”
“…….”
잠시 후 세드릭이 팔짱을 끼며 다시 말을 이었다.
“좋아, 그럼 앞으로 네가 목적을 이룰 수 있도록 아셀이 접근하지 못하게 도와줄게.”
이번에도 의외였다. 유디트가 눈을 가늘게 떴다.
분명 대화 한 번 나눈 적은 없지만, 항상 자신을 못마땅한 눈초리로 노려봤기에 세드릭이 자신을 싫어한단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런데 세드릭은 싫어하는 상대를 왜 도와주려는 걸까?
한편 세드릭은 유디트가 자신의 제안에 의문을 품고 있다는 걸 알아챘는지 간단히 설명을 덧붙였다.
“나도 페델리안 부인과 목적이 같으니까 말이야. 네가 아셀과 엮이지 않았으면 좋겠어.”
말을 마치기 무섭게 곧이어 유디트의 곁으로 걸어온 세드릭이 그녀의 어깨를 몇 번 두드렸다. 마치 격려를 해 주듯이.
“잘하고는 있는데, 앞으로도 지금처럼 이렇게 좀 더 노력해 줘. 할 수 있지?”
“…….”
“시간 다 됐다. 이제 학생들이 올 거야.”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교실 문이 열렸다.
덜컥-.
“유디트? 벌써 와 있었네?”
르데인과 체이스, 그리고 나머지 보충반 학생들이었다.
그들의 등장에 유디트는 세드릭에게 뭔가를 더 묻지 못하고 입술만 깨물어야 했다.
* * *
무슨 정신으로 수업을 했는지 모르겠다. 다행히 리아나는 끝까지 보충반에 오지 않았다.
만약 리아나까지 왔다면 정신이 더욱 흐트러졌을 테니까 다행인 일이었다.
그렇게 어찌저찌 첫 수업을 마치고 나니 금세 점심 식사 시간이었다.
원래대로라면 바로 기숙사로 돌아가 대충 때웠겠지만, 체이스가 약속을 들먹이며 배고프다 하는 통에 어쩔 수 없이 카페테리아로 향하게 되었다.
거기에 르데인이 따라붙었고, 르데샤도 어떻게 알고 찾아왔는지 수업이 끝나자마자 밥을 사겠다며 자연스럽게 끼어들었다.
그러다 보니 일행이 벌써 4명이었다.
눈 깜짝할 사이에 불어난 인원에 유디트가 어안이 벙벙해 있는 그때.
자연스럽게 자신의 옆자리에 앉은 체이스가 유디트의 음식을 보더니 혀를 쯧 찼다.
“저번에도 빵 조각만 먹더니 이번에 도야?”
마음에 안 든다는 듯이 타박한 체이스가 곧 유디트의 접시 위에 제 음식을 덜어 주었다. 기름기가 흐르는 커다란 스테이크였다.
아무래도 그의 식성을 적극 반영한 식단 같았다.
“그럴 줄 알고 이거 가져왔으니까, 고기 먹어.”
체이스는 나이프를 들더니 손수 고기를 썰어 주기까지 했다. 썰린 단면에 새빨간 육즙이 스미는 게 보였다.
하지만 유디트는 입맛이 없었기에 그저 못마땅하게 고기를 바라봤다. 그 시선을 눈치챘는지 체이스가 말했다.
“편식하면 키 안 큰다.”
“…….”
“물론 네가 거기서 키가 자라 봤자 나보단 작겠지만.”
뜬금없는 도발에 유디트는 포크를 쥔 손에 힘을 주고 체이스를 매섭게 노려보았다. 하지만 체이스는 여유롭게 웃을 뿐이었다.
“왜? 내가 틀렸어?”
체이스가 비웃듯이 한 말에 뭐라고 한 마디 쏘아 주고 싶었다. 하지만 그는 평균을 훨씬 웃도는 우월한 기럭지의 소유자였다.
분한 마음으로 체이스를 째려보고만 있는데, 앞쪽에서 불쑥 누군가 끼어들어 말했다.
“어차피 편식이 무슨 상관인가요? 유디트 선배님은 이미 성장이 완전히 끝나신 후일 텐데.”
르데인이었다. 그는 저번에 눈물을 흘리던 모습이 무색할 정도로 살갑게 웃고 있었다.
앞에서 꾸깃, 미간에 인상을 쓰고 있는 체이스는 보이지도 않나 보다.
오히려 르데인은 유디트를 향해 꽃봉오리가 만발한 것처럼 화려한 미소를 입가에 걸쳐 보였다.
점점 날카로워지는 분위기에 유디트가 어쩔 줄 몰라 할 무렵, 체이스가 곧 관심 없다는 듯이 고개를 홱 돌렸다.
그리곤 화제를 바꾸어 유디트에게 질문했다.
“참, 아까 수업 시간을 갑자기 앞당기겠다고 했지? 그게 무슨 소리야?”
그러자 다른 친구들의 시선도 일제히 제게로 쏠렸다. 유디트는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망설이다가 이내 입을 뗐다.
“……앞당긴 게 아니라 그게 원래 정해진 수업 시간이야. 안내장이 잘못 나갔어.”
“네? 아까는 그런 말씀 없으셨잖아요.”
르데인이 놀라며 되물었다. 그도 그럴 게 아까 수업 중에는 정확한 원인을 말하지 못했다.
왜냐하면 세드릭의 앞에서 대놓고 그가 원인이라 말하기 곤란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세드릭도 없으니 솔직하게 털어놓기로 했다.
“음, 그게……. 세드릭이 안내장에 장난을 쳤대.”
“뭐?”
순식간에 체이스의 표정이 험악하게 바뀌었다.
곧 들이받으러 가기라도 할 것처럼 들썩이는 그를 유디트가 손으로 가로막으며 말을 이었다.
“단순히 마법 연습을 좀 한 것뿐이래. 실수라고 하고 사과도 했으니 잊어버려.”
르데샤가 심각한 눈으로 유디트를 바라보며 물었다.
“정말 그냥 실수인 거 맞지? 그 녀석이 널 괴롭히거나 하는 건 아니지?”
“응.”
본인 입으로 앞으로는 제 일에 협력한다고 했으니 별문제는 없을 것이다.
유디트가 자신 있게 대답하자 체이스가 의심스런 눈초리를 보내면서도 다시 잠잠해졌다.
잠잠해진 분위기를 쇄신하려는 듯이 르데인이 능청맞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어쨌든 선배님의 가르침을 받으려면 또 한 주를 기다려야 한다니 아쉽네요. 전 오늘 수업 정말 좋았거든요.”
예의상으로 그러는 게 아니라는 듯 르데인의 주황색 두 눈에는 짙은 아쉬움이 넘실거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