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게 다정하지 마세요 29화
유디트는 이런 부분에서는 르데인과 르데샤가 똑 닮았다고 생각했다. 둘 다 학구열이 정말 뛰어났으니까.
1학년이면 한창 놀 시기였다.
물론 그렇게 생각하는 유디트도 도서관에 틀어박혀 밤을 지새우곤 했지만, 어쨌건 르데인은 자신보다야 좀 더 여유로운 환경이지 않은가.
저도 모르게 대견하다는 눈빛으로 르데인을 응시하고 있는데, 옆에서 르데샤가 그런 제 동생을 향해 날카로운 투로 쏘아붙였다.
“쯧쯧, 듣는 내가 고역이다. 유디트, 이 녀석 말은 이렇게 해도 속은 능구렁이나 다름없으니 속지 마.”
“무슨 말씀이에요, 누나.”
르데인이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억울하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에 르데샤가 인상을 찡그리더니 기가 막힌다는 듯 혀를 찼다.
“아니, 그리고 대체 네가 언제부터 나한테 존댓말을- 웁.”
“그러지 말고 제 푸딩이나 드세요.”
“……!”
“직접 먹여 드리니까 더 맛있죠?”
항시 투닥대긴 해도 서로 나름 신경 써 주는 걸 보면 꽤 친한 사이인 것 같았다.
유디트는 그런 두 사람의 사이가 부럽다고 생각하며 흐뭇한 미소 지었다. 옆에서 체이스도 같은 생각을 한 모양이었다.
“너희 사이좋아 보인다?”
“……도대체 어디가?”
“그렇게 맨날 다투면서도 항상 잘 붙어 다니잖아.”
그 말에 르데인은 고개를 끄덕거리며 산뜻하게 웃었고, 르데샤는 상한 음식을 입 안에 넣은 듯한 썩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런 로지에나 남매를 지켜보던 유디트는 문득 생각에 잠겼다.
나도 저런 형제가 있었다면 좀 달랐을까.
어린 나이에 아버지를 잃고 혼자가 되면서부터 그녀의 삶이 형태가 변하기 시작했다.
갑작스러운 상실감, 세상에 혼자 남겨진 것만 같은 공허함과 외로움.
그런 상황에서 아셀은 자신의 심정을 아는 것처럼 허전함을 채워 주려 노력했고, 어느새 유디트는 아셀 없이는 살 수 없을 만큼 그에게 매달리게 되었다.
그렇게 아셀과 질긴 유대감으로 연결되어 있다고 착각하고 산 지가 어언 몇 년이던가.
물론 그 착각 속에 빠져 살았을 땐 달콤하고 행복했다. 하지만 착각이 깨진 후에 그것은 더 큰 상실감으로 돌아왔을 뿐이다.
이제는 어떻게 헤어 나올 수 없는 아득한 늪 속에 빠진 것처럼 말이다.
그래서 지금껏 발버둥을 쳐 겨우겨우 여기까지 온 건데…….
세드릭은 이 모든 걸 또 어떻게 알고 꼬치꼬치 사정을 캐물어 오는 건지.
유디트는 부디 세드릭이 자신을 돕겠다는 말이 사실이기를 바랐다.
그래서 아셀에게는 끝까지 사정을 밝히지 않기를, 제 마음에 대해서 계속 비밀을 지켜 주기를 말이다.
골치 아픈 일들이 머릿속에 가득하다 보니 자연히 식사하던 손이 느려졌다.
“유디트, 입이 논다?”
뭔가 못마땅하다는 듯이 유디트를 보던 체이스는 포크에 고기를 콕 찍더니 건네주었다. 유디트는 얼떨결에 포크를 받아 들었다.
“온종일 식사하고 있을 거야?”
“그건 아니지만 바쁜 일 있으면 너 먼저 가도 돼.”
제 접시를 내려다보니 바닥을 보이려면 아직 한참은 더 걸릴 성싶어 부러 그렇게 말했다.
하지만 체이스는 자리에서 일어날 생각이 없는지, 느릿하게 팔짱을 끼며 대꾸했다.
“바쁜 일은 없어.”
“그래도 심심하잖아.”
“너랑 있는데 뭐가 심심…….”
체이스가 아무렇지 않게 말을 내뱉다 오히려 본인이 화들짝 놀랐는지 말을 멈췄다.
곧 새빨개진 얼굴로 그가 앞에 앉은 르데샤와 르데인 남매를 번갈아 가리키며 말을 돌렸다.
“쟤들이 티격태격하는 꼴을 보니까 심심할 틈이 없다는 거야.”
“알겠어.”
유디트가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체이스에 대해선 어느 정도 파악이 되어 그런지 이렇게 허둥대는 모습도 익숙했다.
터질 듯이 빨개진 귀도 못 본 척할 수 있는 정도가 되었다.
어찌 보면 체이스도 르데샤만큼이나 솔직하지 못하다니까.
다시 부지런히 입 안에 음식물을 집어넣으며 유디트는 골똘히 생각에 빠졌다.
하지만 세드릭은 그렇다 치더라도, 아직 문제가 남았다.
오늘은 리아나가 수업에 참석하지 않았으니 아직 수업 시간을 잘못 알고 있을 게 분명했다.
리아나에게도 이 사실을 정정해 줘야 하는데 언제 만나러 가야 하지? 적어도 다음 수업이 다가오기 전까진 알려 줘야 할 텐데…….
마음 같아서는 다른 친구를 통해 전달하고 싶었지만, 혹여 이번처럼 예상치 못한 문제가 생길까 걱정이었다.
역시 직접 구두로 전달하는 편이 더 빠르고 정확할 것이다. 골치가 아픈 일은 최대한 빨리 끝내 버리는 게 좋지.
마음속으로 결론을 내린 유디트는 다시 힘없이 식사를 이어 나갔다.
* * *
르데샤는 순진한 체하며 웃고 있는 제 동생을 벌레 씹은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오늘이야말로 요점 정리 노트에 대한 감사 표시로 유디트에게 밥을 사려고 했는데.
단둘이 카페테리아에서 밥을 먹으며 수다를 떨려던 계획은 방해꾼 두 명이 끼는 바람에 그만 실패하고 말았다.
사실 체이스의 경우에는 유디트의 약혼자인 데다가 아직 그다지 친하지도 않아서 대놓고 뭐라 할 순 없었지만, 만만한 제 동생은 달랐다.
르데샤는 식사 내내 불만 어린 눈빛으로 르데인을 노려보았다.
그러면서 그녀는 아침에 동생과 나눴던 대화를 떠올렸다.
사실, 대화라기보다는 르데샤가 일방적으로 그에게 시비를 건 것에 가까웠지만.
어쨌든 아침에 제 동생을 발견한 르데샤는 그의 어깨를 툭 치며 빈정거렸다.
‘네 계획, 뭔지는 몰라도 실패한 것 같더라.’
일전에 르데인은 유디트의 코를 납작하게 눌러 주겠다며 포부를 밝힌 바가 있었다.
아무래도 그 계획 중 일부는 유디트가 운영하는 회계학 보충반에 참여하는 것이었겠지.
물론 결론만 봤을 때 르데인은 보충반 인원으로 받아들여지는 데 성공하긴 했다.
하지만 그러기 위해 하염없이 매달리고 끝내는 눈물까지 비치지 않았는가.
콧대를 눌러 주겠다는 녀석이 오히려 자존심을 내다 버리다니.
세운 계획이 무엇이든 간에 이미 절반은 실패한 거나 다름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때문에 이를 지적하면 르데인도 부끄러워하며 분한 표정을 지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는 생각보다 아무렇지 않아 보였다.
‘실패라니? 아직 시작도 하지 않았는데.’
‘그게 무슨 말이야.’
르데샤는 자신의 동생이 실패했다는 사실을 인정하기 싫어서 뻗대는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르데인은 뻔뻔한 낯짝으로 황당한 말을 내뱉었다.
‘나는 앞으로 그 평민을 유혹할 거니까.’
‘……뭐라고?’
분명 두 귀로 똑똑히 들었음에도, 그 의미가 잘 이해되지 않았다.
어렸을 때부터 천재라는 수식어가 따라붙곤 했던 르데인은 범상치 않은 두뇌를 가져 범상치 않은 행동을 한다는 평가를 받곤 했다.
하지만 방금의 말은 범상치 않은 걸 넘어서 어이가 없었다.
잠시의 침묵을 지킨 후에 르데샤는 최대한 고상하게 말했다.
‘너 제정신 맞니?’
최대한 고르고 고른 말이 그것이었다. 르데샤는 네 주제를 알라는 듯이 르데인을 발끝부터 머리까지 천천히 훑으며 말을 이었다.
‘네가 가당키나 해? 유디트의 소꿉친구는 아셀이고, 약혼자는 체이스야. 네가 눈에 들어올 리가 없잖아.’
객관적으로 봤을 때, 르데인 로지에나는 나쁜 외모는 아니었다.
사실 인정하긴 싫지만, 꽤 준수한 외모였다. 지나가던 사람들이 한 번쯤은 뒤돌아서 다시 볼 만한.
르데인의 실체를 아는 르데샤조차도 가끔 그가 잠든 모습을 보면 잘생기긴 했다고 감탄할 정도였으니까.
하지만 르데인이 감탄이 튀어나올 정도의 수려한 외모라면, 아셀과 체이스는 감탄조차 못 할 정도의 경이로운 외모였다.
감탄할 시간에 조금이라도 눈에 담아 놓는 게 우선이었으니까.
다른 건 몰라도 특히 체이스의 외모만큼은 인정해야만 했다.
유디트를 쫓아다니다 연무장에 들렀을 때 그를 감상하기 위해 모였던 학생들만 대체 몇 명이었던가.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르데인은 검지를 기분 나쁘게 까딱거리며 고개를 내저었다.
‘누나, 뭘 몰라도 너무 모르는구나? 세상엔 얼굴이 다가 아니거든. 여심을 녹이는 방법에 대해선 내가 더 잘 알고 있어.’
‘쯧, 저번에 그렇게 추하게 울어 놓고는 무슨. 이미 오만 정이 다 떨어졌을걸?’
혀를 내두르며 한 말에 르데인은 재수 없게 웃어 보였다.
‘그것도 다 계획하에 움직인 거야. 일부러 애처롭고 연약한 모습을 보여 줘서 보호 본능을 유발시키려는 거지.’
‘너 정말 가지가지 한다.’
그의 한심한 발언에 르데샤는 어처구니없다는 눈빛을 감출 수가 없었다.
‘그렇게 여심을 잘 안다는 녀석이 나한테는 왜 그렇게 싸가지가 없는데?’
‘당연한 걸 왜 물어? 누나는 여자가 아니니까.’
하긴, 르데인이 존댓말만 써도 온몸에 소름이 돋는데 유디트에게 하는 것처럼 제게 가식을 떨면 얼마나 고통스러울지 상상도 가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르데인이 통보하듯이 덧붙였다.
‘그러니까 누나는 가만히 있어, 내가 다 알아서 할 테니.’
그렇게 말하며 자신만만하게 돌아서는 제 동생을, 르데샤는 끝까지 어이없다는 눈초리로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 * *
첫 수업이 시작하기 직전의 복도는 늘 그렇듯이 어수선했다. 유디트는 사람들 사이를 비집고 리아나가 있을 교실로 향했다.
아마 지금쯤은 착석해 있을 테지.
리아나를 직접 만나러 가는 일은 그다지 내키지는 않지만, 싫은 일은 빨리 해치울수록 마음이 놓이기 마련이다.
그렇게 생각하며 유디트는 도착한 교실 안을 기웃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