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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 다정하지 마세요-30화 (30/110)

내게 다정하지 마세요 30화

다행히 그녀의 예상대로 리아나는 자신의 자리에 앉아 있었다. 이른 시간부터 사람들 틈에 둘러싸여 있어 찾는 것이 어렵진 않았다.

수많은 사람들 사이에서도 빛나는구나. 역시 아셀의 약혼녀다웠다.

아셀과 리아나가 잘 어울리는 한 쌍이라는 생각에 무심코 가슴이 욱신거렸다.

하지만 애써 그 사실을 외면하며 리아나에게로 다가갔다. 리아나는 평소 대화 한 번 나눠 본 적이 없던 유디트가 가까이 다가오자 의아했는지 고개를 갸웃거렸다.

“유디트? 무슨 할 말이라도 있어?”

유디트는 큼, 헛기침을 하고 준비해 온 말을 내뱉었다.

“다름이 아니라 회계학 보충반 관련해서 전달할 사항이 있어서 찾아왔어.”

“그래? 무슨 전달 사항인데?”

리아나는 그렇게 말하며 주변을 둘러싸고 있던 학생들에게 잠시 자리를 비워 달라는 듯이 손짓했다.

어느새 주위엔 리아나와 유디트, 둘밖에 남지 않았다.

단둘이 리아나와 얼굴을 마주하고 있자니 점점 손가락 끝이 저려 오는 것만 같았다. 하지만 유디트는 애써 침착함을 가장했다.

“일전에 보충반과 관련된 안내장 받았었지? 거기에 수업 시간이 잘못 쓰여 있었지 뭐야. 실제 수업 시간은 한 시간 뒤거든. 그래서 다음 수업 때는…….”

“아, 그걸 알려 주러 여기까지 찾아와 준 거구나?”

리아나는 유디트의 노고에 감사를 표하는 것처럼 무척 상냥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알려 줘서 고마워. 내가 그날 수업에 참석하지 않아서 네게 귀찮은 일을 늘려 버렸네.”

유디트가 괜찮다고 말하려는 찰나, 그녀가 안타깝다는 듯 말을 이었다.

“하지만 어쩌지? 앞으로도 보충 수업은 가지 않을 계획인데.”

“응?”

그녀의 말에 유디트가 눈을 휘둥그레 떴다.

혹시 보충반이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해서 참석하지 않으려는 건가?

그렇게 유디트가 혼자 이유를 추측할 무렵, 의외의 대답이 들려왔다.

“……사실 나는 유급이 목표거든.”

리아나가 어색한 미소를 지어 보이며 가방에서 회계학 쪽지 시험지를 꺼내 유디트의 앞에 내밀었다.

시선을 아래로 내리자, 꽤 높은 점수의 채점 결과가 눈에 띄었다,

이는 카렐 교수가 내는 쪽지 시험의 난이도를 고려해 봤을 때, 본시험을 봤어도 능히 좋은 점수를 받을 만한 성적이었다.

그럼 그렇지.

우등생으로 소문난 그녀가 보충반에 참여해야 할 정도로 회계학 시험에서 낮은 점수를 받다니, 말이 되지 않았다.

하지만 저런 실력을 가지고도 굳이 낮은 점수를 받아야 할 이유가 뭘까?

저도 모르게 궁금증이 든 유디트가 질문하고 말았다.

“이유를 물어봐도 될까?”

그에 리아나의 낯이 곤란하게 굳어졌다.

“으음…… 그게, 집안 사정이라 이유를 말해 주긴 어려워, 미안.”

그 사정이 무엇인지는 몰라도 꽤 곤란한 모양이다. 유디트는 궁금하긴 했지만 구태여 더 캐묻진 않았다.

곧 리아나가 양어깨를 으쓱이며 대화를 마무리했다.

“아무튼 그렇게 되어서 보충반에도 참가하지 않을 예정이야. 너한테는 미리 알려 주지 못해서 미안해.”

“아니야, 괜찮아.”

마지막까지 리아나는 친절하고 상냥했다.

왠지 모르게 가슴 한구석이 쓰려 왔지만 유디트는 묵묵히 뒤돌아 기숙사로 걸음을 옮겼다.

* * *

직접 만난 리아나는 예상과는 달랐다.

그녀처럼 모든 걸 다 가진 듯한 애도 깊은 고민이 있었다니.

집안 사정 때문에 유급까지 해야 할 정도라면, 대체 어떤 사연인 걸까.

궁금하긴 했으나 이내 유디트는 고개를 저었다.

아무려면 어떤가. 어쨌건 자신은 보충 수업에서 그녀와 더는 마주치지 않아도 된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문득 고개를 드니 자신처럼 기숙사로 돌아가려는 사람들과 멈춰 서서 수다를 떠는 사람들로 복도가 무척 어수선한 것이 보였다.

곧이어 그 가득한 소란을 뚫고 누가 큰소리로 자신의 이름을 불러왔다.

“유디트 선배님!”

익숙한 주황색 머리카락의 주인이 인파를 뚫고 주인을 만난 강아지처럼 신나게 달려왔다.

“르데인.”

친구들과 같이 얘기를 나누다 자신을 발견하고 황급히 달려온 것 같았다.

“마침 잘됐네요. 선배님께 여쭤보고 싶은 문제가 있었는데……. 아, 혹시 오늘은 바쁘실까요?”

또 눈썹을 늘어뜨린 채 강아지처럼 자신을 쳐다본다. 마치 보충반 수업에 넣어 달라고 애원할 때와 똑같은 표정.

첫 수업에서는 세드릭 때문에 너무 경황이 없어서 따져 물을 생각을 못 했는데, 지금 이 모습을 보니 카렐 교수님과 나눴던 말씀이 떠올랐다.

“흐음, 거참 이상하구나. 1학년 수석이 그런 말을 하다니.”

“수석이요?”

“그래. 질문을 던질 때마다 준비해 온 것처럼 대답도 잘하던데 말이다.”

수업 진도를 따라가기 버겁다며 회계학 보충반으로 받아 달라고 했던 르데인의 주장과는 상반된 말이었다.

게다가 카렐 교수님의 예리한 질문에도 막힘없이 대답할 정도면 기초 지식만을 가르치는 보충반은 더더욱 도움이 안 되지 않나.

유디트가 고개를 갸웃하며 대답했다.

“글쎄, 바쁘진 않지만…… 굳이 내 도움이 필요하니?”

“물론이죠. 지난번 수업도 얼마나 이해가 잘 되었는데요. 선배님은 저희 누나랑 다르게 가르침에 소질이 있으신 것 같아요!”

그의 반짝이는 눈망울에 유디트는 곧 의심을 굳혔다.

“르데인, 사실 나 네가 1학년 수석이라는 말을 들었는데…….”

“수석은 맞아요.”

“응?”

예상외로 순순히 나온 대답에 유디트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전 모습만 봐선 분명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부인할 거라 생각했는데 말이다.

“하지만 네가 저번에는 수업을 따라가기도 힘들다고 그랬었잖아?”

“네, 그것도 맞아요. 요즘따라 수업을 따라가기 힘들어서, 이러다간 수석 자리를 놓치게 될까 봐 두려웠거든요.”

“……그래?”

르데인의 대답을 들었지만, 의혹은 여전히 남아 있었다. 풀리지 않는 의문에 유디트는 두 눈을 가늘게 떴다.

“하지만 교수님 말씀으로는 네가 질문에 대답도 잘한다고 그러던데. 그 정도 수준이면 보충반 수업은 필요 없지 않겠니?”

“아, 그건.”

잠시 르데인이 멈칫했다. 눈을 도르르 굴리더니 입술을 열었다.

“그건…… 지금까지는 운이 좋아 용케 대답할 수 있었어요. 하지만 다음번에도 그러리란 보장은…….”

르데인이 슬그머니 고개를 오른쪽으로 돌렸다. 그러더니 우수에 찬 눈빛으로 창밖 어딘가를 바라보기 시작했다.

“사실 저는 가문에서 매번 누나와 비교당했거든요. 누나는 어렸을 때부터 하나를 알려 주면 열을 알 정도로 명석했어요.”

“그랬구나.”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유디트는 난처해졌다.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몰라 손가락만 꿈질거렸다.

갑자기 이런 이야기는 왜 하는 거지?

얼떨결에 듣게 되어 버린 르데인의 가정사.

사실 궁금하지도, 별로 알고 싶지도 않았다. 괜히 이런 걸 들었다간 오히려 르데인과 깊숙이 엮일 것만 같아서.

하지만 심각한 얼굴로 사정을 털어놓는 사람을 그냥 두고 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속에서 터져 나오려는 한숨을 삼키는 동안에도 르데인의 이야기는 계속되었다.

“뛰어난 누나에 비해 저는 너무나 부족함이 많은 사람이라 늘 불안해요. 내가 지금 잘하고 있는 걸까, 이렇게 하는 게 맞는 걸까. 스스로에 대한 의심으로 가끔은 잠들기 전에 눈물이 나기도 하고요.”

“…….”

“이런 나약한 모습을 보이면 가족들이 실망하겠죠. 그래서 저는 누구에게 털어놓을 사람도 없고, 혼자 속으로만 삭이던 게 전부였어요.”

유디트는 아련하게 창밖을 응시하는 르데인의 옆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러고 보니 르데인의 뺨이 조금 야윈 것 같기도 했다.

혼자 마음고생한 흔적일까?

하지만 어떻게 위로해 줘야 할까. 아니, 그전에 자신이 위로한다고 해서 과연 르데인에게 도움이 될까.

여러가지를 생각하고 있는데 돌연 창밖을 보던 그가 시선을 돌렸다. 그리곤 유디트와 눈을 맞추며 살포시 웃어 보였다.

“하지만 이젠 다행이에요. 선배님께 회계학을 배울 수 있어서. 마음의 짐을 하나 내려놓은 것 같아요.”

그 말에 유디트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입을 꾹 다물었다. 가슴에 커다란 돌덩이가 얹힌 것처럼 부담스러웠다.

유디트는 올망졸망한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르데인의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음, 그 정돈 아니야. 물론 열심히 알려 주긴 할거지만 보충반 수업은 기초 개념을 가르치는 것에 가까워서 네게 큰 도움이 되지 않을 수 있어. 이러니저러니 해도 너는 1학년 수석이잖아?”

어떻게든 부담감을 떨쳐 내기 위해 한 말이었는데, 르데인은 고개를 젓더니 부드럽게 웃었다.

“아니에요. 기초를 다지는 게 얼마나 큰 도움이 되는데요. 선배님 덕분에 이제 밤에 잠을 설치지 않을 것 같아요. 미리 감사드려요.”

“…….”

괜한 말로 부담감만 더욱 가중되었다.

아무래도 르데인을 괜히 보충반에 받아들여 준 것 같다.

유디트는 지난날의 자신을 속으로 매우 탓했다.

* * *

프로이센 아카데미는 여타 아카데미와 차별점이 하나 있다. 바로 한 달에 한 번씩 부 활동 시간을 가진다는 것.

매달 마지막 주의 금요일 오후, 단 3시간 동안 진행되는 부 활동 시간에는 학업에서 벗어나 학생들 각자의 관심사와 관련된 활동에 참가할 수 있었다.

그리고 유디트는 다양한 부서들 중에서도 독서부에 속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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