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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 다정하지 마세요-31화 (31/110)

내게 다정하지 마세요 31화

그 이유는 간단했다.

독서부는 다른 부들과 달랐다. 학기마다 한 번씩 열리는 발표 자리에 공연이며 전시회며 귀찮은 일들을 하지 않아도 되었기 때문이다.

그저 매시간 책 한 권을 선정해 읽은 소감과 자신의 의견을 발표하는 게 전부였다. 그리고 나머지는 자율적으로 독서하며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그렇기에 유디트는 신입생이었을 때부터 지금까지 독서부원으로 활동하며 공부도 해 왔다.

아셀도 유디트를 따라서 독서부로 활동 중이었다. 하지만 학생회장인 그는 이 시간에는 부 활동에 참여하는 대신 간부 회의를 하곤 했다.

그렇잖아도 곧 열릴 아카데미의 각종 행사들이며 학생들의 복지를 살펴야 해서 무척 바빴기 때문이다.

그러니 같은 부 시간이라도 아셀과 만날 일은 없다고 생각하며, 유디트는 태연하게 자리에 앉았다.

오늘 감상을 발표할 책은 포아튼의 4대 비극이였다. 과거 포아튼 제국에서 일어났던 4개의 비극적인 사건에 관해 엮은 책이었다.

미리 읽긴 했지만, 전체적으로 다시 훑어볼 요량으로 유디트는 책을 읽기 시작했다.

“유디트.”

순간 바쁘게 책장을 넘기던 손이 멈췄다.

귓가에 박히는 목소리. 그건 익숙하지만 절대 지금 들려서는 안 되는 음성이었다.

유디트가 굳어 있는 와중에도 익숙한 목소리는 계속 울려 퍼졌다.

“데이지, 베이슨, 루크. 모두 안녕. 오랜만이네.”

“아셀!”

오랜만에 모습을 내비친 아셀에 부원들은 환호했다.

“어떻게 참석한 거야? 학생회 일로 바쁠 텐데.”

“졸업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까. 어쩌면 마지막 부 활동일지도 모르는데 참석해야지.”

아셀은 자연스럽게 유디트의 옆자리에 앉으며 이어 말했다.

“보고 싶기도 했고.”

“와, 우리를 보러 참여해 준 거라고? 이거 영광인데?”

정신 차려. 유디트는 그의 난데없는 등장으로 흐트러졌던 자세를 다시 바로 했다.

책에 집중한 척 시선을 거기에만 두었다.

그러는 와중에도 아셀은 살갑게 웃으며 부원들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요즘 학생회에서 여름 파티 준비하고 있다는데 그건 잘 돼 가?”

“응, 파티 홀을 리모델링하기로 해서 작년보다 더 화려해질 거야.”

다행히 아셀은 이전에 잠시 거리를 두자고 했던 자신의 말을 기억하는지 유디트에게 더 말을 붙이는 일은 없었다.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그때, 데이지가 유디트의 어깨에 팔을 둘렀다.

왜 이러는 거지?

아마도 그녀는 유디트 혼자 대화에 소외되어 있다고 생각했는지, 달갑지 않은 친절을 베풀려는 모양이었다.

“그나저나 유디트는 오늘따라 왜 이렇게 말이 없어?”

“……응?”

유디트는 원래 조용했다. 대화를 주도하는 편보단 항상 가만히 듣고 있는 편이었으니까.

하지만 갑자기 유디트에게 말을 건네는 데이지로 인해 부원들의 시선이 그녀에게로 집중되었다.

그때 루크가 아, 하더니 조금 짓궂게 웃었다.

“왜, 설마 아셀이 오니까 말을 안 하는 거야? 설마 그 소문이 사실은 아니지?”

“무슨 소문?”

“누가 아셀이랑 유디트가 크게 싸우는 걸 봤다던데.”

유디트는 숨을 멈췄다.

“하하, 무슨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문이 다 있어? 웃기다. 그치, 유디트?”

데이지가 크게 웃었지만, 유디트는 웃을 수 없었다. 그녀는 재빨리 책을 들어 올려 어정쩡하게 굳어진 얼굴을 가렸다.

무슨 소문이 이렇게 빨리…….

하기야, 아셀은 교내 유명 인사였으니 무슨 소식이든 빨리 퍼지는 것도 무리는 아닐 것이다.

옆에서 베이슨의 놀란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런 소문이 있었어? 나는 전혀 몰랐는데.”

“누가 퍼트렸는지는 몰라도 정말 악의적인 소문이다. 안 그래?”

“……그러네.”

유디트는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답했다. 아셀도 거들어 주었다.

“그래, 악의적이네.”

“맞지? 하긴 믿는 애들도 없더라.”

유디트가 긴장했던 것이 무색하게 소문은 시시한 거짓으로 판명되었다.

만약 유디트와 아셀이 싸웠더라면 아셀이 태연하게 독서부에 참석할 리는 없었을 테니까 말이다.

곧 아셀의 발표가 시작되었다. 그의 듣기 좋은 나직한 목소리가 공간을 빼곡하게 채웠다.

“포아튼의 4대 비극이 시사하는 바는…….”

그는 침착하게 말을 하면서 부원들 하나하나에게 눈을 맞추었다. 거기에는 당연히 유디트도 포함되었다.

동공이 떨리는 유디트와 달리 그는 아무렇지 않게 시선을 마무리했다. 철저히 사무적인 태도였다.

이래서야 누가 거리를 두자고 말한 건지 모르겠다고 생각하며 유디트는 눈을 내리깔았다.

* * *

모든 발표가 마무리되었다. 잠시 휴식 시간을 보낸 뒤엔 자율 독서 시간이 시작될 테니, 더는 아셀과 나란히 앉아 있을 필요가 없었다.

“유디트, 잠깐만.”

기다렸다는 듯이 도서관을 나가려는 유디트를 아셀이 붙잡았다.

“잠시 할 말이 있어.”

유디트는 붙잡힌 팔을 내려다보다가 주위를 쓱 둘러보았다.

아직 부원들이 도서관에서 빠져나가지 않았다. 보는 눈들이 많았기 때문에 아셀을 무시할 순 없었다.

“뭔데?”

“별건 아니고 집안 행사 때문에 다음 주말에 저택에 들를 생각이거든.”

설마, 했지만 이어지는 아셀의 말은 사무적인 용건에서 크게 빗나가지 않았다.

“혹시 너도 시간이 된다면 함께 어머니께 인사드리러 가는 게 어때?”

아셀은 유디트의 입에서 부정적인 답변이 나올 거란 걸 느꼈는지 황급히 말을 덧붙였다.

“물론 여러모로 그럴 상황이 아니란 건 알지만…… 어머니는 네 소식을 궁금해하실 테니까.”

“근황 편지는 보내 드리고 있어.”

사실이었다. 유디트는 체이스와 약혼이 성사된 뒤에도 꼬박꼬박 페델리안 부인에게 보고하듯 편지를 보내고 있었다.

부인이 바라는 대로 아셀과 순조로이 멀어져, 약혼도 깨질 일 없이 무사히 이루어질 거란 걸 증명해 주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유디트의 말을 들은 뒤에도 아셀은 근심 어린 낯을 했다.

“하지만…… 아무리 편지를 받았다곤 해도 네가 갑작스럽게 약혼을 했는데 걱정이 되지 않으실 리가 없잖아.”

그 말을 들은 유디트는 속으로 피식 웃었다. 애초에 부인이 자신에게 제안한 일인데 걱정하고 계실 리가.

그러나 솔직하게 털어놓을 순 없었기에 유디트는 건성으로 답했다.

“만약 걱정하시더래도 네가 가서 잘 말씀드리는 것으로 충분할 거야. 내가 잘 지내고 있다고 말 좀 전해 줘.”

그러자 아셀의 두 눈이 크게 뜨였다. 사실 그로서는 당연한 반응이었다.

지금까지 유디트는 페델리안 부인의 말이라면 친아들인 아셀보다 더 잘 따르곤 했었으니까.

원래라면 먼저 저택에 방문하자고 나선 것도 유디트였을 것이다.

고작해야 고용인에 딸에 불과한 자신에게, 페델리안 부인이 그간 어떤 친절을 베풀었는지 자신이 모를 리가 있겠는가.

하지만 상황을 모르는 아셀은 자신의 이런 변화가 꽤 놀랍게 느껴질 것이 분명했다.

유디트는 다시 조심스레 주위를 둘러보았다. 휴식 시간이 되자 모두 뿔뿔이 흩어져서 도서관 내부가 금세 한산해졌다.

더는 아셀의 말을 가만히 듣고 있어 줄 필요가 없어졌기에 유디트는 그를 뒤로한 채 발걸음을 옮기려 했다.

그런데 등 뒤에서 아셀이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읊조렸다.

“어머니와의 만남을 거부할 만큼 나와 함께 있는 게 싫어졌어?”

“뭐?”

무시하고 가야 하는데,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아니야?”

뒤에서 뚜벅뚜벅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어느새 다가온 아셀이 떠나려는 유디트의 앞을 가로막았다.

“나랑 있는 게 싫은 게 아닌 거면…… 어머니랑 있는 게 싫은 건가?”

“…….”

최근에 안 사실이지만, 아셀은 은근히 눈치가 빨랐다. 그래서 곧잘 순진한 얼굴로 정곡을 찔러 오곤 했다.

유디트는 당황한 속내를 들키지 않으려 노력하며 침착하게 대꾸했다.

“내가 공작 부인을 싫어할 리가 없잖아. 아카데미에 다닐 수 있도록 후원해 주신 은인인데.”

그렇게 말한 유디트는 앞에 서 있는 아셀을 옆으로 밀어내려고 했다. 하지만 아셀은 꿋꿋이 버티며 제 할 말만 내뱉었다.

“그럼 역시 내가 문제라는 거네.”

“…….”

스스로 결론을 내리듯 한 말이었다. 유디트가 난처한 얼굴로 그를 올려다보았지만, 아니라는 대답은 할 수 없었다.

아셀은 오묘한 눈길로 잠시 유디트의 얼굴을 내려다보다가, 이내 빙긋 웃으며 입술을 뗐다.

“베이슨, 들었지?”

“……?”

이미 베이슨을 포함한 모든 부원이 휴식을 취하러 도서관에서 나간 참이 아니었나? 그런데 갑자기 베이슨을 부르다니?

하지만 놀랍게도 가려진 책장 뒤에서 베이슨이 주춤주춤 걸어 나왔다.

마치 지금까지 아셀과 나눈 대화를 모두 엿들은 것처럼 말이다.

이해할 수 없는 베이슨의 행동에 유디트는 혼란스러워졌다. 하지만 뒤이어진 대화에서 유디트의 혼란은 더욱 가중되었다.

“사실은 네가 낸 거지? 나와 유디트가 싸웠다는 소문 말이야.”

“아, 저 그게…….”

아셀의 말에 베이슨이 입술을 질끈 깨물더니, 뭐라 변명할 상황이 아니라고 생각했는지 곧 고개를 푹 숙였다.

“미, 미안해…….”

유디트는 그만 아연해지고 말았다.

아까는 그런 소문이 있었는지도 모른다고 했던 베이슨이 사실 소문을 낸 당사자였다니, 그리고 아셀이 그걸 파악하고 있었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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