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게 다정하지 마세요 32화
얼굴이 벌게진 채 어쩔 줄 몰라 하는 베이슨을 향해 아셀은 부드러운 어조로 말했다.
“괜찮아. 나는 네가 소문을 퍼트린 것에 대해서 뭐라고 하는 게 아니니까.”
“……어, 어?”
베이슨이 얼빵한 얼굴로 되물었다.
“그게 무슨……?”
“방금 봤잖아. 우린 서로 싸운 게 아니라.”
베이슨에게 하는 말이었지만 아셀의 시선은 유디트에게로 향했다.
“내가 일방적으로 유디트에게 매달리는 거니까 거짓된 소문은 퍼트리지 말아 줬으면 좋겠어.”
“아, 알겠어!”
사색이 된 베이슨이 대답했다.
그 말과 동시에 도망치듯 도서관에서 빠져나가는 모습을 보니 앞으로 아셀에 대해서는 절대 입도 벙긋 못 할 것처럼 보였지만 말이다.
쾅.
갑자기 벌어진 상황에 아직도 어안이 벙벙했던 유디트는 굳게 닫힌 도서관 문만 바라보고 있었다.
아셀은 상황을 정리하듯 말했다.
“유디트, 어쨌건 네 뜻은 이해했어. 더 이상 귀찮게 하는 일은 없을 테니 안심해.”
“…….”
“본가에는 나 혼자 돌아가는 걸로 할게.”
그는 애써 괜찮은 듯 웃어 보였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아직도 마음이 따끔거리면서 묘한 죄책감이 들었다.
하지만 유디트는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 * *
르데인 로지에나에게는 언제나 세상이 간단하고 쉬웠다.
하나를 가르쳐 주면 열을 아는 천재. 그것이 르데인을 수식하는 단어였다.
그는 남들이 어렵다고 하는 난제를 척척 풀어냈고, 아카데미 입학도 전에 가문에서 붙여 준 학자들이 더 가르칠 것이 없다며 혀를 내두르기도 했다.
그러니까 평민 하나 유혹하는 것쯤은 별것도 아니지.
이론을 실전에 적용하기. 그것은 르데인이 가장 잘하는 분야였다. 특히 르데인은 한 번 배운 공식이라면 어떤 문제에든 잘 써먹곤 했다.
하지만 생각보다 유디트는 자신에게 이렇다 할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아니, 관심은커녕 보충반 수업에 참여하려는 제 의도를 수상하게 느끼고 의심하기까지 했다.
수석임에도 왜 보충반에 참석하려 했냐며 추궁하기까지 했으니까 말이다.
어찌저찌 잘 둘러대긴 했지만 과연 호락호락한 상대는 아니라는 것이 느껴졌다.
어쩔 수 없이 르데인은 더욱 철저하게 유디트를 공략하기 위해 제 하나뿐인 누나에게 도움을 받기로 했다.
그는 노크도 없이 자습실 문을 열어젖혔다.
휴일이라 그런지 내부는 텅텅 비어 있었다. 넓은 책상을 혼자 쓰며 필기를 하고 있던 르데샤가 발걸음 소리가 들리자마자 번뜩 고개를 들었다.
동시에 르데인을 발견한 그녀의 미간이 구겨졌다.
“누나, 나 궁금한 것 좀 물어봐도 돼?”
“……넌 갑자기 찾아와선 인사도 없이 네 할 말부터 하니? 버릇없이.”
기가 막힌다는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는 누나를 무시하며 르데인이 맞은편 자리에 앉았다.
“어차피 누나 입장에서도 내가 용건만 간단하게 하고 나가 주는 게 더 좋은 거 아니겠어?”
“말이나 못 하면 밉지나 않지.”
르데샤는 어이없다는 듯 중얼거렸다.
르데인이 찾아온 이상 공부하기엔 글렀다고 생각하는지 한숨을 쉬며 손에 들고 있던 펜을 내려놓았다.
그녀가 못마땅하다는 기색을 숨기지 않으며 물었다.
“그래서 왜 왔는데?”
그렇게 물으면서도 르데샤는 내심, 가문에서 무언가 중요한 전갈이 도착해 르데인이 알려 주러 온 것이리라 예상했다.
하지만 그녀의 추측은 크게 빗나갔다.
“그 평민이 좋아하는 것과 싫어하는 것 좀 알려 줘 봐.”
“뭐?”
“구체적이면 구체적일수록 좋아. 아니면 취미는 있는지, 생일은 언제인지, 수업이 끝난 후에는 뭘 하면서 시간을 보내는지 등등 말이야.”
르데샤는 금붕어처럼 입만 벙긋거렸다.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제 동생을 쳐다보았다.
르데샤의 오묘한 눈길을 받은 르데인은 기분 나쁘다는 듯이 미간을 구겼다.
“누나, 왜 나를 그렇게 이상한 눈초리로 보는 거야?”
“네가 이상한 짓을 하니까 이상한 눈초리로 볼 수밖에.”
르데샤는 목이 메말라 와 침을 꿀꺽 삼켰다.
“너 갑자기 찾아와서 왜 그런 걸 물어봐? 그게 궁금한 거야? 그것 때문에 내 방까지 찾아온 거라고?”
“그래.”
르데인이 한 질문들은 언뜻 들으면 유디트에게 호감이 있어서 한 것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평민들을 하찮게 보는 르데인이 유디트를 좋아할 리가 없었다.
그럼 왜 이런 질문들을 하는 거지?
잠시 뭔가를 생각하듯 입을 다물고 있던 르데샤는 혹시나 해 입을 열었다.
“너 설마 아직도 그 허무맹랑한 계획 안 버렸니?”
유디트를 유혹할 거라고 했었던 얼토당토않은 계획.
설마 그 괴상한 계획을 르데인이 아직 철회하지 않아서 이런 이상한 질문을 하는 건가 싶었다.
하지만 르데인은 뭐 문제가 있냐는 듯이 태연자약하게 팔짱을 꼈다.
“내가 그 계획을 왜 버려?”
“너 진짜…….”
정신이 나갔니? 라며 크게 면박을 주려 했는데 르데인이 재빠르게 말을 가로막았다.
“내가 생각해 낸 실천 가능한 계획 중에 그 방법이 가장 효율적인데 굳이 하지 않을 필요는 없잖아.”
대체 무슨 계획들을 세웠길래 가장 효율적이라고 자신하는 건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다른 건 몰라도 르데인의 명석한 두뇌만은 인정하던 르데샤였는데, 이번에는 그저 어처구니가 없을 뿐이었다.
혹시 르데인은 자신은 이해하지 못하는 몇 수 앞을 혼자 내다보고 있는 걸까? 그래서 저렇게 자신만만해하는 걸까?
차라리 그런 거라면 좋겠다. 르데샤는 지금 그가 하는 짓거리에 공감성 수치사를 당하기 직전이었으니까 말이다.
뭔지는 몰라도 제발 자신에게만은 피해 주지 말고 혼자만 창피를 당하길.
르데샤는 그렇게 속으로 간절히 염원했다.
“애초에 유디트를 유혹해서 뭘 하겠다는 건데?”
“누나, 그걸 일일이 설명해 줘야 알아? 정말이지 귀찮아 죽겠네.”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면서도, 르데인은 순순히 대답해 주었다.
“나는 그 평민을 유혹해서, 나를 사랑하게 할 거야.”
“…….”
“사랑에 빠진 그 평민은 온종일 내 생각을 하느라 공부는 뒷전이겠지. 그러면 누나가 자연스럽게 수석 자리를 차지할 수 있을 거야.”
예상은 했지만 대답을 듣고 나니 너무 기가 차서 헛웃음조차 나오지 않을 지경이었다.
아니면 르데인이 늘 성공만 해 와서 그런 걸까. 그래서 자신이 실패할 거란 가능성은 아예 고려조차 하지 못하는 걸까.
제 동생의 주황색 눈동자에는 여유가 가득 차 있었다.
르데샤는 그 모습이 무척 재수 없다고 느끼며 입을 열었다.
“몰라.”
“그러지 말고 한 번만 대답해 줘봐. 귀찮게 안 할 테니까.”
“진짜야. 정말 몰라. 유디트가 뭘 좋아하는지는.”
르데샤의 대답에 르데인은 또 건방지게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누나, 관찰력이 그렇게 없어?”
“그런 게 아니야. 유디트는 만만한 애가 아니거든. 은근히 빈틈을 보이지 않아.”
사실, 르데샤도 일전에 한번 유디트에게 의도적으로 접근했던 적이 있었다.
그때 르데샤는 유디트를 몰래 지켜보며 그녀가 무엇을 좋아하고 싫어하는지 알아내려고 했지만 이내 좌절되고 말았다.
유디트는 언제나 칼같이 수업을 듣고 칼같이 기숙사로 돌아갔으니까.
하지만 르데인은 무시하는 어투로 말했다.
“그래 봤자지.”
“너 그러다 큰코다친다.”
나름대로 경고해 준 거였는데, 르데인은 들은 체도 하지 않았다. 벌러덩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대더니 제 할 말만 해 대기 바빴다.
“그나저나 누나, 오늘 카페테리아에서의 내 작전 어땠어?”
잠시 기억을 되짚던 르데샤는 미간을 와락 구겼다.
“아, 내 분통을 터뜨려서 죽이려던 그 작전 말하는 거지?”
능청맞게 푸딩을 먹여 주는 등 가식을 떨던 르데인의 기막힌 행동들이 떠올랐다.
생전 하지도 않던 행동들을 자꾸 해 대니 식사가 끝났을 무렵에는 거의 먹은 게 다 얹힐 지경이었다.
“잘해 주려면 유디트에게나 잘해 주지 왜 나한테 그래? 징그럽게.”
“쯧, 누나는 정말 뭘 몰라도 너무 모른다니까.”
르데인은 한 수 가르쳐 준다는 식으로 시건방지게 내뱉었다.
“아직 서로 알게 된 지 얼마 안 됐는데 벌써 호감을 보이면 너무 쉽잖아.”
“이미 보였잖아?”
존경하고 있다면서, 회계학 보충반으로 받아 달라며 꼴값은 있는 대로 다 떨었으면서.
그때를 회상하자 르데샤는 온몸에 소름이 오소소 돋았다.
하지만 르데인은 검지를 까딱거렸다.
“그건 사람 대 사람으로서의 호감이었고, 내가 지금 말하는 건 이성으로서의 호감이야. 그런 감정으로 발전하려면 적어도 누나와 친한 척이라도 해서 곁에 계속 붙어 있어야지.”
르데샤는 르데인이 정말 가지가지 한다고 생각했다. 아무래도 유디트는 르데인에게 승부욕 비슷한 것을 생기게 했나 보다.
르데인의 포기를 모르는 성격이 이럴 때 발동되다니…….
“유디트는 약혼자도 있어. 체이스가 널 가만히 둘 것 같니?”
평생 방 안에 틀어박혀 공부만 한 제 동생은 체이스 손짓 한 번에 힘없이 날아갈 게 분명했다. 그러나 르데인은 기가 전혀 죽지 않은 채 어깨를 으쓱했다.
“거추장스러운 평민을 옆에서 치워 주면 오히려 내게 고마워하겠지. 진심으로 서로 사랑해서 약혼한 사이도 아닐 거 아니야.”
말문이 턱 막힌 르데샤에게 르데인이 곧 옆에 놓인 노트 하나를 제 앞으로 끌어당기며 말했다.
“아무튼 알겠지? 그러기 위해선 누나가 날 도와줘야 해.”
곧이어 그가 빈 페이지를 펼쳐 보이며 르데샤의 앞에 내밀었다.
“사소한 거라도 좋으니 그 평민의 일과는 어떤지 쭉 적어 봐.”
그렇게 말하는 르데인의 눈에는, 정말로 그 평민을 꼬시고 말겠다는 의지가 활활 불타오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