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게 다정하지 마세요 33화
* * *
르데인은 다른 무엇보다도, 우선 그 평민과 같이 있는 시간을 확보하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물론 보충반에서도 매번 만나고는 있다지만 그땐 귀찮은 떨거지들도 함께라 이것저것 시도할 겨를이 없었다.
르데인은 유디트의 옆에서 자신의 계획을 방해하는 걸림돌들을 떠올렸다.
사실 가장 큰 걸림돌은 생각해 볼 필요도 없이 체이스 카르단디였다.
구두로 약혼을 마쳤다고는 하나 정식으로 식을 치른 것도 아닌데, 벌써 결혼한 사이라도 된 양 날을 세웠으니까.
르데인은 재빨리 머리를 굴렸다.
그렇다면 과연 체이스 카르단디의 진짜 속내가 뭘까.
유디트에게는 전혀 관심 없다고 잡아떼면서도 그는 그녀의 일거수일투족을 신경 쓰고 챙기려 들었다.
아무래도 유디트가 약혼 상대로서 꼭 필요하기 때문에?
그러잖아도 르데인은 유디트가 그의 약혼녀가 된 이후로 체이스를 귀찮게 하는 학생들이 확 줄었다는 소식을 접한 바가 있었다.
그래서 대외적으로 약혼자와 친근한 모습을 보여 주기 위해 그런 행동들을 하는 걸지도 모른다.
그러니 자신은 유디트를 회계학 수석 자리에서 끌어내리는 것에만 집중하면 되지 않을까.
빠른 발걸음으로 도서관에 도착한 르데인은 곧 얼굴에 온순한 미소를 걸쳤다.
제 누나가 알려 준 대로라면 지금쯤 유디트는 이곳에서 부 활동에 참여하고 있을 것이다.
“독서부 참관하러 왔는데요.”
갑자기 들려오는 부드러운 미성에 거대한 책 무덤에 둘러싸여 뭔가를 열심히 끄적거리며 적고 있던 사서가 고개를 들었다.
지푸라기 같은 머리칼이 걷히고 드러난 눈가에는 어두운 그림자가 져 있었다.
피곤한 기색이 역력한 사서는 르데인을 빤히 쳐다보았다.
“참관? 지금은 부 박람회 기간도 아닌데 말이니?”
매 학기 초에 열리는 부 박람회 기간에는 타 부서를 참관할 수 있었다.
학생들이 관심이 있는 부를 탐방하며 어떤 활동을 하는지 직접 보고 체험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사서의 말대로 부 박람회 기간도 아니었다. 그러나 르데인은 뻔뻔하게 입을 열었다.
“독서부에 관심이 있어서요.”
사실 정확히 말하면 독서부에 속한 어느 사람에게 관심이 있는 거였지만 말이다.
“저는 원래 신비로운 약초부에 속해 있었는데, 제 성격이랑 너무 맞지 않아요.”
르데인은 어깨를 축 늘어뜨리며 침울하게 중얼거렸다.
“약초도 하나의 생명이잖아요? 저 때문에 괜히 그 생명들이 생을 다한다 생각하니까 괴로워서 말이에요.”
물론 르데인은 단 한 번도 그런 생각을 한 적이 없다. 그저 약초를 뽑을 때마다 손에 흙이 묻어나는 것이 거슬린다고만 생각했을 뿐.
그러나 사서는 울상을 한 르데인이 못내 가엾게 느껴졌는지 신음을 흘렸다.
“음, 그래도 이걸 어쩌지? 지금은 참관 기간도 아니고, 이미 부 신청 기간은 끝났는데.”
“담당 부장의 허락은 맡았어요. 제가 매번 힘들어하는 걸 옆에서 지켜보셨거든요.”
사서의 눈동자가 흔들리는 것을 포착한 르데인은 쐐기를 박았다.
“가끔은 환청도 들려요. 뿌리를 뽑힌 약초들의 고통스러운 비명 소리가…….”
르데인은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지금도 들리는 것 같아요!” 하고 소리를 질렀다. 그러자 사서는 깜짝 놀라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약초는커녕 인기척도 없다는 것을 확인한 후에 사서는 가슴을 쓸어내렸다.
“우선 진정해. 으음, 그렇게까지 맞지 않는 부서에서 계속 활동할 수는 없겠지.”
결국 사서는 르데인을 도서관 안으로 들여보내 주었다.
“자, 들어가렴. 다들 한참 책에 빠져 있을 시간이니까 조용히 하도록 하고.”
사서는 교복을 단정하게 입고 유순한 눈매를 한 르데인이 설마 부 시간에 무단으로 이탈했을 거라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
르데인은 시꺼먼 속내를 숨긴 채로 감사합니다, 하고 꾸벅 인사하며 도서관 안으로 들어갔다.
하지만 그날, 르데인은 유디트를 만날 수 없었다.
도서관 내부를 몇 바퀴나 빙빙 돌았지만, 분홍색 머리카락의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책은 읽지도 않고 서성거리기만 하는 그를 학생들은 이상한 눈초리로 쳐다보았다.
대체 그 여자가 어디로 갔을까? 설마 자신처럼 부 시간에 무단으로 이탈이라도 한 것일까?
이유는 정확히 모르겠지만, 첫 시도부터 어긋났다는 생각에 르데인이 분한 듯 입술을 깨물었다.
* * *
벌써 휴식 시간이 끝났다.
다시 도서관으로 돌아가야 했지만, 유디트는 그러고 싶지 않았다. 그러다 또 아셀 페델리안과 마주치게 될까 봐 겁이 났던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달리 갈 곳도 없었던 유디트는 바깥에서 한참을 서성였다.
유일한 친구인 한나는 지금쯤 요리부에 있을 테니 기숙사로 돌아간다 한들 만날 수 없을 것이다.
아마 지금쯤 신나게 쿠키 반죽이나 주물럭거리고 있지 않을까.
딱히 갈 곳도, 반겨 줄 사람도 없다는 사실에 유디트는 기분이 울적해졌다.
그에 무심코 유디트는 아셀과 자신을 비교하고 말았다. 그는 다른 누군가를 찾기도 전에 언제나 사람들 틈에 둘러싸여 있곤 했는데.
정말이지 자신과는 하늘과 땅 차이였다.
따가울 정도로 쏟아지는 햇살을 피해 유디트는 정처 없이 발걸음을 옮겼다.
이름 모를 새들이 높이 날며 지저귀는 소리가 들렸다.
잘 가꾸어진 정원은 녹색의 생명력을 머금은 듯이 아름답고 싱그러웠지만, 정작 유디트의 눈에는 아무것도 들어오지 않았다.
지루했다. 마음먹고 땡땡이를 쳤지만 할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땡땡이?
그 단어를 떠올리자마자 유디트의 발걸음이 뚝 멈췄다. 그와 밀접하게 연관된 한 사람이 생각났기 때문이었다.
바로 체이스였다.
지금쯤 체이스는 뭘 하려나? 설마 수업을 땡땡이치던 것처럼 부 시간도 땡땡이를 치려나.
만약 그렇다면…….
혹시 자신과 함께 시간을 보내 줄 수 있지 않을까?
체이스는 지금쯤 어디 있을지 잠시 고민해 보던 유디트는 곧 성큼성큼 다리를 움직였다.
우선 지하 연무장에 들러 볼 생각이었다. 평소 체이스는 늘 그곳에서 시간을 보내곤 했으니까, 아마 이번에도 거기에 있지 않을까.
괜한 헛걸음만 한다 해도 상관없었다. 어차피 시간은 많았으니까 말이다.
* * *
유디트는 좁은 문 틈새에 눈을 붙이고 안을 들여다보려고 노력했다.
계단을 내려올 때부터 유독 시끄러운 함성이 고막을 아프게 찌른다 싶더니, 지하 연무장 내부는 검술부 훈련이 한창이었다.
제각기 신체 단련과 대련을 하느라 무척 바빠 보였다.
그렇다면 체이스는 이곳에 없으려나?
설마 검술학 전공인 그가 검술부 활동까지 할 거라 예상하진 못했기에, 유디트는 이만 돌아서려 했다.
그러다 문득 연무장 한구석에서 낯익은 은발이 흩날리는 것을 발견했다.
처음에는 밝은 금발을 은발로 착각한 게 아닌가 생각이 들었지만, 눈을 비비고 바라보니 분명 낯익은 체격과 생김새였다.
게다가 무엇보다 검술부 학생들이 가운데로 나서는 그를 향해 커다란 환호성을 내지르고 있었다.
“와아아아아-.”
유디트는 당황을 금치 못했다.
대체 얼마나 검을 좋아하면 검술학을 전공하는 것도 모자라 검술부에 가입까지 할 수 있는 걸까?
사람들 한가운데서 뽐내듯이 검을 휘두르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참 그답다는 생각이 들었다.
유디트는 잠시 멈춰 서서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저번에는 이렇게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으면 알아서 제 시선을 눈치채고 밖으로 나와 주었었는데.
하지만 오늘 같은 경우는 사람도 많고 너무 시끄러우니 아무래도 어렵겠지, 싶었다.
그런데 그때, 팔을 곧게 뻗어 검을 앞으로 내지르는 동작을 하던 체이스가 뚝 멈췄다.
그리곤 제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보석 같은 붉은색 눈동자와 시선이 딱 마주쳤다.
정말 체이스는 뒤통수에 눈이라도 달린 걸까?
검을 수련하는 사람들이 기운에 예민하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이 먼 거리에서 고작 시선만으로 자신의 존재를 눈치채다니.
체이스의 입장에서는 기껏해야 유디트의 황금색 눈밖에 보이지 않았을 텐데 신기했다.
자신을 응시하는 붉은 눈동자가 점점 확장되는 것을 보며, 유디트는 문 틈새에 붙인 눈만 끔벅거렸다.
그가 자신의 존재를 알아차렸다지만 이 바쁜 와중에 자리를 빠져나오는 것은 아무래도 무리겠지 싶었다.
그렇기에 손만 흔들어 인사한 뒤 다시 떠나가려 할 때였다.
갑자기 체이스는 자신을 둘러싼 학생들에게 뭐라고 통보하는 듯하더니 검을 내려놓고 황급히 유디트 쪽으로 달려 나왔다. 그 행동에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었다.
유디트는 점차 가까이 다가오는 체이스를 바라보았다.
달음박질할 때마다 나부끼는 은발, 붉게 상기된 얼굴, 날렵한 턱선을 타고 흐르는 땀방울까지.
“유디트, 너 설마 나 보러 왔어?”
익숙한 데자뷔.
왠지 반가운 느낌이 들어 입가에 미소가 지어지려는 찰나, 체이스가 가볍게 덧붙였다.
“아니면, 또 카렐 교수님이 함께 찾아오라고 부르셔?”
체이스는 그렇게 말하며 자신을 놀리기라도 하듯 눈썹을 까딱였다.
그 표정을 보자 문득 그가 자신이 고백하러 온 줄 알고 착각했던 날이 떠올랐다.
동시에 유디트는 조금 억울해졌다. 애초에 그때 속일 생각도 없었는데 저 혼자 멋대로 착각한 거면서.
그나저나 어떻게 대답해야 할까? 오늘은 체이스를 보기 위해 찾아온 게 맞긴 했다.
하지만 왠지 이 상황에 순순히 그렇게 말하려니 입술이 쉽사리 떨어지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