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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 다정하지 마세요-34화 (34/110)

내게 다정하지 마세요 34화

유디트는 애꿎은 치맛자락만 만지작거리다 입을 다물었다.

그동안 꽤 친해졌다고 생각했지만, 역시 갑자기 생각나서 찾아왔다고 하면 부담스럽겠지.

쾅.

그때 저번처럼 커다란 굉음이 나며 거칠게 문이 닫혔다. 체이스는 문가에 기대며 짝다리를 짚곤 느릿하게 말했다.

“그것도 아니면 혹시 무슨 부탁이라도 있는 거야?”

부탁?

그 단어를 듣자마자 유디트의 머릿속에 좋은 핑계가 떠올랐다.

어차피 아셀이 독서부 활동을 핑계로 계속 도서관에 드나들면 계속 이런 식으로 자리를 피해야 할지도 몰랐다, 그러니 어쩌면…….

“그게…… 내가 너한테 회계학을 가르쳐 주고 있잖아. 나도 너한테 배우고 싶은 게 생각나서.”

“나한테?”

체이스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좀처럼 믿기지 않는지 손가락으로 자기 자신을 가리키는 시늉까지 했다.

유디트는 어쩐지 창피한 기분이 들었다. 체이스의 시선을 은근슬쩍 피하며 방금 떠올린 변명을 내뱉었다.

“응, 검술을 한번 배워 볼까 생각 중이야.”

“…….”

용기를 내 꺼낸 말이 무색하게, 체이스는 한참이나 대답이 없었다.

그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으려니 피가 바짝바짝 말라 오는 것만 같았다.

실제로 입술이 건조해진 듯해 유디트는 혀로 입술을 축였다.

너무 무리한 부탁이었나?

사실 유디트는 지금까지 살면서 검술은커녕 운동 자체에 전혀 연이 없는 사람이었다. 아무렇게나 내뱉긴 했지만 누가 봐도 거짓말이라는 게 티가 났다.

그래서 아마 체이스도 곤란한 부탁이라고 생각해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하고 있는 게 아닐까.

조금 의기소침해진 유디트가 물었다.

“안 돼?”

“되긴 해.”

체이스가 안개처럼 희미한 목소리로 긍정을 표했다. 안심한 유디트가 가슴을 쓸어내리려는 찰나, 그가 성큼 다가왔다.

체이스는 눈을 조금 찌푸린 채로 유디트의 이곳저곳을 살피기 시작했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갑자기 심각해진 얼굴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검술은 왜? 혹시 필요한 일이 생긴 거야?”

“…….”

“누군가 괴롭힌다거나. 자꾸 못살게 군다거나.”

그렇게 말하는 체이스의 목소리는 지금 무슨 상상을 하는지 모르겠지만 한층 낮게 가라앉아 있었다.

검붉게 일렁거리는 눈동자에 깜짝 놀란 유디트가 황급히 손사래를 쳤다.

“그런 거 아니야! 그냥 호신술 정도로만 배워 놓으려고.”

“그래?”

체이스가 찌푸린 눈가를 바로 했다.

그가 손을 들어 땀에 젖은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자 단정한 이마가 드러났다. 곧 그가 한쪽 입꼬리를 끌어 올리며 말했다.

“하긴, 네 약혼자가 나인 걸 뻔히 알 텐데도 건드린다는 건 말도 안 되는 거긴 하지.”

그는 그치지 않고 덧붙였다.

“유디트, 혹시라도 괴롭히는 사람이 있으면 내 이름을 대. 그러면 꽁지가 빠져라 도망갈 테니까.”

그의 자신 어린 말투에 유디트는 잠시 굳은 채 서 있었다.

평소 같았다면 그의 허세 가득한 말에 잠깐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을 텐데. 오늘따라 체이스가 자신을 신경 써 준다는 느낌이 물씬 풍겼다.

왠지 양 볼이 화끈해지는 기분이었다.

체이스는 어쩜 이다지도 자신만만할까, 아마 저 성격은 체이스가 가진 검술 실력 때문이겠지.

그는 매번 무투 대회에서 우승할 만큼이나 뛰어난 검사니까…….

상념에 빠진 유디트를 체이스가 다시 일깨웠다.

“그런데 지금은 부 활동 시간인데 네가 왜 여기 있어?”

“…….”

유디트는 입을 꾹 다물고 눈동자만 데굴 굴렸다. 잠시 말이 없던 유디트가 빨개진 얼굴을 한 채 조그마한 목소리로 말했다.

“사실 땡땡이쳤어.”

들릴 듯 말 듯 작은 목소리로 말했는데도 체이스는 똑똑히 알아들었나 보다. 그는 멍하니 입을 벌린 채 되물었다.

“땡땡이?”

“큰 소리 내지 마. 누가 들을라.”

유디트는 황급히 손을 들어 체이스의 입을 막자, 곧 체이스의 얼굴이 자신보다도 빨갛게 달아오르는 것이 보였다.

잠시 후 그가 조심스럽게 그녀의 손을 밀어냈다.

“……알겠으니까 손 치워 줘.”

잠시 둘 사이에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그러나 곧 정신을 차린 체이스가 큼, 하고 헛기침을 한 뒤 질문했다.

“그런데 갑자기 웬 땡땡이야? 무슨 심경에 변화라도 있었어?”

“그냥 날씨가 좋아서.”

화창한 날씨 따위와는 전혀 상관없는 이유로 땡땡이를 친 유디트였지만, 곧이곧대로 대답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다행히도 체이스는 유디트의 말을 별다른 의심 없이 믿어 주었다.

“오늘 날씨가 좀 좋긴 하지.”

“응.”

또 정적이었다.

평소라면 신경도 쓰지 않을 적막함이 어쩐지 오늘따라 불편하고 어색하게 느껴지는 것만 같았다.

발끝만 쳐다보고 있던 유디트는 정적을 깰 겸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러는 너는 검술부에서 더 연습하지 않고 왜 나왔어? 나처럼 땡땡이치게?”

“그건 네가 왔으니까…….”

그렇게 말하던 체이스가 곧 눈을 몇 번 깜박이더니 되물었다.

“그러고 보니…… 내가 여기 있는 줄은 어떻게 알고 찾아온 거야? 내가 검술부인 거 알고 있었어?”

아차, 실수했다.

유디트는 입 안의 혀를 깨물었다.

그도 그럴 게, 체이스가 이런 식으로 나올 때의 결과란 무척 뻔했으니까 말이다.

어떻게 둘러대어도 ‘그런 것까지 알다니 날 너무 좋아하는 것 아냐?’ 같은 반응이 돌아올 게 분명했다.

하지만 유디트는 나름대로 억울했다. 체이스가 애초에 연무장에 붙어 있다시피 한다는 사실을 모르는 학생이 어디 있겠는가.

수업 시간, 쉬는 시간 가리지 않고 다들 그가 있는 연무장으로 모여든다는데.

물론 그가 검술부라는 사실은 오늘 연무장에 들른 뒤에야 깨닫게 된 거였지만 말이다.

“……당연하지. 너도 회계학 수업은 듣지도 않는데 내 전공이 뭔지 알고 있었잖아.”

“그거야 네가 카렐 교수 시험에서 유일하게 만점을 받은 학생으로 워낙 유명하니까-.”

거기까지 말하던 체이스가 무언가를 깨달았는지 입을 다물었다. 그러더니 곧 고개를 돌려 기쁜 얼굴로 씨익 웃어 보였다.

“그래, 뭐. 이제 약혼한 사이인데 이게 다 무슨 상관이야. 서로에 대해 잘 아는 게 오히려 당연한 거겠지.”

“그, 그렇지…….”

평소 같았으면 또 피곤하게 자신을 너무 좋아하지 말라는 둥 자만심 가득한 대답이 돌아올 줄 알았는데, 예상외로 반응이 수더분했다.

처음에는 그렇게 날을 세우며 경계하더니, 이젠 꽤 풀어진 모습이다.

확실히 유급의 위기에서 자신이 도움을 줬던 게 꽤 고맙긴 했던 모양이지?

유디트는 평소처럼 체이스가 물고 늘어지지 않아 다행이라 생각하며 급히 말을 돌렸다.

“아무튼 사실 내가 검술부에도 관심이 있어서 말야.”

“정말?”

“응, 그래서 겸사겸사 검술을 알려 달라고 한 거야. 부에 들어가는 데에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어서.”

기왕 체이스와 만난 김에 유디트는 부서도 바꿀 수 있다면 바꾸고 싶었다.

아셀을 또 마주칠까 계속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지내기는 싫었다.

또 아셀은 검술과는 그다지 연이 없었기에, 이 근처라면 여간해서는 마주칠 일도 없으리라 판단했다.

물론 이제 와서 부서를 바꾸는 일이 절대 쉽지는 않겠지만, 체이스처럼 뛰어난 검사가 도와준다면 어떻게든 되겠지.

그런 유디트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체이스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들어와. 내가 허락할게.”

“……응?”

유디트는 더 말하지 않고 눈만 끔벅였다. 하지만 체이스는 그녀가 무엇을 묻는 건지 안다는 듯이 대수롭지 않게 설명을 덧붙였다.

“내가 검술부장이야.”

이건 또 의외였다. 귀찮은 일을 질색하는 것 같던 체이스가 그런 직책을 맡을 줄이야.

제 눈빛의 의미를 알아챘는지 그가 부연 설명을 했다.

“사실 부 신청 기간을 놓쳤어. 그래서 모집 인원이 덜 찬 부에 억지로 들어갔어야 했는데, 살펴보니까 독서부밖엔 없더라고.”

“…….”

“그런데 검술부에서 검술 부장을 맡으면 인원이 넘쳐도 받아 주겠다고 제안이 와서 말이야. 지루하고 따분하기 짝이 없는 독서부 따위에 들어가느니 그게 낫겠다 싶어서 억지로 맡게 된 거야.”

그가 그렇게 말하며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유디트가 그런 그를 한참 빤히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나 사실 독서 동아린데.”

“아…….”

“지난 4년 동안 독서부로 활동해 왔어.”

체이스가 손으로 입을 가렸다. 붉은색 눈동자는 갈피를 못 잡고 떨리고 있었다.

마치 ‘실수했다!’라고 말하는 듯한 표정에 도리어 유디트가 체이스를 변명해 주기 시작했다.

“괜찮아. 너로서는 지루하고 따분하게 느껴질 수 있다고 생각해. 나는 책을 읽는 걸 좋아하지만, 모든 사람이 같을 수는 없는 거니까.”

하지만 이상하게도 유디트의 말이 이어질수록 체이스의 얼굴은 해쓱해져 갔다. 그는 뒤늦게 수습이라도 해 보려는 듯 손을 허둥지둥 저었다.

“생각해 보면 딱히 지루하거나 따분하진 않아. 그저 내가 검술을 너무 좋아하니까, 검술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약간 그렇다는 거지.”

별 반응이 없는 유디트를 향해 체이스가 허겁지겁 말을 마무리했다.

“그러니까 내 말은, 가끔은 정적인 행위를 하는 것도 좋다는 말이지. 나는 그동안 너무 동적인 삶을 살았으니까.”

가만히 체이스를 지켜보던 유디트는 의아해지고 말았다. 왜 이렇게 필사적인가 싶어서.

분명 예전의 체이스라면 자신이 어떤 부이건 간에 ‘그런 재미 없는 부서를 택하다니 너도 참 안 됐다’라며 거리낌 없이 말했을 것이다.

제 눈치를 보는 모습이 제법 뜻밖이라고 생각하며 유디트는 피식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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