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게 다정하지 마세요 35화
아무튼 체이스가 검술부의 부장이라 이거지. 어쩌면 부를 옮기는 일이 예상보다 쉬울지도 모르겠다.
“체이스, 그럼 혹시 나 검술부에 받아들여 줄 수 있어?”
“응.”
체이스가 자신만만하게 대답했다.
“하지만 지금은 부 신청 기간이 아닌데…….”
유디트가 뭔가를 가늠하는 듯 느릿하게 고개를 기울였다.
“너 설마 괜히 나 때문에 곤란한 짓을 하는 건 아니지?”
그렇게 물으며 자신을 주시하는 유디트의 표정이 꼭 걱정에 잠긴 것만 같아서, 체이스는 자꾸만 입꼬리가 실룩이는 걸 참아야 했다.
이내 그가 별일 아니라는 듯 대답했다.
“딱히 어려운 것도 아니야. 쉬워.”
체이스는 지난 몇 년을 검술부장으로 활동해 왔지만, 그걸 맡게 되어 지금처럼 다행이라고 생각한 적은 없었다.
원래는 부에 누군가를 입단시키려면 복잡한 절차 몇 가지를 거쳐야 한다.
하지만 체이스는 그 절차들을 깡그리 무시할 작정이었다.
쉽진 않겠지만, 못할 것도 없었다.
잔소리 따위야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면 되는 거고 만약 벌점을 받는다고 하더라도 반성문 몇 장 쓰고 청소 몇 번만 하면 되는 거니까.
더욱이 유디트에게는 항상 신세를 지고 있었으니 이럴 때 그 빚을 갚아 두는 것도 좋겠지.
이런 사정을 모르는 유디트는 체이스의 자신감 어린 대답에 뛸 듯이 기뻐했다.
“검술부장이라고 하더니, 능력이 정말 뛰어나구나.”
“……그렇지 뭐.”
그렇게 가까스로 내뱉은 뒤 체이스는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빨개진 제 얼굴을 유디트에게 들킬까 봐.
물론 고개를 숙여 봤자 은발 사이로 불쑥 튀어나온 귀는 숨기지 못했다.
잠시 후 표정을 갈무리한 그가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 유디트가 체이스를 향해 얼굴 가득 미소를 짓고 있는 것이 보였다. 마치 꽃봉오리가 만발하는 것만 같은 환한 미소였다.
“고마워.”
그녀의 별거 아닌 감사 인사에 체이스는 심장이 툭 내려앉는 것만 같았다.
동시에 속이 울렁이고 목이 타기 시작했다.
어디가 아프기라도 한 걸까.
유디트가 웃은 적은 많지만, 제 앞에서 이토록 환한 미소를 짓는 건 오늘이 처음인 것 같았다.
* * *
유디트가 환하게 웃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문득 그녀를 처음 봤을 때가 떠올랐다.
사실 유디트는 그다지 의식하지 못하고 있겠지만, 그녀도 나름 이 아카데미의 유명인사 중 하나였다.
물론 처음 입학했을 때는 악명을 떨친 것에 더 가깝긴 했다.
학생회장인 아셀 페델리안에게 빌붙은 분홍 머리 평민 계집애, 이런 악의적인 수식어가 어디든 그녀의 뒤를 따라다녔으니.
하지만 그때까지도 체이스는 그녀에게 아무런 관심도 없었다.
예나 지금이나 체이스 카르단디에게 있어 중요한 것은 오로지 검술 실력을 다지는 것뿐이었기 때문이다.
남들은 그런 그를 보고 검술을 무척 좋아한다 여겼겠지만, 실상은 달랐다. 그저 자신에게 남은 길이 그것밖에 없어서였다.
그는 카르단디 가문의 사생아였고 언제나 가문에서는 숨기기 급급한 존재였다.
‘쥐 죽은 듯이 살아라.’
어머니를 아꼈던 아버지가 그를 마지못해 호적에 올려 주기는 했지만, 딱 거기까지였다.
그는 가문의 정식 후계자인 형과는 먹는 것부터 시작해서 입는 것까지 사뭇 다른 대우를 받아야 했고, 가끔은 사용인들에게조차 얕보이곤 했다.
그런 체이스의 목표는 단 한 가지였다.
검술 실력을 쌓아 기사 작위를 받는 것. 그래서 가문으로부터 완벽히 독립해 더 이상 엮이지 않고 어머니와 단둘이 살아가는 것.
그렇기에 아카데미 입학한 이후로, 체이스는 독하게 검술 훈련만 해 왔다.
새로운 친구를 사귄다거나 학문에 열중한다거나 하는 것들은 전부 그의 관심사 밖이었다.
하지만 그러던 어느 날, 평소처럼 연무장을 향해 걸어가던 체이스는 우연히 어떤 여자애를 목격하게 된다.
쨍한 분홍 머리를 보자마자 알아차릴 수밖에 없었다.
쟤가 바로 유디트구나.
그녀는 가방 가득 책을 짊어진 채 무표정한 얼굴로 교정을 가로지르고 있었다.
소문과 다르게 굉장히 모범생 같은 인상이었다.
바로 그때, 반대편에서 아셀 페델리안이 제 친구들과 함께 걸어오는 것이 보였다.
그는 평소처럼 그린 듯한 미소를 얼굴 가득 띄우고 있었는데, 그 모습을 보니 왠지 카르단디 부인이 떠올랐다. 아셀의 웃음이 그녀의 가식적인 미소와 꼭 닮았기 때문이었다.
이에 기분이 나빠진 체이스가 이만 연습하러 가기 위해 발걸음을 떼려는 찰나였다.
그때, 분홍 머리 여자애의 얼굴이 문득 눈에 들어왔다.
그녀는 방금 전까지 무표정했던 게 언제였냐는 듯, 아셀과 눈을 마주치자마자 반짝인다 싶을 만큼 환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게 조금 전까지 얼굴과 인상이 사뭇 달라 보였기 때문일까.
그 순간 체이스는 문득 환하게 웃는 그 얼굴이 꽤 예쁘다고 생각해 버리고 말았다.
* * *
그 이후로도 체이스는 종종 유디트와 마주치곤 했다.
그녀는 아셀이 없는 대부분의 시간을 공부하며 보내는 듯했다.
날 좋은 교정을 거닐면서도 언제나 손에 붙든 책을 놓지 않았고, 아무리 졸린 수업에서도 꼿꼿이 허리를 세우고 앉아 열심히 필기를 하곤 했다.
매 수업 시간마다 엎어져 잠들곤 했던 체이스에게는 신기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가 잠에 허우적거리다 정신을 차릴 때면 유디트는 언제나 한결같은 자세로 칠판을 바라보고 있었기에, 그는 항상 그녀의 뒤통수를 보며 남몰래 감탄했다.
하루는 그녀를 바라보며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쟤도 어쩌면 나랑 같은 과 아냐?’
자신이 검술에 매진하는 것처럼, 저 아이도 공부에 집요하게 매달리고 있었다.
아마 그럴 수밖에 없는 사정이 있어서겠지. 저 아이도 나처럼 신분이 좋지 않으니까…….
그렇게 생각하니 일종의 동질감마저 느껴졌다.
그리고 그때부터였다. 그 분홍 머리 여자애를 둘러싼 소문이 서서히 호의적으로 바뀌기 시작한 건.
어느새 그녀는 아셀 다음가는 모범생으로 자리매김하게 되었고, 그에 따라 그녀를 손가락질하거나 미워하던 동급생들의 태도도 판이해졌다.
그들은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모르는 문제를 묻거나, 과제를 보여 달라 유디트에게 청하기 일쑤였다.
그리고 유디트는 언제나 그런 그들의 요청에 호의로 답해 주었다.
그 모습을 보며 체이스는 마음에 들지 않는 듯 인상을 썼다.
‘저거 바보 아냐?’
과제를 보여 달라는 무리 중 일부는 과거 그녀의 책을 망가뜨렸던 이들이었다.
그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유디트는 상냥하게 미소 지으며 그들에게 흔쾌히 노트를 내놓았다.
그 광경을 보고 있노라니 어쩐지 제 속만 답답해지는 기분이었다. 그래서 그 이후로 체이스는 아예 그녀에게서 관심을 끄기로 결심했다.
그렇게 몇 번의 계절이 지나가던 어느 날, 카르단디 가문에서 한 통의 편지가 도착했다.
평소에는 안부 인사 한번 없다가 졸업을 앞두고 갑자기 또 무슨 일인지.
분명 좋은 일은 아닐 거라는 생각에 체이스는 편지를 열어 보지도 않고 책상 위에 아무렇게나 내던졌다.
어차피 가문에서 올 편지란 뻔했다. 최근 아버지는 뛰어난 검술 실력으로 활약하게 된 그를 어떻게든 이용해 먹으려고 혈안이었으니까.
아마 이번에도 관심에도 없는 파티에 참석해서 얼굴이라도 비추라고 강요하는 내용이겠지.
모든 게 지긋지긋했다. 지겨운 마음에 방을 나와 근처를 배회했다.
어수선한 기분과는 다르게 그날따라 하늘은 지독하게 맑았다.
바로 그때였다. 예의 그 분홍 머리 여자애와 또다시 마주치게 된 건.
아니, 정확히는 목격한 것에 가까웠다. 그 여자애는 다른 누군가와 대화하느라 정신이 없어 보였으니까.
아셀 페델리안으로 보이는 뒷모습이 그녀의 앞에서 무어라 말을 하더니, 곧 그녀에게 다가가 손수건을 건네는 모습이 보였다.
그리고 그 순간, 한 번도 들어 본 적 없는 날카로운 목소리가 그녀에게서 터져 나왔다.
“필요 없어!”
곧이어 그녀의 두 눈에 눈물이 맺히는 것이 보였다.
“이런 짓은, 네 약혼녀에게나 하란 말이야!”
여자애는 입술을 잘근 깨물더니 그 뒤에도 무어라 분노에 찬 말을 내뱉다 이내 휙 돌아섰다.
체이스는 울먹거리며 자리를 떠나는 유디트의 뒷모습을 멍한 얼굴로 바라봤다.
그러다 곧 정신을 차렸다. 혼자 남은 아셀이 떨어진 손수건을 줍는 모습이 보였다.
왜 우는 거지? 혹시 저 녀석이 울린 건가?
체이스는 전후 사정을 몰랐기에, 곧 아셀이 나쁜 놈이라고 단정 짓게 되었다.
전부터 어째 느낌이 좋지 않더라니, 역시 예상을 빗나가질 않는구나.
여자나 울리는 못난 놈 같으니라고.
다시 방으로 돌아온 체이스는 침대 위에 피곤한 몸을 누였다.
왠지 마음이 뒤숭숭했다. 물기를 머금은 황금색 눈동자가 자꾸 눈앞에 어른거리는 듯했다.
뭐라도 해야겠다는 생각에 체이스는 읽기를 미뤄 두었던 편지 봉투를 뜯어 보았다.
예상대로 편지 안에 담긴 내용은 자신에게 있어 그다지 달가운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일종의 통보문이었다.
[이 아비가 골라 주는 여자를 만나 약혼을 하거라. 그래서 장차 네 형의 가업을 돕거라.]
요약하자면 대충 그런 내용이었다. 너무나도 뻔한 용건에 체이스는 이내 질린다는 듯 종이를 바닥에 내던지고선 마른세수를 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체이스는 알지 못했다.
설마 제 약혼 상대가, 그날 아셀과 싸우던 그 분홍 머리 여자애가 될 줄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