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게 다정하지 마세요 36화
* * *
유디트가 때아닌 부서 이동을 하는 바람에 검술부는 학기 중 갑자기 새로운 부원을 맞이해야 했다.
그리고 그 사실은 부원들의 관심을 끌기에 충분했다.
부원들 모두가 유디트에게 호기심 어린 눈빛을 보냈고, 그 집요한 시선에 체이스는 불만스럽다는 듯 눈썹을 꿈틀거려야 했다.
왜 저렇게 기분 나쁜 눈빛을 보내지? 설마 유디트에게 관심이라도 있는 건가?
체이스는 유디트에게 특히 눈독을 들이는 듯한 몇 명을 눈으로 잡아먹을 듯 노려보았다.
한순간에 체이스의 험악한 눈빛을 정면에서 받게 된 그들은 혹시 자신들이 뭐 잘못이라도 한 게 있는지 기억을 더듬으며 어리둥절한 얼굴을 해야 했다.
그 모습을 보며 체이스는 결심했다.
아무래도 부원들에게 유디트에 대해서 확실히 말을 해 줘야겠다. 다른 목적이 있는 게 아니라, 위계질서를 잡기 위함이었다.
체이스는 유디트를 옆에 세운 채 입술을 열었다.
“유디트는 내 약혼녀야. 이게 무슨 뜻인지 다들 알고는 있겠지?”
말이 끝나기 무섭게 연무장 내부에는 정적만이 흘렀다.
그리고는 다들 힐끔거리며 서로의 눈치만을 보기 바빴다.
그건 체이스가 한 말의 의미를 눈치챘다기보다, 그의 더러운 성질머리를 피하기 위한 본능에 가까웠다.
하지만 그런 그들의 속을 알 리 없는 체이스는 잠잠해진 반응에 곧 입가에 만족스러운 미소를 띄웠다
그때였다. 아무도 이견이 없을 거라고 예상했던 것과는 달리, 누군가 곱게 손을 들며 외쳤다.
“그게 무슨 뜻인데요?”
순진한 감자처럼 생긴 더벅머리 소년. 그의 이름은 제이든이었다.
주변에서 놀라 숨을 들이마시는 소리가 들리지도 않는 듯 제이든은 연갈색 눈동자로 체이스를 가만히 응시하기 바빴다.
그 모습에 체이스가 이를 바득 갈았다.
검술 실력은 부족해도 노력과 열정이 가상해서 입단시켜 주었는데, 이렇게까지 눈치가 없을 줄이야?
못마땅했지만 유디트가 곁에 있으니 화난 티를 낼 수도 없었다. 체이스는 팔짱을 낀 채 위협적으로 내뱉었다.
“내가 없을 때는 이 검술부장이 유디트라는 뜻이지.”
“아하, 그렇군요.”
제이든이 납득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순순한 반응에 약간 못마땅했던 마음이 풀렸다.
하지만 체이스의 그 말에 반박을 한 건, 다름 아닌 유디트였다.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말이 왜 안 돼?”
“검술에 검 자도 모르는 내가 그런 걸 어떻게 하라고?”
그게 걱정이었나? 체이스는 당황스러운 듯이 눈동자만 데구루루 굴리는 유디트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걱정하지 마. 어차피 네가 정말 내 역할을 대신하게 될 일은 없을 거야.”
유디트가 검술부에 있을 땐 체이스도 항상 곁에 있을 테니까. 그러니 유디트가 체이스의 부담을 짊어질 일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를 말로 설명하려니 어쩐지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체이스는 괜스레 볼만 긁적거렸다.
이에 유디트가 주변 눈치를 쓱 보더니 인상을 쓰며 다급히 체이스에게 속삭였다.
“그래도 정정해 줘, 난 주목받는 거 싫단 말이야.”
조용히 시간만 때우다 가려 했는데, 어째 일이 생각보다 커지는 것 같자 불만인 듯 유디트가 입을 삐죽 내밀었다.
그 모습이 마치 토끼처럼 귀여워 보여서 체이스의 심장이 쿵쿵 뛰었다.
“……알겠어.”
가까스로 그렇게 대답한 체이스가 곧 시선을 피했다. 은발 사이에 툭 튀어나온 그의 귀가 곧 붉게 달아올랐다.
아까부터 스스로도 왜 이러는지 모를 정도로, 심장이 좀처럼 진정되질 않았다.
* * *
마법으로 만든 밝은 조명 아래 은빛 머리카락이 별처럼 반짝였다.
휘익, 칼날이 허공을 매섭게 가르는 소리가 귓가에 선명하게 들려왔다.
유디트는 검을 휘두르면서 시범을 보이는 체이스에게 짐짓 감탄한 척 말했다.
“우와, 알려 줘서 고마워. 대단하다.”
상투적인 칭찬인데도 불구하고 체이스의 어깨는 하늘을 찌를 듯이 으쓱 올라갔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유디트는 저도 모르게 피식 웃음이 났다. 그와 동시에 미안해졌다.
검술에 관심이 있다며 가르쳐 달라 하긴 했는데, 막상 체이스가 가르쳐 주는 걸 보니 도저히 따라 할 수 있을지 자신이 없어졌기 때문이었다.
앞에서 저렇게 땀을 뻘뻘 흘리며 노력하고 있는데 너무 못 따라 하면 실망하지 않으려나.
게다가 체이스는 초보자인 유디트를 배려해 목검으로 수업을 진행해 주고 있었다.
그런데 목검은 바닥에 세워 놓으면 그녀의 허리춤에 올 만큼 긴 데다, 딱 봐도 몹시 무거워 보였다.
저걸 휘두르기는커녕 들 수나 있을까?
유디트는 평생 운동과 담을 쌓고 지냈다. 들어 본 무거운 것이라곤 두꺼운 전공 책 몇 권이 전부였다. 그렇기에 더욱 자신감이 떨어졌다.
“잘 봐. 이게 기초야. 쉬워 보이지만 기초부터 연습해야 해. 기본기가 탄탄해야 더 난이도 있는 동작을 할 수 있으니까 말이야.”
체이스가 검을 자유자재로 다루며 꽤 친절한 어투로 설명했다.
의외로 그는 유디트에게 검술을 가르치는 데 꽤 의욕이 있어 보였다.
체이스는 알고 보면 누군가에게 모르는 것을 알려 주면서 보람을 느끼는 유형의 사람일지도 모른다.
자꾸만 “알겠지?” 하며 대답을 요구하길래 착잡한 눈을 한 채 “응.”하고 영혼 없는 대답만 내뱉고 있을 때였다.
갑자기 체이스가 유디트 쪽을 휙 돌아보더니 말했다.
“한번 해 볼래?”
“……응?”
“백 번 보는 것보단 한 번 해 보는 게 훨씬 더 도움이 될 거야.”
기대를 머금고 반짝거리는 체이스의 눈동자에 유디트는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자, 들어 봐.”
체이스는 신이 난 듯 유디트에게 목검을 건네주었다.
심란한 자신과 달리 체이스는 왜 저렇게 재밌어 보이는 걸까.
어쩌면 유디트에게 합법적으로 잔소리해 댈 기회라고 생각해서 그러는지도 몰랐다. 항상 잔소리하던 건 유디트였으니까 복수하려는 건지도.
유디트는 엉거주춤한 태도로 체이스가 건네준 목검을 들었다. 체이스가 매의 눈으로 유디트의 자세를 살펴보았다.
“일단 배를 긴장시키고 허리를 좀 세워 봐.”
“알겠어.”
체이스의 말대로 얌전히 배에 힘을 주고 허리를 바르게 폈다. 하지만 체이스는 여전히 고개를 갸웃하며 한쪽 눈가를 조금 찌푸리고 있었다.
사실 유디트로서는 아까 체이스가 검을 쥐었던 자세와 지금 자신의 자세가 어느 부분이 다른지 몰랐다. 하지만 그의 눈에는 달라 보이나 보다.
지금쯤 체이스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아마 검술을 가르쳐 준다고 했던 말 자체를 후회하고 있진 않을까?
아무 말이 없는 체이스를 힐끗 살피다 유디트가 조금 기가 죽은 목소리로 물었다.
“내가 지금 뭔가를 잘못하고 있는 거지?”
“아니!”
깜짝이야.
갑자기 소리치는 체이스 때문에 놀란 유디트가 눈을 크게 뜨는데, 그가 재빨리 덧붙였다.
“처음치곤 잘했어. 소질 있는데? 조금만 갈고 닦으면 되겠어.”
“정말?”
“응, 뭐, 내가 처음 검을 잡았을 때보다 훨씬 나아.”
혹시 체이스는 채찍보단 당근을 주는 편인가?
몰랐는데 알고 보니 그는 칭찬에 꽤 후한 모양이었다.
체이스의 의외의 면모를 발견하고 신기해하고 있을 때, 유디트는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어쩌면, 정말 어쩌면.
자신에게 진짜로 검술에 대한 재능이 있는 건 아닐까……?
유디트의 얼굴이 한순간 꽃잎에 물든 것처럼 발그레해졌다. 왠지 의욕이 솟아나는 느낌에 검을 쥔 손에 힘을 꼭 주었다.
궁금증을 못 이긴 그녀가 이내 목을 큼큼 가다듬고서는 물었다.
“네가 검을 처음으로 잡은 게 언제였는데?”
어려운 질문은 아니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 물음에 체이스는 입술만 뻐끔거릴 뿐 쉽사리 대답하지 못했다.
유디트가 궁금하다는 듯 눈을 반짝이며 응시한 뒤에야 겨우 작게 중얼거렸다.
“100일 기념식 때.”
“……그렇구나.”
100일 기념식은 말 그대로 아기가 태어난 지 100일이 되었을 때 치르는 기념식이었다.
여러 가지 물건이 즐비한 테이블 위에 아기를 앉혀 놓고, 아기가 어떤 물건을 잡는지 지켜보며 복을 기원하는.
아무래도 체이스는 그때 처음 검을 잡았나 보다.
그러니까, 아까 체이스가 해 줬던 칭찬은-.
“……내가 지금 생후 100일의 너보다는 낫다는 소리였구나?”
그러자 체이스는 어색하게 큼, 하고 헛기침을 했다. 아니라는 말은 없었다.
진심으로 칭찬해 주는 건 줄 알았는데.
유디트가 다시 풀이 죽었다는 티를 내자 체이스가 황급히 그녀를 달래며 말을 이었다.
“조금만 노력하면 될 거야. 내가 옆에서 도와줄 테니까.”
“고마워.”
그럼 그렇지. 나에게 몸 쓰는 재능이 있을 리가.
사실 검술에 크게 흥미는 없었기에 타격을 받을 일도 아니었다. 하지만 자신을 위해 노력해 주는 체이스의 마음 자체는 고맙긴 했다.
역시 나중에 뭔가 보답을 해 줘야겠다. 회계학 기출 문제라도 뽑아서 숙제로 내줘야 하나?
체이스가 안다면 속으로 기겁할 만한 생각을 하고 있는 그때, 옆에서 조심스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유디트, 혹시.”
체이스 쪽으로 눈길을 돌리자 시선을 바닥으로 내리깐 그가 보였다.
“말로만 설명하기가 어려워서 그런데…….”
체이스는 큼, 하고 헛기침을 내뱉더니 끼고 있던 팔짱을 풀며 말을 이었다.
“내가 네 자세 좀 직접 잡아 줘도 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