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게 다정하지 마세요 37화
무슨 까다로운 부탁이라도 하는 줄 알았더니 별거 아니었다.
오히려 그 부탁은 체이스가 아니라 배우는 내가 했어야 하는 거 아닌가?
유디트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유디트의 긍정에 체이스는 기다렸다는 듯이 다가와 유디트의 뒤쪽에 섰다.
그리고 슬며시 팔을 뻗어 검을 손에 쥐고 있는 유디트의 손을 감쌌다.
손등 위로 굳은살이 박인 손가락이 느껴졌다. 체격이 큰 체이스가 뒤에서 감싸 안으니 꼭 한겨울 두꺼운 이불 속에 파묻힌 것만 같았다.
“이거, 이렇게 하는 거야.”
체이스가 움직이는 대로 몸을 맡기고 있자니 자연스럽게 팔과 다리에 자세가 잡혔다. 여전히 뭐가 다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우선 가만히 있었다.
“난 가만히 있을 테니까 이제 아까 가르쳐 준 대로 한번 휘둘러 봐.”
“음, 이렇게?”
그의 말에 따라 검을 쓱 휘둘러 본 후 유디트가 뒤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체이스의 반응을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그러자 붉은 눈동자가 코앞에서 바로 보였다. 생각보다 가까운 거리에 조금 놀랐지만 일단 물었다.
“내가 하는 게 맞아?”
“……아니, 다시 앞을 봐.”
고개를 원위치시키자 체이스는 침착한 목소리로 처음부터 설명해 주었다.
“지금 네 자세는 어깨에 힘이 너무 많이 들어갔잖아. 일단 어깨를 내려야 해. 그리고 검을 그렇게 쥐면 손목에 무리가 가서 나중에 아플 수도 있어.”
여러 번 알려 줘도 이해하지 못하는 유디트가 답답할 법도 한데도 체이스는 짜증은커녕 시종일관 친절하게 가르쳐 주었다.
그런데 이상했다. 잔잔하고 차분한 목소리와는 달리-.
“너 왜 이렇게 심장이 빨리 뛰어?”
등에 맞닿은 그의 가슴에서 심장이 바삐 고동치는 게 자신에게까지 전달될 정도였다.
설마 겉으로는 괜찮은 척하지만, 실상은 속이 터져 죽기 직전인 걸까?
잠시 움찔 떤 체이스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툭 내뱉었다.
“별거 아니야. 내가 원래 태어날 때부터 혈액 순환이 잘 돼서 그래.”
“평소에 자주 얼굴이 잘 빨개지는 것도 그것 때문이야?”
“……그렇다고 볼 수 있지.”
그렇구나.
유디트는 또 새로운 사실을 알았다.
* * *
제이든은 연무장 벽 쪽에 딱 달라붙어 있는 남녀를 물끄러미 보다가 중얼거렸다.
“저희가 보이지 않는 걸까요?”
분명 같은 공간에 있는데도 불구하고 저들과는 투명한 벽으로 가로막힌 것만 같았다.
이쪽에서는 땀 냄새가 풀풀 나고 투박한 기합 소리가 귓구멍을 찌르는데, 저쪽에서는 구름 같은 몽글몽글한 분위기가 흘러나온다고 해야 하나.
게다가 제이든은 검술부에 입단한 지 이제 반년이 넘었지만 저렇게 열정적인 체이스의 모습은 처음 보았다.
평상시 자신이 질문할 때와는 영 딴판인 모습이었다.
그는 검술부원 그 누가 도움을 요청하더라도 늘 고개를 갸웃거리며 ‘대체 왜 이걸 못 하지?’라는 눈빛으로 상대를 쏘아보기 일쑤였으니까.
지금 저 신입 부원에게 하는 것처럼 직접 자세를 봐준다거나 검술 이론을 설명해 준다거나 하는 친절함을 베푸는 일은 일절 없다고 봐도 좋았다.
아무튼 이쪽과는 전혀 연이 없는 사람들처럼 계속 둘이 호호, 하하 웃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살살 속이 쓰려 왔다.
그런데 그때, 누군가 쏜살같이 다가와 근육을 풀고 있는 제이든의 연갈색 뒤통수를 푹 내리눌렀다.
“악!”
바로 한 학년 선배인 레오나였다. 그녀는 제이든이 고통에 찬 비명을 내지르건 말건 그를 향해 벼락같이 일갈했다.
“고개 숙이고 시선 내리깔아. 겁도 없이 쳐다보다가 눈이라도 마주치면 어떻게 할 거야?”
“눈을 마주치면 안 되는 건가요?”
눈치가 지지리도 없는 그 순진한 물음에 레오나는 혀를 쯧 찼다.
“봐도 못 본 척, 알아도 모르는 척하는 게 좋을 거야. 그게 목숨을 유지할 수 있는 가장 큰 비법이니까. 오늘 본 광경은, 어디 가서 떠들 생각하지 말고 무덤까지 가져가.”
마치 치열한 암투라도 목격한 듯 비장해 보이는 대사였다.
레오나 선배는 왜 이런 말씀을 하시는 걸까?
제이든은 이해하기 어려웠지만, 그녀의 심각한 어조에 우선 고개를 끄덕거렸다.
“알겠어요.”
그의 빠른 수긍에 레오나가 장하다는 듯 어깨를 토닥여 주고 있을 때였다.
그때 날 선 고함이 허공을 날카롭게 가르며 그들을 향해 쏟아졌다.
“거기 제이든과 레오나, 서로 딱 붙어서 뭐 하고 있는 거야?”
“네?”
“신성한 연무장에서 설마 연애질하고 있는 건 아니겠지?”
“네에에?”
제이든이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들자 와락 인상을 쓴 체이스의 얼굴이 보였다.
분명 저 멀리에 서 있었는데 대체 언제 여기까지 온 거지?
놀라서 얼이 빠진 제이든의 얼굴을 보며 체이스는 한심하다는 듯이 한숨을 내쉬었다.
“때와 장소를 가려. 여기는 공공장소잖아?”
제이든은 검술부에 입단한 이래로 단 한 번도 체이스에게 말대꾸를 한 적이 없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몹시 억울했다. 그래서 저도 모르게 입을 열고 말았다.
“지금 연애하는 건 저희가 아니라, 읍.”
제이든의 말은 끝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레오나가 황급히 그의 입을 틀어막았기 때문에.
‘말조심해.’
그렇게 입 모양으로 말하고 있는 레오나 때문에 제이든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저 못다 한 말을 속으로 외쳐야만 했다.
지금 연애를 하는 건 저희가 아니라 부장님이시잖아요……!
* * *
충동적으로 검술부에 든 것이 무색하게, 그 이후로 아셀과의 관계는 무척 서먹해졌다.
어쩌다 복도에서 마주치면 형식적인 눈인사만 건네올 뿐 더 대화를 거는 일도, 아는 체를 해 오는 일도 없었다.
그리고 주말이 다가오자, 아셀은 정말 혼자 본가에 가 버린 모양이었다.
확실히 지난번에 매정하게 말하긴 했지……. 아셀도 이제 모든 정이 다 떨어졌을 거야.
가슴은 욱신거리나 그와 순조롭게 멀어지고 있다고 생각하니 그럭저럭 견딜 만했다.
유디트도 점점 아셀이 없는 일상에 적응해 가기 시작했다.
그러는 사이, 보충반 수업은 이미 몇 차례 진행되었다.
리아나를 제외한 인원들은 수업에 꼬박꼬박 참여했고, 나름대로 숙제도 빼먹지 않고 잘 챙겼다.
그래서 오늘 유디트는 그들의 학업 성취도를 확인하기 위해 기습적으로 쪽지 시험을 보기로 했다.
“오늘은 쪽지 시험을 봐 보려고 해.”
“뭐? 쪽지 시험?”
제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체이스는 내일 세상이 멸망한다는 말을 들은 것만 같은 표정을 지었다.
사실 체이스뿐만 아니라 다른 학생들도 난데없는 시험 예고에 당황한 표정이었다.
“갑자기 시험을 보겠다고?”
고작 여섯밖에 되지 않는 인원들이 부산하게 가방에서 책을 꺼내더니 급하게 훑기 시작했다.
심지어 세드릭조차 인상을 쓰며 그간 외운 공식들을 열심히 중얼거렸을 정도였다.
너무 급작스러웠나?
하지만 예기치 못할 때 치르는 시험이야말로 평소의 실력을 가장 잘 파악할 수 있는 방법이 아니겠는가.
모두가 혼란스러운 와중에 르데인만은 여유로운 태도로 책장을 팔랑팔랑 넘기고 있었다.
그런 그들에게 마음의 준비를 할 시간을 잠깐 내어 준 뒤, 곧 유디트가 한 장 한 장 유인물을 나눠 주기 시작했다.
시험지를 받아 든 학생들의 표정이 일시에 엄숙해졌다.
유디트는 그런 그들을 흐뭇하게 바라보며 시간을 재기 시작했다. 그리고 얼마 후-.
“자, 이제 걷을게.”
의외로 모두들 시간 내에 풀이를 마친 모양이었다. 유디트는 시험지를 걷은 즉시 그 자리에서 채점을 시작했다.
모든 채점이 끝난 뒤 결과를 확인해 보니 기대 이상이었다.
보충반 초반에 치렀던 시험보다 다들 성적이 꽤 많이 올라 있었기 때문이다.
유디트가 이채가 도는 눈으로 학생들 면면을 살피다 곧 한 학생 앞에서 시선이 멈추었다.
세드릭 벨루안.
사실, 유디트는 처음 보충반을 시작할 때만 해도 그가 어떤 장난으로 수업을 방해해 올지 꽤 많은 걱정을 했었다.
그런데 그는 저번에 말했던 대로 자신의 수업에 협조적이었을 뿐만 아니라, 다른 친구들의 면학 분위기 조성에도 도움을 될 정도로 성실하게 임해 주었다.
오늘 쪽지 시험에서 놀랄 만큼 성적이 오른 것도 다 그 노력 탓이겠지.
일이 이렇게 되자 당초의 예상과는 다르게 보충반을 운영하는 데 있어 약간의 보람마저 느껴지기 시작했다.
정말 내가 가르치는 데 재능이 있는 걸까?
생각보다 수업 자료를 준비하는 것도, 예상 문제를 짚어 주는 것도 늘 해 오던 것이라 어렵지 않았고, 몇몇 학생들도 알기 쉽게 가르쳐 줘서 고맙다며 가끔 칭찬해 주기도 했다.
기분이 살짝 들뜨는 그때-.
그거 봐라. 너는 역시 수습 교수의 길을 걸어야 한다니까?
왠지 카렐 교수의 킬킬거리는 음성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가는 듯했다.
유디트가 흠칫하며 고개를 도리도리 내저었다.
어쨌건 그렇게 수업이 끝난 뒤, 평소처럼 카페테리아에서 점심을 먹기 위해 르데샤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을 때였다.
뒤에서 체이스가 가방을 짊어지고 나오고 있었다. 유디트는 그의 싱글벙글한 안색을 보며 생각났다는 듯이 말했다.
“체이스, 성적이 많이 올랐더라.”
진심이 담긴 칭찬이었다. 그도 그럴 게, 이번 쪽지 시험에서 가장 점수가 많이 올랐던 사람이 다름 아닌 체이스였기 때문이다.
물론 그의 원래 점수가 그만큼 바닥이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지만…….
어쨌든 이대로라면 졸업하는 데 큰 무리는 없지 않을까?
체이스가 조금 민망한지 목덜미를 긁적이는데, 옆에서 르데인이 끼어들었다.
“선배님, 이런 말씀 드리기는 조금 부끄럽지만, 이번 쪽지 시험에서 가장 높은 점수를 획득한 건 바로 저였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