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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 다정하지 마세요-38화 (38/110)

내게 다정하지 마세요 38화

르데인이 전혀 부끄럽지 않은 얼굴로 그렇게 말했다. 그에 체이스가 불퉁한 얼굴로 르데인을 째려보았다.

“응, 르데인, 너도 잘하더라.”

사실 유디트도 르데인이 대단히 수업에 집중한단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의 노력을 인정해 주자 르데인의 얼굴이 살짝 빨개졌다.

하지만 르데인은 오늘 시험뿐만 아니라 늘 만점을 받아 왔다.

수업의 난이도도 애초에 그다지 높지 않았기에. 그가 만점을 받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라고 할 수 있었다.

역시 르데인은 보충반 수업을 굳이 듣지 않아도 될 것 같은데, 다른 심화 수업을 듣는 편이 낫지 않으려나…….

유디트가 생각에 잠긴 채 상대를 빤히 바라보자, 르데인이 부끄럽다는 듯 그 시선을 잠시 피하다 이내 주저하며 입을 열었다.

“그런데 선배님, 사실 지난번 부 활동 시간에 제가 선배님을 찾아갔었는데…….”

그가 더 말을 이으려던 그때였다.

“유디트!”

멀리서부터 손을 흔들며 뛰어오던 르데샤가 쏜살같이 달려와 유디트의 팔짱을 꼈다.

“배고프지? 빨리 밥 먹으러 가자.”

유디트는 르데샤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면서 옆에 있는 르데인을 다시 돌아보았다.

“미안, 뭐라고 말했지?”

“아, 아니에요.”

더 이상 물어볼 상황이 아니었기에 르데인은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그가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미소를 지어 보이자 유디트도 곧 그에게서 관심을 거두었다.

* * *

오늘이야말로 유디트 선배와 단둘이 만나야겠다.

르데인은 원대한 포부를 가슴에 안은 채 부 활동 시간에 도서관으로 향했다.

약초부에서 도서관을 가려면 지하 연무장 쪽을 돌아서 가야 했다.

르데인이 바삐 걸음을 옮기는 그때, 저 멀리 낯익은 분홍 머리 여학생이 시야에 들어왔다. 유디트였다.

예상보다 빨리 마주쳤다는 기쁨에 그 어떤 의문도 느끼지 못하고 반갑게 손을 흔들려던 그 순간이었다.

그녀 뒤에서 따라오는 누군가를 목격한 르데인은 곧 제자리에서 얼어붙고 말았다.

유디트는 혼자가 아니었다. 그녀의 뒤에는 익숙한 은발 머리를 휘날리고 있는 체이스가 함께였다.

더 이상한 것은 둘 다 격한 운동이라도 한 듯 땀에 젖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일견 다정해 보이는 그들은 웃으며 대화하다가, 작별 인사를 나누는 듯하더니 이내 헤어졌다.

그 광경을 목격한 르데인은 혼란스러워졌다.

분명 저 연무장은 검술부가 쓰고 있을 텐데 왜 유디트 선배가 저기서 나오는 거지? 그것도 체이스 선배와 함께?

더 생각할 것도 없이 르데인은 쏜살같이 유디트를 향해 뛰어갔다.

“허억, 헉. 선배, 안녕하세요.”

거친 숨을 몰아쉬며 인사를 건네니 유디트가 놀란 눈으로 받아 주었다.

“안녕, 르데인. 여긴 무슨 일이야?”

“부 활동 때문에 이동 중이었어요. 그런데…….”

왠지 여유가 없었기에 용건부터 입 밖으로 튀어나오고 말았다.

“선배님, 원래 독서부 아니셨어요? 왜 여기에서 나오시는 거예요?”

“…….”

“혹시 소속을 검술부로 바꾸셨어요? 어쩐지, 지난번 부 활동 시간에 찾아갔는데 자리에 계시지 않아서…….”

말을 잇다 보니 퍼즐이 하나하나 맞춰졌다.

아무래도 유디트는 약혼자인 체이스를 따라 부서를 바꾼 모양이었다.

대체 언제 둘이 그렇게까지 친해진 거지?

분명 두 사람은 약혼을 한 사이였지만 유디트는 체이스에게 크게 마음이 있는 듯 보이지 않았고, 평상시엔 그냥 친구처럼 데면데면해 보였었는데.

르데인은 입술을 깨물자,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던 유디트가 고개를 기울이며 질문했다.

“지난번에 나를 찾아왔다고? 내가 독서부인 건 어떻게 알아서?”

그 물음을 듣고 나서야, 르데인은 자신도 모르게 상대를 꽤 몰아붙이고 말았다는 걸 자각할 수 있었다.

하지만 뒷조사를 했다고 곧이곧대로 털어놓을 순 없는 노릇이었다.

“아, 그게…… 누나가 알려 주셨어요! 궁금한 게 생겨서 여쭤보려고 찾아간 거였는데, 안 계시길래 궁금해서요.”

르데인이 그렇게 둘러대며 눈알을 데룩데룩 굴렸다. 그 모습에 유디트는 뭔가 이상함을 느꼈다.

생각해 보면 르데인은 처음 등장했을 때부터 수상했다.

이미 모집 기간도 끝난 보충반에 받아들여 달라고 떼를 쓰지 않나, 학년 수석이라는 말은 쏙 빼고 공부가 어렵다며 울상을 짓고.

또 그의 수준이라면 충분히 풀 법한 문제들을 알려 달라며 시시때때로 찾아오기도 했다.

유디트는 그의 주황색 머리카락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문득 르데샤를 떠올렸다.

처음에 르데샤가 유디트에게 함께 점심을 먹자고 했던 이유가 뭐였었더라.

의도적으로 제게 접근해서 친해진 다음, 공부 비법을 캐내기 위해서라고 했던가? 그럼 혹시 르데인도 르데샤와 같은 목적인 걸까?

사실 그동안은 르데샤의 동생이라 구태여 더 문제 삼지 않으려고 했는데, 이렇게 부 활동 시간에까지 졸졸 쫓아다니는 걸 보니 아무래도 안 될 것 같았다.

주의를 좀 줘야겠다고 판단한 유디트가 곧 입을 열었다.

“혹시 내 요점 정리 노트가 필요한 거니?”

르데인은 여전히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듯이 고개를 비스듬하게 기울였다. 유디트는 부연 설명을 했다.

“그걸 얻기 위해 굳이 귀찮게 나랑 친해지려고 노력한 거냐고.”

“귀, 귀찮게라니.”

르데인이 손사래를 쳤다. 그가 뭐라고 변명하려 했지만, 유디트는 딱 잘라 자기 할 말만 던지기 바빴다.

“하지만 그것 때문에 회계학 보충반에도 참관하고 싶다고 말했던 거 아니었어?”

그제야 르데인이 허공에서 휘젓던 손을 멈추곤 멍하니 입을 벌렸다. 그러더니 무슨 말을 들었는지 모르겠다는 듯이 눈만 깜박거렸다.

유디트는 잠시 시간을 두고 기다려 주었다. 하지만 역시 굳어 있는 르데인의 입에선 아니라는 말이 나오지 않았다.

난데없이 가정사를 털어놓던 것도 동정심을 유발하기 위해서였을까?

유디트는 가늘게 눈을 뜬 채 쩔쩔매는 르데인을 관찰했다.

그렇게 얼마간의 침묵이 흐른 뒤, 까마귀 우는 소리가 몇 번 울려 퍼지고 나서야 르데인이 겨우 입을 열었다.

“아니에요, 저는 그저 선배님과 정말로 순수하게 친해지고 싶어서-.”

“나랑 왜 친해지고 싶은 건데?”

유디트의 물음에 르데인이 입술을 달싹거리다, 이내 뺨을 붉히고는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선배님이 좋으니까요.”

그리곤 수줍다는 듯이 르데인이 입술을 깨물며 고개를 푹 숙였다. 하지만 유디트는 그의 고백에도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왜?”

의문이 들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르데인이 자신에게 호감을 표현할만한 구실이 너무나 부족했기 때문이다.

애초에 그가 보충반에 받아들여 달라 청하기 전까지는 제대로 마주친 적도, 대화를 나눠 본 적도 없었으니까.

“…….”

유디트가 이렇게 세세하게 캐물어 올 줄은 몰랐는지, 르데인은 당황해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언뜻 초조해 보이기도 했다.

그 모습을 보며 유디트는 생각했다.

차라리 르데샤처럼 솔직하게 원하는 것을 말하는 편이 나았을 텐데.

이미 그의 의도가 껄끄럽게 느껴진 순간, 더 이상 관계를 이어 가는 건 무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유디트가 고개를 숙인 르데인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르데인, 내가 이런 충고를 해 줄 처지가 되는지는 모르겠지만…….”

잠시 말을 흐리다가 이어 말했다.

“진심이 아닌 말로 다른 사람을 이용하려고 하지 마. 누군가는 꼭 상처받을 테니까.”

그 말에 르데인이 고개를 퍼뜩 들었다. 그의 두 눈이 크게 벌어지더니, 주홍색 눈동자가 잘게 흔들리는 게 보였다.

아, 혹시 이렇게 말하면 내가 상처받았다는 것처럼 들리려나?

그에게 죄책감을 느끼게 하려는 의도는 없었기에 유디트가 황급히 덧붙였다.

“물론 나는 상처받지 않았으니 내게는 전혀 미안해하지 않아도 돼.”

“……선배님.”

그녀가 돌아서려는 기색을 보이자 르데인이 살며시 소맷자락을 잡아 왔다.

“사과하지 않아도 괜찮아.”

하지만 유디트는 그 손길을 부드럽지만 단호하게 치워 냈다.

“요점 정리 노트는 르데샤를 통해 전해 줄게.”

그 말을 끝으로 유디트는 기숙사를 향해 걸어갔다.

* * *

노을이 내려앉은 이름다운 교정. 해는 이미 완전히 저물었고 그 흔적만 희미하게 남아 있을 뿐이다.

그것만으로도 마음속이 울릴 만큼 인상적인 광경이었다. 하지만 르데인은 그것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는 벤치 위에 홀로 앉은 채 중얼거렸다.

“그 평민은 대체 뭐야?”

이미 수업 시간은 오래전에 끝나 주변에는 아무도 없었다.

인기척 없는 교정에 이따금 새의 지저귐만 울려 퍼졌다. 짹짹거리는 시끄러운 소리 아래 르데인의 목소리는 반쯤 파묻혔다.

르데인은 입술을 아프게 짓씹었다. 새의 울음소리 사이로 슬며시 새어 나오는 자신의 목소리가, 너무 처량하게 들려서.

눈을 질끈 감고 벤치에 등을 기댔다. 서늘한 나무의 감촉이 셔츠를 뚫고 체온을 빼앗아 갔다.

유디트의 뒷모습을 보는 것은 이제 의미가 없었다. 저 멀리, 이제는 점보다도 더 작아져 아예 보이지 않으니까.

그렇게 매달렸는데 뒤도 돌아보지 않고 떠나가다니.

자신의 시선이 느껴지지도 않나?

그래도 한 번쯤은 다시 뒤를 돌아볼 줄 알았는데.

만약 유디트가 고개를 돌려 자신을 바라보면, 처연한 척 웃어 보이며 돌아서려고 했다. 차오른 눈물을 힘겹게 참아 내는 척하려고 했다.

그 시도 또한 물거품이 되고 말았지만.

목구멍이 뜨거웠다. 이글거리며 타오르는 불구덩이를 집어삼킨 것만 같았다.

“대체 그 평민은 뭐야.”

듣는 사람도 없는데 르데인은 계속해서 같은 말을 되뇌었다.

유디트는 대체 뭘까.

아무리 고민해 봐도 답이 나오지 않았다. 지금껏 풀어 본 그 어떤 것보다도 더 난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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