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게 다정하지 마세요 40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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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유디트는 회계학 교실에 들어서면 습관처럼 하는 행동이 있었다. 바로 주황색 머리카락의 주인을 찾아 고개를 두리번거리는 것이었다.
마침 교실 맨 뒷자리에 찾고 있던 소녀가 보였다.
이에 유디트는 주저하지 않고 걸음을 옮겼다. 막 르데샤에게 인사를 건네려고 할 때, 제 인기척을 느낀 그녀가 먼저 뒤를 돌아보았다.
“유, 유디트! 안녕! 오랜만이다!”
르데샤는 굉장히 당황했는지 인사말 끝에 작게 삑사리가 났다. 얼굴은 어딘지 모르게 부자연스러운 웃음을 띠고 있었다.
어제도 봤는데 대체 뭐가 오랜만이라는 걸까.
여러모로 신경 쓰이는 반응이었지만 우선 유디트도 웃으면서 인사를 건넸다.
“안녕.”
그리고는 르데샤의 옆자리 의자를 빼서 앉았다. 회계학 시간 때 르데샤와 나란히 앉는 건 이제 당연시된 일이었다.
“크, 크흠.”
르데샤는 손으로 입을 가리더니 헛기침했다. 왠지 유디트의 눈치를 살피는 느낌이었다.
대체 왜지?
혹시 르데샤도 어제 자신과 르데인 사이에 있었던 일을 알게 된 걸까?
원래는 가져온 요점 정리 노트를 만나자마자 건네주려고 했다. 그런데 왠지 망설여졌다.
문득 르데샤가 제게 껄끄러움을 느끼게 된 게 아닐지 걱정스러워졌기 때문이다.
유디트가 속으로 심히 갈등하는 사이 르데샤가 회계학 교과서를 손에 집어 들었다.
그리고는 책장을 바쁘게 뒤적이기 시작했다. 열심히 예습을 하는 듯했지만, 사실은 눈동자를 굴려 이쪽을 응시하고 있다는 게 느껴졌다.
유디트는 자신의 얼굴에 닿는 주황색 시선에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몰라 속으로 쩔쩔맸다.
역시 르데인이 르데샤에게 내 뒷담화라도 한 건 아닐까? 평민 주제에 이상한 말을 충고랍시고 한다며 건방지다고.
물론 유디트가 봐 왔던 르데인은 사근사근했고 예의가 바른 후배였다. 뒷담화라곤 전혀 안 할 것 같은 이미지이긴 했다.
하지만 유디트는 신입생 때 겉과 속이 다른 사람들에게서 많이 당했었던 전적이 있었기에 그런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할 순 없었다.
그냥 궁금한 게 있으면 대놓고 물어봐도 괜찮은데.
그러나 르데샤는 제게 호기심 어린 눈빛만 보낼 뿐 입술은 꾹 다물고 있었다.
먼저 질문을 할 때까지 기다려 볼 심산으로 유디트는 일단 가방을 뒤적거려, 책과 필기구를 꺼냈다.
책상 위에 가지런히 수업 준비를 마쳐 놓은 그때까지도 르데샤는 유디트를 은근슬쩍 살펴보고 있었다.
더 이상 못 본 척하기도 민망했기에 유디트는 겨우 용기를 내어 질문했다.
“나한테 무슨 하고 싶은 말이라도 있는 거야?”
“없는데!”
르데샤가 쏜살같이 대답했다. 하지만 없다고 대답한 사람치고 자꾸만 힐끔거리는 게, 여전히 하고 싶은 말이 많은 사람처럼 보였다.
유디트는 그런 르데샤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눈이 딱 마주친 르데샤가 몸을 움찔 떨었다.
“오늘 날씨가 참 좋다. 그치? 아하하.”
기숙사에서 걸어올 때 본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푸르렀긴 했다. 유디트는 그러게, 하고 수긍했다.
차분한 대꾸에 긴장이 풀렸나 보다. 르데샤는 뻣뻣하게 세우고 있던 몸을 의자에 편하게 기대었다.
“아카데미에 입학한 이후로 여름에도 쾌적하게 보낼 수 있어서 다행이야. 마법으로 온도 조절이 잘 되니까.”
르데샤가 조잘거리며 이야기를 이어 갔다.
“그래서 가끔은 집에 돌아가기 싫을 때도 있어. 이렇게 더위를 느끼지 못하다가 집에 가면 너무 덥거든.”
“그렇구나.”
“물론 저택의 온도 관리 마법보다 아카데미의 마법이 더 뛰어나니까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르데샤의 하소연을 들으며 유디트는 문득 페델리안 저택을 떠올렸다.
웅장하고 고풍스러운 저택. 계절의 변화를 뚜렷하게 느낄 수 있었던 그 공간을.
페델리안 공작가 정도라면 아카데미처럼 사계절 내내 일정한 온도를 유지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유는 모르겠지만 페델리안 저택에서는 그러지 않았다.
덕분에 유디트는 그 안에서 아름다운 사시사철의 풍광을 고스란히 감상할 수 있었다.
커다란 저택은 계절마다 다른 옷으로 갈아입는 듯 유디트에게 저마다 새로운 감상을 남겼었다.
이제 졸업하면 그 저택과도 이별이구나.
초록 새싹이 피어나던 정원부터 하얀 눈이 소복이 쌓였던 지붕까지.
유디트의 머릿속에 그 장면들이 순식간에 스쳐 지나갔다. 그리고 그 장면 속에 항상 함께 있던 누군가까지도…….
그때 르데샤가 목소리를 낮추었다.
“아카데미의 온도 관리 마법이 뛰어난 건, 어쩌면 더위도 추위도 느낄 틈 없이 공부만 하라는 사악한 속셈에서 비롯된 걸지도 몰라.”
르데샤는 음모론을 중얼거리며 소름 돋는다는 듯이 몸을 한차례 부르르 떨었다. 그러면서 유디트를 힐끔거리고 있었다.
모르는 척 넘어가 주려고 해도 르데샤의 어색한 행동에서 뭔가 다른 뜻이 있다는 게 다 티가 났다.
유디트는 한숨이 튀어나오려는 걸 삼키며 입을 열었다.
“정작 내게 하고 싶은 말은 그게 아니지?”
“……역시 너는 만만한 사람이 아니라니까.”
르데샤가 놀란 듯이 주황색 눈을 크게 떴다. 유디트를 또 힐끔 살피곤, 눈을 질끈 감고 외쳤다.
“유디트. 다시 진심으로 사과할게. 처음에 내가 너에게 요점 정리 노트를 얻으려고 일부러 접근했던 거 정말 미안해.”
정말 면목 없다는 듯한 그 행동에 유디트는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몰라 잠시 굳었다. 하지만 이내 르데샤의 어깨를 토닥거렸다.
“저번에도 말했잖아. 내게 미안해하지 않아도 된다고.”
“그래도-.”
“괜찮아. 그리고 네가 그 일로 이미 밥까지 사 줬잖아? 그걸로 충분해.”
르데샤는 감동한 눈을 하며 유디트의 손을 덥석 붙잡았다.
“역시 너는 천사구나!”
그 반응을 보니 자신에게 부정적인 감정을 품고 있진 않은 듯해 유디트는 일단 한시름을 내려놨다.
“사실 너와 내 동생 사이에 있었던 일에 대해서 들었어.”
역시 그랬구나.
아무래도 르데샤는 동생의 일을 전해 듣고 자신이 했었던 일이 다시 떠올라서 사과한 듯싶었다. 유디트는 정말 괜찮았는데 말이다.
조금 우물쭈물하던 르데샤가 결연한 눈빛을 했다.
“그리고 유디트, 어제 둘 사이에 정확히 무슨 대화가 오갔는지 모르지만……. 르데인에 대해서라면 이제 신경 쓰지 않아도 괜찮아.”
거기까지 말한 르데샤는 입술을 몇 번 달싹거리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너는 잘 모르겠지만 애가 좀 철이 없는 구석이 있어서……. 어제 얘기 듣고 내가 잘 타일렀어. 걔가 몇 번이나 민폐를 끼쳤는데도 잘 말려 주지 못해서 미안해.”
그 말에 오히려 유디트가 손을 내저었다. 사실 그녀는 속으로 굉장히 안도하고 있었다.
르데샤가 르데인의 일로 자신을 탓하거나 미워하고 있지 않아서.
“아니야, 민폐는 무슨. 오히려 내가 어제 너무 냉정하게 말한 건 아닌가 걱정했었는걸. 그나저나 르데인은 괜찮아?”
그 말에 르데샤가 겨우 입꼬리를 올리며 웃어 보였다.
“냉정하긴. 네가 그렇게 말해 준 덕에 걔도 겨우 정신 차린 거지. 물론 앞으로 보충반이나 점심 식사에는 더 함께하지 못하겠지만…….”
말은 그렇게 했지만 르데샤의 말투에서는 은근한 걱정이 배어 나와, 역시 남매는 남매라는 생각이 들었다.
르데샤는 입버릇처럼 제 동생과 사이가 나쁘다며 투덜대곤 했지만, 막상 동생의 상태는 걱정되는 모양이었다.
역시 어제 내가 너무 심하게 말한 걸까. 르데샤의 말을 들어 보니 꽤 상처받은 것 같은데.
유디트는 한숨을 쉬며 일부러 챙겨 온 요점 정리 노트를 내밀었다.
“이거라도 르데인에게 건네줘. 어제 약속한 거야. 보충반에 더 참석하지 못한다니 아쉽지만 르데인에겐 이게 더 도움이 되겠지.”
유디트의 말에 르데샤가 살짝 눈물을 글썽였다. 마치 천사를 목격한 양 감동한 얼굴이었다.
“무슨 소리야. 이렇게 챙겨 주는 것만 해도 감지덕지지.”
노트를 받아 들며 다시 한번 르데샤가 유디트를 향해 주의를 주었다.
“그리고 혹시라도 르데인이 포기 못 하고 또 괴롭히려 들면 나한테 얘기해. 이번엔 아버지께 말씀드려서라도 다른 학교로 보내 버리든가 할 테니 말이야.”
“알겠어.”
딱히 이제 와서 르데인이 자신을 곤란하게 할 것 같진 않았지만 르데샤가 안심할 수 있도록 유디트는 재깍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르데샤가 웃는 얼굴로 다시 교실 앞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러고 보니 곧 수업이 시작될 시간이었다. 문득 유디트는 자신의 오른쪽 자리를 바라보았다.
왜 아직도 체이스가 오지 않지?
체이스는 보기보다 시간 약속을 잘 지키는 편이었다.
심지어 최근에는 자신보다도 먼저 교실에 도착해 여유롭게 유디트를 기다리고 있기도 했다.
‘유디트, 그렇게 아슬아슬하게 다니다가 수업에 늦으면 어쩌려고 그래?’
그렇게 잘난 척하며 제게 잔소리하던 모습이 생생히 기억났다.
하지만 유디트에게 있어 그의 그런 자신만만한 태도는 황당하기 그지없을 따름이었다.
수업에 일찍 오면 뭘 하나. 정작 회계학 교과서나 필기구는 들고 오지도 않으면서, 그러면서 뻔뻔하게 제게 다 빌려 달라고 할 거면서.
그때 르데샤도 유디트의 시선이 한 곳에 못 박혀 있다는 것을 발견했는지, 잡았던 손을 놓아주며 말했다.
“그러고 보니 체이스가 아직 안 왔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