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게 다정하지 마세요 41화
고개를 갸웃거린 르데샤가 이어서 말했다.
“요 근래에 수업에 꼬박꼬박 참여한다 싶더니만 오늘은 땡땡이치려는 거 아냐?”
“그런가?”
만약 체이스가 수업에 빠지는 일이 생긴다면 귀띔 정도는 해 줄 줄 알았는데.
그렇게 생각하니 살짝 서운한 마음이 들었다. 유디트는 빈자리를 보며 중얼거렸다.
“아니면 조금 늦는 건가? 지각하는 걸지도 몰라.”
하지만 수업의 시작을 알리는 종이 울리고, 카렐 교수가 교실에 들어와 강의할 때까지도 유디트의 오른쪽 자리는 텅 비어 있었다.
이상하게 강의에 집중할 수 없었다.
체이스가 옆에 앉아 꾸벅꾸벅 졸 때보다 지금이 더 정신이 산만한 것 같았다. 아무런 방해 요소도 없는데 이상한 일이었다.
유디트는 펜을 잡은 손을 바쁘게 움직여 필기하면서도, 눈동자를 굴려 계속해서 옆자리를 보았다.
요새 들어 성실하게 수업을 듣던 체이스였는데, 벌써 힘에 부치기라도 한 걸까?
결국 그는 수업이 끝날 때까지 교실에 오지 않았다. 완전한 땡땡이였다.
수업을 마친 후, 카렐 교수가 못마땅하다는 얼굴로 유디트 쪽으로 걸어오는 게 보였다.
혼탁한 눈빛으로 유디트의 빈 옆자리를 본 카렐 교수는 쯧, 혀를 찼다.
“결국 체이스가 수업을 빠졌구나.”
“아픈 게 아닐까요? 말도 없이 빠질 정도라면.”
유디트는 저도 모르게 체이스를 옹호했다.
“감기에 걸렸을 수도 있어요.”
말이 입 밖으로 튀어나오고 나서야 아차 싶었다.
바보가 아닌 이상 이런 여름에 감기에 걸릴 리가 없지 않은가. 허접한 변명에 유디트의 귓불이 조금 붉어졌다.
카렐 교수는 그런 유디트를 빤히 쳐다보았다.
“흠…… 유디트. 너는 체이스가 왜 수업에 빠졌는지 모르는 거냐?”
체이스는 아무런 말도 해 주지 않았으니 당연히 유디트가 알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런데 카렐 교수는 왜 이런 질문을 제게 하시는 걸까. 혹시 교수님께서는 체이스가 왜 수업을 빠진 건지 알고 계신 걸까?
“뭐, 물어볼 것도 없이 표정을 보니 모르는 것 같구나. 네게 알리기가 창피해서 숨긴 건가? 체이스는 지금 벌을 받는 중이다.”
“네? 벌이요?”
어떻게 보면 감기에 걸렸다는 것보다 더 황당한 말이었다.
설마 그사이에 체이스가 무슨 사고라도 친 건가?
당황스러움에 눈만 끔벅이고 있는데 카렐 교수가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어깨를 으쓱했다.
“역시 몰랐던 모양이지? 오늘 아침에 교수 회의에서 듣기론, 체이스가 허락도 받지 않고 부서장의 권력을 남용했다고 하더구나.”
“……권력을 남용해요?”
“그래, 사실 반성문 하나로 끝날 일이었는데 그동안 쌓인 벌점이 워낙 많아서 벌 청소를 하며 며칠 근신을 하게 된 것 같더구나.”
“……설마.”
부서장의 권력 남용이라니.
거기서 불길한 느낌이 들었다. 유디트의 황금색 눈동자가 어찌할 바를 모르고 흔들렸다.
“혹시 부 신청 기간도 아닌데 부장의 마음대로 새로운 부원을 받거나 하는, 그런 종류의 권력 남용 말인가요?”
“그래. 그건 용케 알고 있었구나? 어째서 벌을 받는 건 몰랐으면서 그건 알고 있는 거지?”
카렐 교수는 흐음, 침음성을 흘리며 턱 끝을 가볍게 매만졌다.
“혹시나 해 묻는 건데, 그 부원이 너는 아니겠지?”
“…….”
“……너였구나.”
카렐 교수가 어이없다는 듯 인상을 찡그리다가 이내 바람 빠지듯 웃었다.
하지만 잔뜩 심란해진 상태라 유디트의 귀에는 그 소리가 들려오지 않았다.
분명 자신이 검술부에 들어갈 수 있냐고 물었을 때, 체이스는 별거 아니라는 듯이 대답했었다.
나 때문에 곤란해지는 게 아니냐 물었을 때에도, 그는 어려운 일도 아니니 괜찮다며 자신만만하게 웃어 보이기까지 했었다.
분명 그랬으면서 혼자 근신에 벌 청소까지 받게 되다니. 체이스는 바보가 분명하다.
만약 그가 벌을 받게 될 줄 알았더라면 유디트는 굳이 부서를 바꾸려 하지 않았을 것이다.
아셀과 마주쳐서 곤란해지는 것보다 남에게 피해를 끼치는 게 더 싫었으니까.
마음이 한순간에 복잡해졌다.
체이스는 왜 부러 자신에게 쉬운 일이라며 거짓말을 했던 걸까?
굳이 초보자인 유디트에게 검술을 가르치는 수고까지 자청하면서 말이다.
수련을 중요시하는 체이스가 자신 때문에 본인이 수련할 시간까지 뺏기고 말았다. 게다가 벌까지 받게 되었다.
그런데 그것에 관해선 입도 벙긋하지 않다니.
유디트가 침울한 표정으로 고개를 내리깔고 있자 카렐 교수가 위로하듯 입을 열었다.
“유디트, 혹시 죄책감을 느끼고 있는 건 아니겠지? 어차피 걔가 근신하게 된 데에는 그동안 쌓여 왔던 벌점의 영향이 더 크니까, 네가 신경 쓸 필요는 없다.”
그러나 그의 말에도 유디트는 여전히 표정을 풀지 못했다. 그러자 카렐 교수가 덧붙였다.
“그리고 어쩌면 그 녀석은 오히려 잘되었다고 생각하고 있을지도 몰라. 지루한 수업을 땡땡이칠 명분이 생겼으니 말이야. 신이 나서 콧노래를 부르고 있을지도 모르지.”
카엘 교수 나름대로 열심히 달래 주고 있음에도 유디트의 축 처진 어깨는 되돌아올 줄을 몰랐다.
“그런데 이런 시기에 근신은 너무 가혹한 것 아닌가요?”
체이스의 일에 대해 따지고 드는 게 본인에게 좋지 못한 일이란 걸 알면서도 유디트는 멈출 수 없었다.
“체이스는 지금 출석 일수가 부족해서 졸업이 간당간당한 상태잖아요.”
말하다 보니 왠지 제 감정이 더 북받쳐 오르는 기분이었다.
“요즘 땡땡이치는 일 없이 공부도 열심히 하고 수업도 열심히 듣고 있었는데, 이렇게 되면 체이스의 졸업은…….”
한참 열변을 토하던 유디트가 우물쭈물하며 말끝을 흐렸다.
버릇없다며 혼내시려나?
긴장한 얼굴로 올려다보았지만 카렐 교수는 유디트를 가만히 내려다보기만 할 뿐이었다.
그런데 잠시 후, 놀랄 만한 일이 벌어졌다. 카렐 교수가 유디트의 분홍색 머리통 위에 손바닥을 올리더니 쓱쓱 쓰다듬기 시작한 것이다.
“헉……!”
곁에서 두 사람을 지켜보고 있던 르데샤가 헛숨을 들이키는 소리가 들렸다. 얼굴 한가득 ‘말도 안 돼’라고 쓰여 있는 듯했다.
물론 쓰다듬을 받은 당사자인 유디트도 깜짝 놀라 눈을 화등잔만 하게 떴다.
이내 카렐 교수가 자애롭게 미소를 지어 보이며 입을 열었다.
“그건 걱정 말거라, 유디트. 듣기로 체이스가 출석 점수가 모자란 건 이 회계학 수업뿐이라고 알고 있는데, 보충반에 참여하는 것으로 출석 점수는 어느 정도 인정해 주기로 했으니까 말이다.”
그 말에 유디트가 놀란 눈빛으로 카렐 교수를 올려다보았다.
그래서 내게 보충반 수업을 제안하신 거였구나.
그녀는 뒤늦게 깨달았다. 유디트가 카렐 교수의 마음 씀씀이에 속으로 탄복하고 있는 동안, 그새 교수의 눈빛이 다시 엄중하게 변했다.
“사실 교수들이 벼르고 있었어. 체이스 카르단디는 올해 졸업을 못 하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교수들도 있었거든.”
대체 왜죠? 하고 묻기에는 유디트도 짐작 가는 바가 많았다.
“무투 대회 가산점을 이용하는 게 물론 학칙에 어긋나는 것은 아니지. 하지만 꼼수라고 느끼는 고리타분한 작자들도 많으니까 말이다.”
잠시 침을 꿀꺽 삼킨 카렐 교수가 이어 말했다.
“학생이 수업 시간에 참석해야지 이상한 제도를 활용한다며 아니꼽게 생각하는 교수들이 꽤 있더구나.”
“그렇군요.”
유디트가 생각하기에도 어느 정도 맞는 말이었다.
솔직히 자신이 교수 입장이었어도 수업을 밥 먹듯이 땡땡이치는 불성실한 학생은 졸업시켜 주고 싶지 않을 것 같다.
미운털이 아주 단단히 박혔구나.
신입생 때부터 교수님들의 총애를 받아 온 유디트로서는 안타까울 따름이었다.
그때가 되어서야 카렐 교수가 유디트의 머리에서 손을 떼었다. 그러자 유디트가 슬그머니 고개를 들며 물었다.
“그러면 혹시 체이스는 어디서 벌 청소를 하나요?”
* * *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회색 먼지가 폴폴 날리는 게 보였다. 목구멍이 간지러웠다.
기침이 터져 나올 것 같았기에 유디트는 콜록거리며 황급히 소맷자락으로 코와 입을 막았다.
체이스가 벌 청소를 하는 공간은 바로 연금술 실험실이었다.
잘못 건드렸다간 폭발하는 약품들이 많다고 알고 있는데 이런 위험한 곳을 혼자 청소하게 내버려 두다니.
카렐 교수의 말처럼 체이스는 미운털이 박혀도 아주 단단히 박힌 게 틀림없다.
유디트는 바닥에 눌어붙은 붉은 얼룩을 꺼림칙한 표정으로 바라보다가 조금 더 안쪽으로 들어섰다.
정체불명의 병들을 혹시라도 밀치거나 떨어뜨리지 않으려고 조심하며 두 눈으로는 체이스를 찾았다.
바로 그때, 누군가 커다란 빗자루로 바닥을 열심히 쓸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커다란 뒷모습을 보니 체이스인 게 분명했다. 유디트가 반가워하며 그의 이름을 불렀다.
“체이스.”
그러자 갑자기 이름이 불린 체이스가 화들짝 놀라며 고개를 번쩍 들었다. 그가 주변을 이리저리 둘러보다가, 마침내 뒤돌아섰다.
대낮인데도 연금술 실험실 내부는 너무 어두워서 그런지 형체만 간신히 식별될 정도였다.
자신과 눈이 마주친 체이스도 긴가민가했는지 고개를 기울이며 물었다.
“……유디트? 너 유디트 맞아? 귀신 아니지?”
그 말에 유디트는 처음에 그가 농담을 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체이스는 더할 나위 없이 진지해 보였다.
아무래도 다른 사람이 이곳에 올 리 없다고 생각해서 자신을 귀신이라고 의심하는 걸까.
그는 붉은 눈을 가늘게 좁히고 경계하는 기색으로 유디트를 관찰했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조금씩 그녀를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아무 말도 없는 걸 보면…… 역시 귀신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