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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 다정하지 마세요-42화 (42/110)

내게 다정하지 마세요 42화

슬슬 이 상황이 바보 같이 느껴지기도 해서 유디트가 웃음을 참으며 물었다.

“귀신이냐고 물으면서 넌 왜 계속 걸어오는 건데?”

그녀의 목소리를 듣자마자 다가오던 체이스의 발걸음이 딱 멈췄다. 그러더니 부리나케 몇 걸음 뒷걸음질 쳤다.

“너 귀신이 아니라 진짜 유디트였어?!”

귀신이라고 여길 때는 잘만 다가오다가, 사람이라는 걸 알자마자 오히려 도망가는 건 대체 뭘까.

도무지 행동의 의미를 모르겠다.

그런데 그때, 체이스의 바로 몇 걸음 뒤에 포션 선반이 놓여 있는 것이 보였다.

거기서 조금만 더 뒤로 갔다간 선반을 밀쳐 포션들을 깨뜨릴지도 몰랐다.

이에 조바심이 든 유디트는 재빨리 체이스를 향해 달려갔다.

“조심해!”

다행히 체이스는 자신이 갑자기 뛰어오자 놀랐는지 얼어붙은 채로 자리에 굳어 있었다.

덕분에 유디트는 손쉽게 그의 팔뚝을 잡고 안전한 곳까지 끌고 올 수 있었다.

“네 뒤에 선반이 있었어. 여긴 위험한 약품도 많으니까 조심해야 해. 특히 해골 표시가 있는 병들은 절대 건드리면 안 돼.”

“……고마워.”

체이스는 잠시 제 팔을 잡은 유디트의 손을 내려다보다가 이내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리고는 귀신이냐며 물은 이유를 주저리주저리 털어놓기 시작했다.

“하, 그러니까 그게…… 사실 이 실험실에 귀신이 나온다는 소문이 있어서 말이야. 물론 믿지는 않았지만-.”

그가 마른세수를 몇 번 하더니 말을 이었다.

“교수님들이 벌 청소 하기 전에 어찌나 겁을 주든지, 혹시나 해서 그만 귀신이라고 착각해 버렸어.”

“그런데 어떻게 내가 사람이란 걸 알고 더 놀라?”

“……그야 네가 여길 올 리 없다고 생각했으니까.”

그렇게 말한 체이스가 유디트의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는지 고개를 좀 더 가까이 들이밀었다.

안이 많이 어둡다 보니 거리가 너무 가깝다는 것도 인지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유디트가 볼을 살짝 붉히며 한 걸음 뒤로 물러설까 고민하는데, 체이스가 문득 질문을 던졌다.

“그런데 왜 여기에 온 거야? 내가 여기 있는 건 어떻게 알고?”

“그야…….”

유디트가 볼을 긁적이며 멋쩍은 투로 대답했다.

“네가 오늘 회계학 수업에 빠졌으니까 알았지. 카렐 교수님에게서 얘기 다 들었어. 네가 뭣 때문에 근신하게 된 건지도…….”

그렇게 말한 유디트가 곧 우물쭈물대더니 황급히 사과를 했다.

“미안해. 내가 괜히 검술부에 넣어 달라고 부탁만 하지 않았어도 이런 일은 없었을 텐데.”

그러자 체이스가 머쓱한 표정을 지어 보이더니 말했다.

“아냐, 애초부터 벌점이 많이 쌓여 있어서 간당간당했어. 네 일이 아니었어도 분명 이렇게 됐을걸.”

여전히 제 탓을 하기는커녕 오롯이 혼자 책임지려 하는 체이스를 보자 유디트는 더더욱 미안함을 느꼈다.

“그냥 그때 내 부탁 거절하지 그랬어? 나는 이렇게 곤란한 일이 생길 줄은 모르고…….”

그러나 체이스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딱히 후회되진 않아. 나는 너랑 함께 검술부 활동해서 무척 재밌었으니까.”

“…….”

몸치에다가 저질 체력인 유디트를 가르치느라 체이스는 온갖 고생을 했었다.

그가 아무리 시범을 보여 줘도 유디트가 잘 따라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런 시간들을 재미있었다고 좋게 포장해 주다니.

유디트는 체이스의 배려 깊은 모습에 조금 놀랐다.

그때였다.

“너는?”

“응?”

“너는 재미없었어?”

체이스가 어쩐지 눈치를 보는 듯 머뭇거리며 질문을 던졌다.

그 모습이 순간 좀 불쌍하기도 하고 귀여워 보이기도 해서, 유디트는 저도 모르게 이렇게 대답하고 말았다.

“……아니, 나도 재밌었어.”

어색해진 분위기를 떨쳐 내기 위해 유디트는 애써 헛기침을 하며 화제를 돌렸다.

“큼, 그러니까 나도 벌 청소 같이해 줄게.”

“도와주지 않아도 난 괜찮은데…….”

“체이스, 도와주는 게 아니라 당연히 나도 함께해야 하는 거야.”

유디트가 그렇게 완강하게 나오니 체이스도 더는 말릴 이유가 떠오르지 않았던 모양이다.

그는 유디트가 청소 도구를 집어 드는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이내 자신도 다시 빗자루를 집어 들었다.

이후 둘은 별다른 말 없이 청소를 시작했다.

연금술 실험실은 무척 넓었기 때문에 시간 내에 청소를 끝마치려면 부지런히 움직여야만 했다.

어느새 체이스가 먼지가 가득 쌓인 바닥에 물걸레질을 시작했을 때, 유디트가 불현듯 입을 열었다.

“……그러고 보니 체이스, 넌 어쩌다가 정략 약혼을 하기로 마음먹은 거야?”

체이스가 예상치 못한 질문을 들었다는 듯이 눈을 깜박거렸다. 그런 그를 유디트가 빤히 바라봤다.

역시 너무 뜬금없는 질문이었을까.

하지만 이제는 꽤 친해졌으니 이런 대화 정도는 나눌 수 있는 사이가 된 것 같은데…….

사실 두 사람은 약혼을 한 이후로 공부 관련한 이야기를 제외하면 그다지 깊은 대화를 나눈 적이 없었다.

하지만 앞으로 결혼도 할 사이인데 상대에 대해 잘 알수록 좋지 않겠는가.

그리고 무엇보다 예전부터 몹시 궁금했던 문제이기도 했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자길 사랑하지 말라던 체이스가 도무지 자진해서 약혼을 원했으리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분명 억지로 하게 된 거겠지. 그런데 하필 상대가 나 같은 평민이라니.

그때 체이스가 잠시 회상하는 듯하다가 입술을 뗐다.

“아버지께서 시킨 일에 따른 것뿐이야.”

“아…….”

역시, 부모님이 명령하신 거였구나. 하지만 왜 체이스의 부모님은 귀족인 그를 나 같은 평민과 약혼시키려고 하셨을까.

그리고 체이스는 왜 순순히 그 명령에 따른 것일까.

알고 보니 교수님 말씀은 안 들어도 부모님의 말씀은 꽤 잘 듣는 아들인 게 아닐까?

“너 보기보다 효자구나.”

그의 의외의 면모에 놀랐다는 듯이 말하자, 체이스는 재밌는 소리를 들었다는 듯이 피식 웃어 보였다.

“효자? 난 그저 귀찮았을 뿐이야. 괜히 졸업 전에 분란 일으키기 싫었으니까.”

잠시 말이 없던 그가 덧붙였다.

“사실 난 사생아거든.”

뚝, 선반을 열심히 닦고 있던 유디트의 손이 멈추고 말았다. 살며시 눈동자를 굴려 체이스를 바라보았는데, 그의 표정은 평소와 같았다.

그는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바닥에 떨어져 나뒹구는 종이들을 줍고 있었다.

그러나 태연한 척을 하는 것일 뿐일 테다. 유디트는 체이스의 아픈 상처를 건드리고 말았다는 생각에 혀를 깨물었다.

“미안해, 내가 실수를…….”

“괜찮아. 별거 아닌데 뭘.”

체이스는 어깨를 으쓱했다.

“아무튼, 좀 더 자세히 설명하자면…… 원래라면 난 있는 듯 없는 듯 살아야 하는데, 의외로 검술에 소질을 보이니까 문제가 되었나 봐.”

“…….”

“아버지는 이러다 내가 형의 후계자 자리를 위협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드신 거지. 그래서 평민 여자와 결혼하길 바라신 거고.”

체이스의 목소리는 시종일관 담담했다. 마치 자신의 일이 아닌 타인의 일을 말하는 것처럼 말이다.

유디트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한참을 고민하다가 겨우 중얼거렸다.

“아버지 때문에 많이 속상했겠다.”

“별로? 아버지가 그런 사람이라는 건 이미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으니까.”

“……그렇구나.”

여기서 어쭙잖은 위로를 건네 봤자 그에겐 전혀 도움이 되지 못할 것 같았다. 그래서 유디트는 뭐라고 더 말을 보태진 않았다.

그저 체이스가 자신의 속사정을 털어놓으며, 조금이라도 마음이 홀가분해졌기를 바랐다.

그나저나 역시 체이스도 어른의 뜻에 따라 강제적으로 약혼을 했던 거구나. 페델리안 부인의 뜻에 따라 강제로 약혼을 해야 했던 유디트처럼 말이다.

그렇다면 그도 이 약혼이 아주 달갑진 않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순간, 체이스가 큼 하고 헛기침을 내뱉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하지만 기왕 해야 하는 약혼이라면, 너랑 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고 생각하게 됐어.”

“……응?”

혹시 체이스는, 본인의 대답에 내가 상처받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해서 애써 좋게 포장해서 말해 주려는 걸까.

나도 딱히 원해서 한 약혼이 아니니 정말 괜찮은데.

유디트가 제 말을 믿지 못하는 기색을 보이자 체이스가 황급히 말을 덧붙였다.

“정말이야. ……그리고 그간 네가 나 졸업할 수 있게 많이 도와주기도 했잖아.”

“음, 그건 그렇지.”

이러니저러니 해도 보충반을 운영하고 체이스의 공부를 도와주게 되었던 건 결과적으로 나쁘지 않은 선택이었던 것 같았다.

자신이 별생각 없이 행한 일이 상대에게 큰 도움이 되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유디트의 마음이 꽤 뿌듯해졌기 때문이다.

그때 체이스가 다시 눈치를 살피며 입술을 뗐다.

“그럼 나도 궁금한 거 질문해도 돼? 너는 왜 나랑 약혼한 거야?”

“……나?”

“음, 그러니까 네가 수많은 약혼 후보 중에서 나를 골랐다고 들었는데.”

그러고 보면 약혼 상대를 선택할 권한이 없었던 체이스와는 다르게, 유디트는 직접 그를 고르긴 했다.

그 사실을 지적당한 순간 왠지 민망한 기분이 들어 유디트는 손가락으로 볼을 긁적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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