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게 다정하지 마세요 43화
“그냥…… 나도 네가 나쁘지 않은 약혼자일 거라고 생각했어.”
“어째서?”
“……검술을 열심히 하잖아. 나는 자기 일을 열심히 하는 사람을 좋아하거든.”
급하게 만든 변명치고는 그럴싸했다. 다행히 체이스도 선선히 믿는 눈치였다.
그런데 어쩐지 체이스는 유디트의 말에 조금 멈칫하는 것 같더니 이내 작게 중얼거렸다.
“……그래? 그거 나랑 똑같네.”
* * *
요즘 세드릭은 이렇게 얌전할 수가 없을 정도로 성실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어떻게든 이번 해 내로는 무사히 졸업 학점을 충족해 무사히 졸업을 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덕분에 불성실하던 평소 모습과는 다르게 그는 모든 수업들에 빠짐없이 참석하고, 과제까지 성실히 해 나가는 등 매일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일과를 소화하고 있었다.
어디 그뿐이랴. 친우인 아셀을 위해 틈틈이 보충반에 참석해 유디트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기까지 했다.
그는 고개를 들어 열심히 칠판 위에 공식들을 적어 나가고 있는 유디트를 주시했다.
아셀을 멀리한다는 말은 거짓이 아니었는지, 그 이후로도 눈을 부릅뜨고 유디트를 감시했지만 둘 사이에 어떤 접점도 생기지 않았다.
오히려 두 사람이 싸웠다는 소문만 아카데미에 무성하게 퍼져 나갔을 뿐이다.
아무튼 이대로만 가면 둘 사이는 순조롭게 멀어질 테고, 무사히 졸업만 하면 자신도 더는 유디트를 마주할 일은 없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며 안심한 것이 바로 며칠 전의 일.
세드릭은 멍하니 눈을 깜빡이며 제 눈앞의 상대를 바라보았다.
“아무래도 네 말이 맞는 것 같아.”
“뭘?”
“내가 유디트 때문에 휘둘리는 걸 우리 집안에서 알면, 유디트에게 피해가 갈 거라는 말.”
본가에서 돌아온 아셀이 자신을 불러내자마자 막 털어놓은 말이었다.
그에 영문을 몰라 세드릭이 입도 벙긋하지 못하는 사이, 아셀이 깊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이거 봐.”
그가 곧 품에서 하얀 편지 뭉치들을 꺼내 세드릭의 앞에 내밀었다.
“전부 어머니께서 유디트에게 보낸 편지들이야.”
그에 세드릭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편지를 받아 들었다. 그러자 아셀이 읽어 봐도 좋다는 듯 고갯짓했다.
세드릭이 시선을 아래로 내려 천천히 전달받은 편지를 살펴보기 시작했다.
구구절절 긴 내용이었으나, 거기에 담긴 핵심은 대충 이러했다.
[네가 진정 아셀을 위한다면, 이제 그만 거리를 두고 내가 주선해 준 사람과 약혼을 하는 것이 어떻겠니.]
페델리안 부인이 유디트에게 이런 편지를 보낸 이유는 쉽게 추측할 수 있었다.
두 사람 다 아직은 아카데미를 다니고 있었기에 같은 학생이라서 신분의 제약이 덜하지만, 졸업하고 나면 상황은 크게 달라진다.
그때가 되면 아셀과 유디트가 붙어 다니는 것에 대해 사교계에 다양한 구설수가 나돌 테고, 그 둘이 어릴 적 친구였다는 말도 더 이상 면죄부가 되어 주진 못할 테니까.
일부 보수적인 귀족들은 눈살을 찌푸리며 그들을 안 좋게 생각할 것이 분명했다.
세드릭이 다 읽었다는 듯이 고개를 쳐들자 아셀이 그런 그를 향해 흐릿한 미소를 지어 보이며 말했다.
“……이해했어? 유디트는 어머니의 명령 때문에 체이스 카르단디와 원치 않은 약혼을 하고, 나와 멀어지려고 했던 거야.”
거기까지 말한 아셀이 답답했는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차라리 나한테 한번 말이라도 해 줬다면 좋았을 텐데, 여태껏 이런 사실을 숨기고 있었다니. 유디트는 내가 미덥지 않았던 걸까.”
“…….”
“그동안 유디트는 얼마나 혼자서 마음고생이 심했을지 모르겠어. 진작 눈치채지 못한 나 자신이…… 정말이지, 너무나 후회돼.”
그렇게 말한 아셀은 정말로 괴롭다는 양 눈을 질끈 감았다.
하지만 그때까지도 세드릭은 어안이 벙벙한 상태라 마땅한 대답을 내놓지 못하고 있었다.
한참 후에야 겨우 정신을 차린 그가 입을 열었다.
“……그래서? 그게 뭐 어쨌는데?”
“그야 이제라도 알았으니 잘못된 일을 바로잡아야-.”
“뭐?”
아셀이 유디트가 억지로 약혼했음을 밝혀낸 건 분명 의외의 사실이었다. 하지만 그래 봤자 달라질 게 뭐가 있단 말인가?
심호흡을 내뱉으며 속을 진정시킨 세드릭이 곧 달래듯 입을 열었다.
“……네 어머니께서 유디트에게 약혼을 종용하시긴 했지만 결국 약혼을 하기로 결심한 건 유디트잖아. 본인 선택인데 뭘 바로 잡겠다고 말하는 거야?”
“하지만 상황에 떠밀려서 한 결정을 오로지 자신의 의지라고 볼 순 없잖아.”
“하,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아셀? 이미 상황이 다 끝났다는 걸 왜 몰라?”
세드릭이 골치가 아프다는 듯 곧 자신의 머리를 부여잡았다. 예상보다 그의 반응이 날카롭다고 생각한 아셀이 심각한 표정이 되어 물었다.
“그게 무슨 소리야?”
“네가 이렇게 걱정해 주지 않아도 유디트는 행복하게 잘 지내고 있다고.”
“…….”
“억지로 약혼을 했건 말건 그게 지금 와서 무슨 소용이란 말이야. 유디트는 지금 체이스와 약혼해서 대단히 만족하고 있을 텐데.”
“네가 그걸 어떻게 확신하는데?”
아셀의 목소리가 조금 낮아졌다. 그에 세드릭은 이번 기회에 유디트에 대한 그의 모든 정을 떨어뜨리기로 마음먹었다.
설사 과장을 보태는 한이 있더라도 말이다.
“나 회계학 보충반에 참여하고 있는 것 알고 있지. 거기서 유디트랑 체이스 둘이 아주 매일 같이 찰싹 붙어 다녀, 아주 눈꼴사나울 정도로 말이야.”
사실 보충반에서 유디트는 모든 학생들을 똑같이 대우했기에 그런 적은 없었지만, 세드릭은 뻔뻔하게 사실을 날조했다.
그러자 아셀의 눈동자가 곧장 당황으로 흔들렸다.
“……네 말은, 유디트가 체이스를 좋아하고 있다는 말이야?”
“글쎄, 난 유디트가 아니니 정확히는 모르지. 하지만 남들 앞에서도 보란 듯이 그럴 정도면 뒤로는 어떨지 뻔하지 않겠어?”
잠시 말을 멈춘 세드릭이 이번에는 어조를 바꾸어 달래듯이 말을 이었다.
“그러니까 유디트는 잊어버려. 개는 너 없이도 이제 행복하게 잘 지내고 있는데, 왜 굳이 방해하려 드냐고. 안 그래?”
“…….”
“네가 진정 유디트를 친구로 생각한다면, 차라리 둘이 행복하기를 빌어 주는 편이 낫지. 그게 유디트도 바라는 바일 테고.”
물론 유디트가 아셀 없이도 행복할 가능성은 현저히 낮았다. 세드릭은 일전에 유디트와의 대화에서 그녀가 아직 아셀을 좋아하고 있음을 확인했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아셀이 혹시라도 유디트가 자신 때문에 억지로 약혼을 했다는 것에 대해 큰 죄책감을 느끼게 될까 봐.
그래서 페델리안 부인이 모처럼 공들여 세운 계획이 일시에 무너지게 될까 봐, 천연덕스럽게 거짓말을 했다.
아셀은 낯빛이 대번에 흐려졌다.
왜 저런 얼굴인 거지?
유디트에게 잘된 일이라고 말한다면 분명 그의 죄책감이 사그라들 줄 알았는데, 오히려 표정이 더 굳어지다니 말이다.
아셀은 믿기지 않는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유디트가 정말 체이스를 좋아하게 됐다고? 그러면…… 언젠가 결혼도 하게 된단 건가.”
그는 당연한 사실에 굉장히 충격받았다는 것처럼 연신 같은 말을 되뇌고 있었다.
상태가 그러하니 심상찮음을 느낀 세드릭이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왜 그런 반응이야?”
“……내가, 어떤 반응인데?”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만 같아.”
그제야 아셀이 흔들린 표정을 갈무리했다.
솔직히 세드릭은 그런 아셀이 이해가 되질 않았다.
더불어 매번 그가 유디트에게 보이는 과민한 반응들이 마치 있을 수 없는 사실을 가리키고만 있는 것 같아서, 자꾸 불안해졌다.
원래대로라면 아셀은 페델리안 부인의 편지를 읽어 볼 생각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남의 편지를 몰래 읽어 보는 것은 예의에서 어긋나는 행위니까 말이다. 예의를 중시하는 아셀이 그럴 리가 없었다.
대체 아셀은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거지? 아니면 정말 혹시 그 평민을-.
이어지는 생각에 고개를 내저은 세드릭이 다시 입을 열었다.
“솔직하게 말해 봐. 너는 대체 어쩌고 싶은 건데? 뭐가 불만인 거야?”
“나는.”
머뭇거리며 말을 고르던 아셀이 이내 젖은 목소리로 말했다.
“유디트가 내 곁에 있었으면 좋겠어. 지금까지 그랬던 것처럼, 앞으로도 쭉.”
이상한 말이었다. 그 분홍 머리 여자애가 무슨 애착 인형도 아니고 말이다.
세드릭은 픽 웃음을 흘렸다.
“그건 유디트가 없으면 심심해서야. 아니면 감히 유디트 따위가 나를 떠나다니, 하는 오기 때문이야?”
“…….”
“그것도 아니면 너 설마 유디트를 네 소유물처럼 생각하는 거야?”
“그럴 리 없잖아. 그만큼 유디트가 내게 소중하다는 거야. 떨어져 지낸다는 건 상상조차 하기 싫을 정도로.”
아셀이 제 기분을 포장해서 말하긴 했지만, 세드릭은 가소롭다는 듯이 웃을 뿐이었다.
상대가 소중하다면 그만큼 상대방의 의사를 존중해 주는 것이 기본 아닌가?
지금 아셀이 하는 행동은, 유디트를 위해서라는 그럴싸한 명목하에 그녀의 의사를 완전히 무시하는 것밖에 되지 않았다.
전적으로 그의 욕심대로만 움직이고 있었으니까.
평소 배려심 깊고 어른스럽던 아셀은 대체 어디로 간 걸까.
세드릭은 팔짱을 끼고 마지막으로 설득하기 위해 물었다.
“유디트를 곁에 둔다 치자. 그렇다면 네 평판은 어쩔 거야? 곧바로 곤두박질칠 텐데. 네가 아카데미 졸업 후에도 평민 여자 따위와 어울린다는 걸 알면 귀족들이 수군거리지 않겠냐고.”
“상관없어.”
“뭐, 당연히 네 앞에서 대놓고 그런 말을 할 간이 배 밖으로 튀어나온 작자는 없겠지. 하지만 유디트는 다르잖아. 온갖 수군거림에 휩싸이게 될걸.”
“그것도 상관없어.”
망설임 없이 대답을 내뱉은 아셀이 곧 그린 듯한 미소를 얼굴에 띄우며 말했다.
“어차피 몇 명 본보기를 보여 주면 알아서 사그라들 테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