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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 다정하지 마세요-44화 (44/110)

내게 다정하지 마세요 44화

“……뭐?”

“입방정을 떨어 댄 사람들에게까지 내가 자비로울 필요는 없지 않겠어?”

“…….”

세드릭은 얼떨떨해졌다. 뭔가 아셀이 할 말이라고는 생각되지 않는 말이었기 때문이었다.

대체 유디트가 뭐길래 아셀이 이렇게까지 변해 버린 걸까.

“그렇게까지 해서라도, 유디트를 곁에 붙잡아 두고 싶어? 너 그거 욕심이야.”

“욕심이라고?”

“그래.”

세드릭의 말에 아셀은 무언가 충격을 받은 얼굴이었다. 그는 입술을 꾹 다물고 고민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고민을 마친 듯 아셀이 입을 뗐다.

“나는…… 다른 걸 더 바라지 않아. 유디트에게 보좌관으로 일해 달라는 것도, 예전처럼 친구로 지내 달라는 것도 아니야.”

“…….”

“그저 곁에만 있어 달라고 하는 건데, 이게 욕심이야?”

“너…….”

그게 바로 욕심이었다. 하지만 아셀은 지금 자신이 하고 있는 행동이 무엇인지조차 모르는 모양이었다.

하긴, 지금까지 원하는 것을 손에 넣는 게 당연한 삶을 살아왔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일까.

어느새 그들이 얘기하고 있는 테라스 위로 달빛이 비쳐 들었다. 그러자 아셀의 뒤로 짙은 그늘이 지는 것이 보였다.

그 모습이 오늘따라 유독 선득해 보여서, 세드릭이 멈칫하다 다시 입을 열었다.

“그래, 다 좋아. 그런데 지금 와서 유디트의 마음을 되돌리는 게 가능하냐고.”

그 순간, 아셀의 눈에 차가운 웃음이 스쳐 지나갔다.

“……그래서 말인데 세드릭, 사실 네 도움이 좀 필요해.”

“내 도움?”

“응.”

왠지 불길한 기분이 들었다. 심장이 불규칙적으로 쿵쿵대는 것을 느끼며 세드릭이 조심스레 질문했다.

“뭔데?”

혹시나 해서 묻긴 했지만 세드릭은 그의 의견을 옹호해 줄 생각도, 부탁을 들어줄 생각도 없었다.

아셀이 유디트와 멀어져야 한다는 그의 생각은 아직도 유효했으니까.

하지만 이어지는 아셀의 말을 들은 뒤에는, 세드릭은 어떠한 반응조차 할 수 없었다.

그저, 한참 후 그의 입술을 뚫고 튀어나올 수 있었던 말은 이것뿐이었다.

“……너, 미쳤구나.”

* * *

다음 날 세드릭은 아셀과 나눴던 대화를 떠올리며 교정을 서성였다. 기분이 몹시 심란했다.

‘설마 유디트를 향한 집착이 그렇게 엄청날 줄은…….’

그건 단순한 어린 시절 소중한 친구이기 때문이라는 말로 설명될 감정이 아니었다.

아셀은 어떤 방식으로든, 유디트에게 깊이 빠져 있는 게 분명했다. 본인은 절대 인정하지 않으려 들긴 했지만.

그때, 걷고 있던 그의 눈앞에 한 학생이 눈에 띄었다.

르데인 로지에나.

보충반에서 자주 만났던 후배였다. 그는 유디트를 좋아하는 건 아닌지 의심이 될 정도로 늘상 그녀의 곁에 붙어 다니던 인물이기도 했다.

그런데 꼬박꼬박 보충반 수업에 참여해 왔던 그는 얼마 전부터 보충반에 나오지 않고 있었다.

무슨 일이 있나 궁금하게 여기고 있었는데, 설마 이런 곳에서 마주치게 될 줄이야.

아셀과 나눈 대화 때문에 복잡해진 머리를 달랠 겸, 세드릭은 천천히 그에게로 다가갔다.

“안녕, 오랜만이다?”

“안녕하세요, 세드릭 선배님.”

르데인이 고개를 숙여 인사를 건넸다.

세드릭은 한 손을 들어 그 인사를 받아 준 뒤, 어째 지난번에 봤을 때보다 한결 초췌해진 그의 안색을 훑었다.

두 사람은 가문끼리도 서로 교류를 하는 사이였기에 친하지는 않아도 오래전부터 서로의 존재를 인지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맹세컨대 이렇게 상태가 안 좋아진 모습은 처음 보는 것 같았다.

“그런데 너 안색이 왜 그러냐? 요즘 보충반에도 보이질 않는다 했더니 어디 아픈 모양이지?”

“…….”

어쩐지 르데인의 표정이 더 울적해졌다. 세드릭은 우중충한 분위기를 환기시키기 위하여 농담을 건넸다.

“뭐야? 왜 대답이 없어? 아니면 유디트에게 차이기라도 했어?”

그런데 그렇게 말한 순간, 르데인의 몸이 움찔하더니 금세 눈에 눈물이 맺히기 시작했다.

평소 강아지처럼 유디트에게 치대던 모습이 떠올라 그렇게 말한 것뿐인데 저렇게 진지하게 반응하다니, 설마-.

“……정말 차였다고?”

소 뒷걸음질 치다가 쥐를 잡는다더니, 딱 그 꼴이었다. 르데인은 여전히 아무 말도 없었다.

정말 유디트에게 고백하다 차이기라도 한 모양이다. 아니면 그 비슷한 상황에 처했거나.

그래서 창피한 마음에 보충반에도 내내 불참해 왔던 거라면 모든 이야기가 착착 맞아떨어진다.

하지만 동시에 의문이 들었다.

대체 유디트가 뭐길래? 그 평민 계집애가 뭐라고 다들 걔한테만 관심을 보이는 거야?

아셀이나 이 녀석이나, 요즘 제 주변에 온통 이해할 수 없는 사람투성이였다. 골치가 아파진 세드릭은 머리를 잔뜩 헝클어뜨렸다.

그때 입술을 잘근거리고만 있던 르데인이 눈물을 닦아 내며 물었다.

“왜 제가 유디트 선배님을 좋아한다고 생각하세요? 저 안 좋아하는데요.”

“말이 되는 소리를 해라.”

뒤늦게 발뺌하는 르데인을 보며, 세드릭은 코웃음을 쳤다.

“지금 창피해서 아닌 척하는 거지? 그런데 어쩌냐. 너 이미 나한테 다 들켰는데.”

“아닌 척하는 게 아니라, 정말 좋아하지 않는다니까요? 제가 평민에게 그런 마음을 품었을 리가 없잖아요.”

르데인의 필사적인 말에도 세드릭은 어깨를 으쓱할 뿐이었다. 그는 평소 르데인의 행동을 또박또박 읊어 주었다.

“퍽이나 그러겠다. 평소에도 유디트만 보면 눈을 반짝거리질 않나, 관심을 줄 때 안 줄 때에 따라서 태도가 그렇게 휙휙 바뀌면서.”

“그건-.”

“거의 주인에게 귀염받고 싶어서 안달 난 강아지 같던데. 대체 뭘 좋아하지 않는다는 거야?”

세드릭의 말에 르데인의 어깨가 움찔 떨렸다.

“그건…… 연기였어요. 사정이 있어서 좋아하는 척한 거란 말이에요.”

그러자 세드릭의 얼굴이 더욱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바뀌었다.

“좀 참신한 변명 없어? 그런 연기를 왜 하는데?”

그에 할 말이 없었는지 르데인이 마침내 입을 다물자 세드릭은 속으로 작게 혀를 찼다.

불쌍한 녀석.

세드릭은 르데인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그리고 기운 차리라는 의미로 몇 번 두드려 주었다.

“어쨌든, 기운 내라. 결과적으로 놓고 보면 차라리 잘된 거야.”

“무슨 의미죠, 그게?”

“어차피 넌 유디트와 잘 될 가능성이 없으니까.”

“……?”

곧 르데인의 눈에 세드릭에 대한 의문이 가득 차는 것이 보였다. 눈물을 그친 그가 세드릭을 올려다보며 물었다.

“왜 그렇게 자신하시는데요?”

그의 질문에 세드릭이 잠시 입꼬리를 비틀더니, 곧 선선히 대답해 주었다.

아셀의 마음이 확고하다는 걸 알게 된 이상, 곁에 들러붙는 떨거지들은 견제시킬 필요가 있었기에 때문이다.

“……그야 네가 죽었다 깨어나도 못 이길 만한 사람이 라이벌이니까.”

세드릭은 자세한 내용은 밝히지 않고 그렇게만 말했다.

잠시 후 들려오는 종소리에, 그가 한차례 기지개를 폈다.

“아이고,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네. 수업이 있어서 난 이제 가 봐야겠다. 힘내라.”

그리고는 세드릭이 빠르게 자리를 떠나 버렸다. 혼자 남겨진 르데인은 깊은 생각에 사로잡혀 멍하니 서 있었다.

내가 유디트를 좋아하고 있다고?

아니, 내가 좋아할 리가 없잖아. 공부 잘하는 것 빼곤 별 볼 일 없는 평민일 뿐인데…….

물론 얼굴이 좀 예쁘장하고 귀엽게 생긴 데다, 머리도 꽤 좋아 보이긴 하지만 고작 그런 것만으로 내가 좋아할 리가 없잖아?

하지만…….

정말 유디트가 그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었던 거라면, 그녀에게 거절당했던 순간부터 제 심장이 이렇게까지 아플 일도 없지 않았을까.

그리고 지금까지 유디트를 생각하며 힘들어하는 일도 없었겠지.

문득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르데인의 가슴이 뻐근하게 아려 오기 시작했다. 동시에 그의 눈에 또다시 눈물이 고여 들었다.

그래서였구나. 그래서였어.

저도 모르게 유디트에게 마음을 줘 버렸기 때문에, 그녀의 행동 하나하나가 이토록 서운하고 아프게 다가오는 거였다.

마침내 자신의 감정을 깨달은 르데인은 허탈한 숨을 내뱉었다.

“하.”

인정하기 싫은 현실에 눈을 질끈 감아 보았으나, 마음을 자각하자마자 애써 자제하고 있던 유디트에 대한 생각들이 머릿속에서 소용돌이치기 시작했다.

지금 이 순간, 유디트가 너무나도 보고 싶었다. 동시에 그녀에게 남은 자신의 마지막 기억이 고작 그런 모습이라는 게 떠올라 견딜 수 없이 비참해졌다.

미안하다고 사과하면 다시 받아들여 주지 않을까. 겨우 감정을 깨달았는데, 바로 포기해야만 하는 상황이라니.

르데인이 마른세수를 하며 고통에 찬 한숨을 내뱉을 때였다.

그 순간, 조금 전 세드릭이 했던 말이 그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그야 네가 죽었다 깨어나도 못 이길 만한 사람이 라이벌이니까.’

대체 그 말은 무슨 의미였을까?

내가 죽었다 깨어나도 못 이길 사람이라니, 그런 사람이 그렇게 흔할 리가 없지 않은가.

르데인이 곰곰이 머릿속에 떠오르는 인물을 추려 보았다.

적어도 체이스가 아닌 건 분명했다. 만약 그 라이벌이 체이스라면 세드릭이 굳이 정체를 밝히지 않을 이유가 없었으니까.

그렇다면…… 유디트의 소꿉친구인 아셀을 말하는 걸까? 하지만 그렇게 완벽한 학생회장이 설마…….

하지만 유디트에게 큰 영향을 끼칠 수 있으며, 세드릭과도 알고 지내는 인물이라면 딱 맞아떨어지긴 한다.

눈물을 그친 르데인은 조금 전 세드릭이 사라진 방향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왠지 지금이라도 다시 물어보러 쫓아가 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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