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게 다정하지 마세요 46화
열이 올라 의식이 불분명했었다. 시야는 안개가 낀 것처럼 흐렸다.
반쯤 감긴 눈으로 살며시 걸어오는 아셀을 쳐다봤다.
두어 걸음쯤 남겨 두고 나서야, 유디트는 이게 꿈이 아니라 실제로 아셀이 제 방에 들어왔단 사실을 깨달았다.
몸이 불덩이처럼 뜨거웠지만, 재빨리 돌아누워 이불을 뒤집어썼다.
혹시 갑자기 기침이 터져 나와 아셀에게 나쁜 게 옮을까 봐, 그래서 자신 때문에 아셀이 감기에 걸릴까 봐서였다.
커다란 이불 안에서 몸을 한껏 웅크린 채로 유디트가 경고했다.
‘가까이 오지 마.’
‘싫어.’
밤새 기침하느라 갈라진 목으로 겨우 한 말이었는데 아셀은 유디트의 부탁을 듣지 않았다.
늘 착하게 굴던 아셀이었으면서 하필 이럴 때 고집을 부리다니.
도리어 아셀은 거리낄 것 없다는 듯이 제게로 성큼 다가왔다. 사박거리는 발걸음 소리가 유독 크게 들렸다.
목이 사포에 긁힌 듯이 몹시 따가웠지만, 유디트는 어쩔 수 없이 다시 입을 열어야 했다.
‘가까이 오지 마. 잘못하다 감기가 옮을지도 모르잖아.’
입술에서 나오는 목소리는 제 것이 아닌 것처럼 거칠었다. 하지만 필사적으로 말한 노력이 무상하게 아셀은 간단히 대꾸했다.
‘괜찮아.’
대체 뭐가 괜찮다는 걸까.
황당한 유디트를 아는지 모르는지 어느새 바로 옆까지 다가온 아셀이 이불을 걷어 내려고 했다.
이불을 쥔 손에 힘을 꾹 주고는 있었지만, 유디트는 병자였고 아셀은 건강한 상태였다. 결국 손에서 힘이 빠져나갔고, 이불이 걷혔다.
차가운 새벽의 공기가 뺨에 닿았다. 유디트는 황급히 팔을 들어 자신의 얼굴을 가렸다. 금방이라도 기침이 튀어나올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걸 본 아셀은 고개를 갸웃했다.
‘내가 여기까지 왔는데 나랑 대화하지 않을 거야?’
유디트는 여전히 입을 막은 채로 고개를 도리질 쳤다. 빨리 방에서 나가라는 신호였다.
아셀은 그런 유디트를 가만히 내려다보다가 중얼거렸다.
‘아, 맞다. 사실 저번에 너랑 만들었던 그 눈사람, 내가 오늘 혼자서 완성했어.’
그 말에 유디트의 눈이 서서히 크게 벌어졌다. 그녀의 황당한 얼굴이 보이지도 않는지 아셀이 짓궂게 말을 이었다.
‘주방의 로즈 요리장에게 부탁해서 당근을 받았거든.’
유디트의 황금색 눈이 배신감으로 떨렸다.
눈사람을 빨리 완성하겠다는 일념으로 하루하루를 버티고 있었는데, 그걸 혼자 홀랑 완성해 버리고 말다니…….
유디트는 입술을 가리고 있던 손을 잠시 떼었다. 아셀에게 뭐라고 쏘아붙여 주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그 순간, 목구멍이 간질거리더니 기침이 터져 나올 것만 같았다. 다시 황급히 입을 틀어막으려고 했는데, 아셀이 저지했다.
‘가리지 않아도 돼.’
아셀은 유디트가 든 팔을 제게 가져오더니 손을 꼭 잡았다. 유디트가 뿌리칠 것을 염려라도 하는지 손가락을 얽어 깍지까지 끼운 채였다.
온도가 높은 유디트에겐 아셀의 손이 시원하게 느껴졌다. 그러나 그 시원함을 느낄 새도 없이 목에서는 기다렸다는 듯이 기침이 나왔다.
콜록.
큰일 났다. 이럴까 봐 이불을 뒤집어쓰고 입을 막았던 거였는데.
나름대로 했던 노력이 한순간에 물거품으로 돌아가고 말았다.
하지만 허무한 유디트와는 달리, 아셀은 가늘게 눈을 휘었다. 유디트는 다 포기하고 아셀을 노려보았다.
‘왜 웃어? 혼자 눈사람을 만들어 놓고.’
‘사실 거짓말이었어. 너랑 같이 만들기로 했었는데 나 혼자 완성했을 리가 없잖아.’
거짓말이었다고?
유디트는 눈을 크게 떴다.
아셀은 거짓말이라곤 하나도 못 할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능숙했다.
유디트는 깜빡 속아 넘어간 것이 분해서 입술을 꾹 다물었다.
그때 아셀이 유디트에게 웃음기 섞인 목소리로 조잘거렸다.
‘기왕 이렇게 된 거 그냥 너한테 감기를 옮을까? 그럼 어머니도 너를 보러 가는 걸 말리지 못하실 테고, 어쩌면 같이 이 방에서 지낼 수도 있을 텐데.’
열기가 올라 흐리멍덩한 시야였지만 아셀이 장난스럽게 웃는 것만은 선명히 보였다.
‘아플 때 곁에 아무도 없는 건 너무 외로운 일이잖아.’
그 말을 듣고 나서야 유디트는 자신이 심심한 게 아니라 외로운 거였다는 걸 깨달았다.
온종일 창밖을 바라보았던 건 눈사람을 완성하고 싶어서가 아니라 누군가와 함께 있고 싶었던 거였다고.
그리고 그날 밤, 아셀은 유디트의 마음을 읽기라도 한 듯 밤새도록 그녀의 곁을 지키며 병을 간호해 주었다.
* * *
약초학 수업 시간, 교실에 도착한 유디트는 가장 뒷자리에 앉았다.
종이 울리자마자 곧 수업은 시작되었다.
여느 때처럼 인자한 인상의 약초학 교수가 걸어 들어와 칠판 앞에 자리를 잡은 순간이었다.
교수가 책을 펼쳐 든 그때, 뭔가가 유디트의 왼팔에 닿았다가 툭 하고 떨어졌다.
집중하고 있는 척하며 속으로는 딴생각을 하고 있던 유디트는 화들짝 놀랐다.
약초학 수업은 혼자 듣는 수업이었다. 이 안에 유디트를 건드릴 만한 사람은 분명 없을 텐데.
갑자기 이렇게 수업 중간에 난데없이 장난을 걸어오다니, 대체 누구일까?
누구인지 확인하려고 왼쪽 뒤를 바라보자 비스듬하게 턱을 괸 채 자신을 응시하고 있는 한 남자가 보였다.
세드릭이었다.
그는 유디트가 의문 어린 시선을 보내자 그녀의 발치를 향해 고갯짓을 해 보였다.
그 시선을 따라가 보니 바닥에 작은 종이쪽지 하나가 떨어져 있었다.
유디트는 곧바로 그걸 주워 펼쳐 보았다.
[유디트, 혹시 아셀이 아프다는 소식 들었어? 지난번 약속과 말이 달라져 미안하지만……. 너만 괜찮다면 혹시 이 수업을 마치는 대로 함께 아셀의 병문안을 가 보는 게 어떨까.]
“…….”
[지금 둘 사이가 좋지 못한 건 알고 있지만, 아셀이 아직도 정신을 차리지 못했어. 이런 때일수록 네가 곁에 있어 주면 힘이 날지도 몰라.]
세드릭은 참 멋대로였다. 언제는 아셀과 멀어지라고 하더니, 이제는 병문안을 오라고 하지를 않나.
하지만 유디트는 아무리 아셀이 의식이 없는 상태이더라도 그의 병문안을 가는 게 여전히 꺼려졌다.
혹시 아셀이 정말 많이 아파서, 그래서 힘들어하는 모습을 보게 된다면 그동안 노력해 왔던 것들이 다 무너질까 봐 겁이 났기 때문이다.
대답이 없는 유디트를 어떻게 생각한 것인지 곧 세드릭이 쪽지 하나를 다시 그녀에게 던졌다.
툭.
다시 고개를 돌리니 세드릭이 자신을 빤히 응시하고 있었다. 그의 압박에 못 이겨 유디트는 어쩔 수 없이 새로운 쪽지를 펼쳐 봤다.
[아셀이 네가 없는 동안 많이 힘들어했어. 잠도 잘 자지 못하고 여러모로 무리를 한 듯해. 이제 나도 둘 사이를 방해하진 않을 테니, 너도 진정 아셀을 생각한다면 다시 잘 생각해 봐.]
진정 아셀을 위한다면…….
입술을 깨물던 유디트가 곧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처음에는 아셀을 위해 그와 멀어지려고 했다. 하지만 그래서 정말 네가 불행해지게 되었다면, 그것은 오롯이 내 책임일까.
그런데 그때, 세드릭이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세드릭 벨루안 학생? 지금은 수업 시간인데 왜 자리에서 일어서는 거죠?”
한 손에 책을 든 약초학 교수가 세드릭을 보며 아니꼽다는 듯이 쏘아붙였다.
세드릭이 약초학 교수에게 ‘찍혔다’는 사실은 아카데미 학생이라면 다 알고 있을 만큼 공공연한 사실이었다.
세드릭이 신입생 때 약초학 교수의 가발을 홀라당 벗겨 버린 그 사건 이후로, 약초학 교수는 그를 항상 경계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번에도 또 사고를 치는 건 아니겠지?’
그런 눈빛으로 약초학 교수가 세드릭을 노려보며, 은근슬쩍 자신의 머리에 손을 올렸다.
마치 또다시 마법에 가발이 날아갈까 걱정하는 것처럼.
“풉!”
고요함이 맴도는 교실에 누군가 웃음을 터트리는 소리가 짧게 울렸다. 약초학 교수도 들었는지 더욱 눈을 흉흉하게 빛냈다.
“방금 누구죠? 누가 수업 시간 중간에 웃은 거죠?”
당연히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약초학 교수는 관찰하듯 학생들을 요목조목 살피다가 경고했다.
“걸리면 용서하지 않을 테니 주의하도록 하세요.”
저렇게 가시 돋친 반응이라니.
관대하고 너그럽기로 유명한 약초학 교수님을 화나게 만든 세드릭도 참 여러 의미로 대단한 듯했다.
그때, 상황을 관망하듯 보고 있던 세드릭이 입술을 열었다.
“교수님, 그렇게 경계하지 않아도 괜찮아요. 저는 교수님의 가발을 벗길 생각이 없거든요.”
“……저런! 제가 지금 그것 때문에 긴장하고 있다고 생각하나요?”
“아님 말구요.”
세드릭은 가볍게 어깨를 으쓱하더니 살살 웃으며 말을 이었다.
“아무튼 저는 그저 화장실이 급해서 일어선 거였어요.”
화장실이라는 말에 약초학 교수는 뭐라고 더 말을 하지는 못했다.
“빠르게 다녀오도록 하세요. 수업에 방해되지 않게 조심스럽게 나가도록 해요.”
“네에.”
말끝을 조금 늘이며 대답한 세드릭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가 문 쪽을 향해 천천히 걸어갔다.
그런데 그때, 세드릭이 유디트의 곁을 스쳐 지나가며 슬쩍 몸을 굽혔다.
유디트가 문가에 앉아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럼 수업 끝나고 기다리고 있을게.”
그렇게 읊조린 후 세드릭이 곧 약초학 교실 문을 거세게 열어젖혔다.
쾅-.
“저, 저런!”
칠판에 무언가를 적고 있던 약초학 교수가 화들짝 놀라 뒤를 돌았다. 분필을 든 손이 분노로 부들거리고 있었다.
“분명히 조심스럽게 행동하라고 말했었는데……!”
약초학 교수가 뒷덜미를 부여잡으며 길길이 날뛰었다. 하지만 속이 타는 건 유디트도 마찬가지였다.
수업이 끝나고 나면 꼼짝없이 세드릭이 자신을 데리고 가기 위해 기다리고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화장실에 간다며 밖으로 나간 지 한참이 지났는데도 교실에 들어오지 않는 걸 보면 꽤 신빙성 있는 가정이었다.
대체 아픈 아셀을 어떤 얼굴로 마주해야 할까. 벌써 눈앞이 아득해지는 듯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