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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 다정하지 마세요-47화 (47/110)

내게 다정하지 마세요 47화

* * *

예상대로 세드릭은 교실 바깥을 지키고 서 있다가 유디트가 밖으로 나오자마자 곧장 알은체하며 다가왔다.

“바로 가도 될까?”

기왕 이렇게 된 거 아셀이 깨어 있지 않을 동안 빠르게 다녀오고 싶었기에 유디트는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해서 세드릭과 함께 나란히 복도를 걸어가고 있자니, 두 사람이 함께 다니는 게 신기했는지 얼굴을 알아본 학생들이 고개를 갸웃하며 지나가기도 했다.

느린 걸음으로 향했지만 아셀의 병실 앞에 도착하는 것은 금방이었다.

세드릭은 마치 유디트를 안내해 주는 것으로 자신의 역할은 끝났다는 듯, 문을 열어 주며 말했다.

“너 혼자 들어가.”

“……너는? 같이 병문안 가자고 했잖아.”

“나는 어제 꼬박 여기서 자리를 지키고 있었어. 어차피 아셀은 잠들어 있을 테니까, 편하게 상태 살피다 와.”

그렇게 말하곤 세드릭은 기숙사로 돌아가서 좀 쉬어야겠다며 자릴 떠나 버리고 말았다.

그래서 유디트는 아셀의 병실에 혼자 들어가게 되었다.

오직 아셀만을 위한 공간.

불이 꺼진 작은 방. 한쪽 벽면에 창문이 있긴 했지만, 두꺼운 커튼이 쳐진 상태라 빛이 들어오진 않았다.

회복실에는 오직 침대밖에는 없었다. 그리고 그 위에는 당연히 아셀이 누워 있었다.

병실 안의 풍경이 어쩐지 조금 삭막하게 느껴져, 아셀이 쥐 죽은 듯 누워 있는 모습이 왠지 더욱 안타깝게 느껴지는 듯했다.

곧바로 아셀에게 다가가려고 했지만, 혹시나 하는 생각이 들어 걸음을 우뚝 멈춘 뒤 작게 이름부터 불러 보았다.

“아셀.”

돌아오는 반응은 고요하기만 했다. 이에 유디트는 머뭇거리는 걸 그만두고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갔다.

그리고는 침대 가에로부터 멀찍이 서서 그의 얼굴을 묵묵히 내려다봤다.

살포시 그림자를 드리우는 기다란 속눈썹, 마치 잠을 자는 듯한 평온한 얼굴.

몸을 회복하느라 정신을 잃은 상태라는 게 믿어지지 않을 만큼 수려한 모습이었다.

하지만 평소보다 혈색이 창백해진 걸 보니 확실히 상태가 많이 좋지 않아 보였다. 그 사실을 자각하니 가슴이 뻐근해지는 것만 같았다.

유디트는 아셀의 몸을 살피며 어디 다친 곳은 없는지 샅샅이 훑다가, 곁에 있는 의자를 끌어와 말없이 그의 옆에 앉았다.

문득 아셀과 긴 세월을 함께 보내 왔음에도 이렇게 마음 편히 그를 바라보고 있는 건 꽤 오랜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많이 아파?”

이윽고 유디트가 가느다란 음성을 내어 물었다.

겉으로 보기에 크게 다친 데는 없어 보였지만, 혹 충격으로 속에 큰 무리가 갔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만약 그래서 이렇게 정신을 찾지 못하고 있는 거라면 어떡하지. 영영 깨어나지 못한다면 어떡하지.

“이렇게 오랫동안 기절해 있을 정도로 많이 다친 거야?”

그렇게 말한 유디트가 고개를 푹 숙였다. 어느새 목소리에 울먹임이 새어 나왔다.

“아니면 뭐가 그렇게 힘들고 피곤했던 거야. 혹시 내가 널 괴롭게 만들었니?”

의식이 깨어 있는 아셀에게는 절대 하지 못할 말이었다.

사실 이제 아셀은 저따위는 지긋지긋해졌을 텐데. 오만 정이 다 떨어졌을 텐데.

그러니 이런 자신의 걱정 따위는 하나도 필요 없고 귀찮을 뿐일 텐데.

유디트는 얼굴을 가리며 쏟아지는 눈물을 참아 냈다.

“힘들고 피곤하면 좀 쉬기라도 하지…… 대체 왜 무리를 한 거야, 왜. 나한테는 늘 건강 챙기라고 하면서…….”

그때였다. 고개를 숙인 채 눈물을 닦아 내는 그녀의 손목을 누군가 잡아챘다.

탁.

당연하게도 유디트의 옆에는 아셀밖에 없었다.

온몸의 피가 빠져나가는 듯한 느낌에 유디트는 숨을 멈췄다. 손목을 잡은 손이 떨어져 나가고 나서야 간신히 고개를 들 수 있었다.

“유디트…….”

어느새 아셀의 청회색 눈동자가 잘게 깜빡이는 그의 눈꺼풀 아래에서 빛나고 있었다.

“……뭐야, 너.”

“…….”

“깨어 있었어?”

동시에 유디트의 고개가 들리며 그녀의 붉어진 눈가가 드러났다.

“왜 의식이 없던 척했어?”

태연함을 가장하려고 했지만, 그럴 수 없었다. 목소리가 사시나무처럼 떨렸다.

아셀은 왜 정신이 들었음에도 의식이 없는 척했던 걸까.

“나를 가지고 놀았던 거야?”

“아니야, 나는.”

유디트는 순간 어지러운 느낌에 잠시 몸을 휘청였다.

놀란 아셀이 자신을 부축하려는 듯 팔을 뻗어 오는 게 보였지만, 뒤로 몸을 물려 그것을 피한 유디트가 그를 빤히 바라보았다.

아마도 아셀은, 유디트가 조금 전에 했던 말들을 모두 들었을 것이다.

유디트가 의식이 없는 아셀에게만 할 수 있었던 말들을, 마음속에만 담아두고 있었던 말들을.

“재밌었어? 내가 우스웠지.”

유디트는 고개를 숙이고 비관적으로 중얼거렸다. 그냥 허탈했다.

얼마나 아셀에게 더 휘둘려야 하는 걸까. 아셀은 얼마나 더 자신을 휘둘러야 만족할까.

눈꺼풀 안쪽이 불에 덴 듯이 뜨거웠다. 이러다간 눈물이 날 것 같아서 유디트는 혀를 꾸욱 깨물었다.

통증이 느껴지니 조금 정신이 드는 것 같았다.

“……속일 의도는 없었어. 단지 네가 울고 있어서, 달래 주려고 한 것뿐이야.”

아셀이 눈을 내리깔았다. 그는 혼란스러워 보였다. 어쩌면 아셀이 깨어 있지 않을 거라고 깜박 속아 넘어간 유디트보다도 더.

속눈썹에 그림자가 진 청회색 눈동자에 얼핏 물기가 어린 것 같기도 했다.

주변이 어두웠기 때문에 그게 착각인지 아닌지조차 분별할 수가 없었다.

이내 유디트가 여전히 날 선 어조로 아셀에게 물었다.

“혹시 일부러 세드릭이랑 짜고 나를 여기로 부른 거야?”

“아니, 세드릭은 몰라……. 조금 전에 깨어난 거라.”

잠시 숨을 고른 아셀이 유디트를 보며 이어 말했다.

“내가 의식이 있다는 건 너만 아는 거야.”

너만 아는 거야.

이 상황에서조차 유디트는 그 단순한 말 한마디에 마음이 흔들렸다.

아셀이 자신만을 다르게 대우한다는 감각이 분노로 타오르고 있던 마음에 물을 한바탕 끼얹었다. 스스로도 놀랄 만큼의 기막힌 변화였다.

하지만 아셀은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유디트를 완전히 뒤흔들겠다는 듯이 처연한 얼굴로 읊조렸다.

“그러니까 가지 마, 유디트.”

“…….”

“나 아픈데……. 곁에 있어 주면 안 될까.”

잔인한 아셀 페델리안.

하지만 잔인하다 속으로 비난하면서도 유디트는 그렇게 중얼거리는 아셀에게서 도저히 눈을 뗄 수가 없었다.

그리고 스스로를 답답하다고 여기고 몹시 탓하면서도.

결국엔 아셀의 곁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발바닥이 땅에 붙은 사람처럼 움직일 수가 없었다.

유디트는 저도 모르게 엉거주춤 일어나 있던 몸을 움직여 다시 의자에 앉았다. 어째 머리와 몸이 따로 노는 것만 같았다.

“그래도 다행이다.”

아셀은 그런 유디트를 향해 입가에 처연한 미소를 지어 보이며 말했다.

“네가 아직도 나를 걱정해 주고 있어서……. 나를 완전히 잊은 게 아니라서.”

그 말을 들으니 아픈 사람한테 도저히 더 삐딱하게 대할 마음도 들지 않아, 유디트는 입술이 아프도록 꾹 깨물었다.

그녀가 놀란 마음을 겨우겨우 가라앉히는 사이, 아셀이 곧 침대에 기댄 상체를 일으키려고 했다.

“윽-.”

그 고통스러운 신음에 당황한 유디트가 서둘러 그를 말렸다.

“아셀, 그냥 누워 있어……!”

하지만 아셀은 고개를 내저으며 끝내 끙끙대며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당황한 유디트는 그가 편히 앉아 있을 수 있도록 등 뒤에 베개를 받쳐 주었다.

정신을 잃은 지 하루가 넘었다고 했었나.

가까이서 보니 그의 머리카락도 부스스하게 일어난 것이 보였다. 항상 깔끔 단정하던 학생회장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흐트러진 모습이었다.

아셀은 이런 와중에도 자신을 신경 써 주는 유디트의 모습을 보며 피식 웃다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우리 이러고 있으니까 옛날 생각난다, 그치?”

“…….”

“예전에 네가 감기에 걸렸을 때도 내가 이렇게 널 간호해 줬었는데.”

“……몰라. 감기에 걸린 게 한두 번이어야 말이지.”

그때, 다시 의자에 앉으려던 유디트가 아셀의 유리구슬 같은 눈동자와 마주쳤다.

순간 그의 눈빛이 어찌나 애처로워 보이든지 콧등이 찡해질 정도였다.

모른 채 시선을 피하자, 아셀이 눈을 내리깔며 말을 이었다.

“그때…… 너랑 나랑 눈사람을 만들었을 때. 너 혼자만 감기에 걸려서 널 만날 수 없게 됐을 때, 그때도 참 괴로웠어.”

“…….”

“그래서 널 만나러 갔다 나도 감기에 옮아 버렸지. 하지만 몸은 불편할지언정 차라리 그게 더 낫다는 생각이 들더라고. 그만큼 너와 함께 있는 시간이 익숙하고 자연스러웠으니까.”

그의 말을 듣고 있노라니 참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분명 십 년이 넘도록 옆에서 보아 왔던 아셀이었다. 유디트는 눈을 감고도 그의 모습을 정확하게 그릴 수 있을 만큼 그에 대해 잘 안다고 자부했다.

하지만 오늘따라 그가 낯설게 보이는 까닭은 뭘까.

유디트에게 아셀은 언제나 굳건했다. 부드럽게 웃으면서도 늘 흔들림이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왠지 건드리면 부서질 것 같았다. 그리고 어딘지 모르게 외로워 보였다.

둘 다 아셀과는 지독히도 어울리지 않는 문장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참지 못하고 유디트가 냉정한 투로 입을 열고 말았다.

“대체 언제 적 얘기를 하는 거야? 그런 옛날 일 따위-.”

하지만 아셀은 그녀의 말을 듣고도 상처받지 않았다. 오히려 그의 눈에 환한 빛이 감돌았다.

“역시 너도 기억하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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