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게 다정하지 마세요 48화
“…….”
실수했다.
이러다 계속 아셀의 말에 휘말릴까 봐, 그래서 마음이 흔들리게 될까 봐 유디트는 황급히 시선을 돌렸다.
“그렇다면 이것도 기억해?”
“……뭘?”
“그날, 내가 널 간호해 주느라 감기에 걸린 게 미안하다면서 소원 하나 들어주겠다고 했던 거.”
그렇게 말한 아셀이 손을 뻗어, 유디트의 손을 꽉 붙잡아 왔다.
붙잡힌 손의 체온이 너무나도 차가워서, 유디트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돌려 그의 얼굴을 다시 응시하고 말았다.
아셀이 차분한 눈빛으로, 작게 입술을 달싹거렸다.
“너만 괜찮다면 그 소원 지금 빌면 안 될까, 유디트?”
잠시 그 모습에 넋을 잃었다가 유디트는 이윽고 정신을 차렸다.
“이제 와서 무슨 소리를…….”
아셀이 간절한 어조로 말했다.
“제발, 유디트.”
그의 일그러진 표정을 보니 유디트의 마음도 흔들리기 시작했다.
꼭 자신 없이는 못 살겠다고 말하는 것만 같아서. 그의 눈이 꼭 마치…… 자신을 향한 그리움에 가득 차 있는 것처럼 보여서.
하지만 전부 착각이다. 아셀에겐 아직도 리아나라는 좋은 약혼자가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자신의 마음이 보답받기를 기대했다간 다시 기약 없는 고통만 계속되겠지.
유디트는 고개를 돌려 애써 무늬 없이 하얀 벽만 쳐다보았다. 무릎 위에 올려둔 손을 꾹 쥐었다.
이번에도 유디트는 자신이 보고 싶은 대로 보고 아셀에게 휘둘리고 마는 걸까.
아셀이 외롭고 위태로워 보이는 건 다 자신 때문이라고, 그래서 곁에 있어 주어야 한다고.
그렇게 자신의 멍청한 행동에 이유를 붙여 정당화시키고 싶은 게 아닐까.
그때 아셀이 유디트가 흔들리는 걸 눈치챘는지 다시 힘겹게 말을 이었다.
“어려운 부탁은 아니야, 그저…… 한 가지만 들어주면 돼.”
유디트의 시선이 저도 모르게 그를 향했다.
“더 이상 너를 곤란하게 하지 않을 테니까, 마지막으로 한 번만.”
“…….”
그의 물기 어린 목소리에, 유디트의 마음도 갈팡질팡 혼란스러워지기 시작했다.
대체 너에게 있어 나란 존재는 뭐니? 그때 아셀은 마치 유디트의 속마음을 읽은 듯이 내뱉었다.
“네가 없는 빈자리가 아직 익숙하지 않아. 너와 멀어졌다는 사실도 받아들이기가 너무 힘들어. ……그토록 오랜 시간을 함께 보냈는데 단번에 너를 잊으라니 너무하잖아.”
유디트는 두 귀를 막고 싶은 심정을 겨우 억누르며, 결국 그에게 묻고 말았다.
“……그래서, 네가 원하는 게 뭔데?”
“이번 여름 파티에, 내 파트너가 되어 줬으면 해.”
그 말에 유디트가 놀란 듯 아셀을 응시했다. 그녀의 혼란스러운 심정이 낯빛에 그대로 드러났다.
“무슨 소리야? 네 약혼자는 어쩌고?”
“그건 내가 알아서 할게. 리아나는 알아듣게 설명하면 이해해 줄 거야.”
“……그래도 안 돼. 체이스가 날 어떻게 생각하겠어?”
그러나 아셀은 생각보다 끈질겼다. 그가 고개를 내저으며 말했다.
“그러니까 소원이라는 거잖아.”
이렇게까지 고집을 피우는 아셀이 이해가 되질 않았다. 하지만 이 말을 가만히 들어주고 있는 자신도 문제였다.
이따위 말 그냥 무시하고 가면 될 텐데 왜 발이 움직여지지 않는지.
“마지막으로 단 한 번만, 체이스 대신 오랜 친구였던 나를 우선해 줄 수 없을까? 마지막으로 좋은 추억을 남겨 준다면 그 기억만으로 살아갈 수 있을 것 같아.”
“너 정말…….”
아셀이 이렇게까지 제게 매달린 적이 있었던가. 일견 자존심이 없는 사람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리고 그의 말에 걷잡을 수 없이 휘둘리고 있는 스스로가 우스워졌다.
말로는 멀어진다, 멀어진다 하고는 있지만 돌아서 보면 정작 제 마음은 한 발자국도 물리지 못한 것 같아서.
결국 유디트는 그의 제안을 수락하고 말았다.
“-알겠어, 정말 이번이 마지막이야.”
혹시 이렇게 아픈 와중에 단호하게 내쳤다가 상태가 악화되기라도 하면 어쩌겠는가.
이건 단지 그의 상태가 걱정되기 때문에 내린 결정이었을 뿐이다.
유디트는 그렇게 생각하며 스스로의 마음을 다잡으려 했다.
“고마워, 유디트.”
하지만 아셀은 유디트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안도하며 환히 웃어 보였다.
그의 눈이 살포시 접히며 가늘게 휘어지는 걸 지켜보며, 유디트는 또다시 심장이 쿵쿵거리는 것을 느꼈다.
유디트는 애써 제 가슴께를 내리눌렀다.
그 뒤로 모든 기력을 다했는지 아셀은 다시 잠이 들었고, 유디트는 그의 곁에 잠시 머물며 주름진 이불을 정리해 주었다.
잠시 그가 잠든 모습을 지켜보다 유디트는 이내 피곤함에 눈을 감았다.
이보다 어떻게 더 상처받고 고통스러움을 경험해야 아셀을 완전히 끊어 낼 수 있지?
아니면…….
과연 아셀을 끊어 내는 게 가능한 일인 걸까.
* * *
그날도 보충 수업을 끝마친 뒤, 유디트는 교탁 위에 널브러뜨린 수업 자료들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그때, 그녀의 앞에 기다란 그림자가 졌다. 뭔가 싶어서 고개를 들어 보니 체이스가 서 있었다.
“유디트.”
“응?”
유디트는 대답하면서 책을 가지런히 모아 가방 안에 넣으려고 했다.
그러자 체이스가 그녀 대신 가방을 집어 들어 그녀가 편히 넣을 수 있도록 내밀어 주었다.
“고마워, 체이스.”
“아니야, 그런데 오늘 어디 아파?”
체이스가 인상을 찡그리며 물었다.
“내내 안색이 좋지 않아 보여서.”
아, 열심히 표정 관리를 잘하고 있었다고 생각했는데…….
다 티가 날 정도였구나.
정곡을 찌르는 말에 유디트의 표정이 아예 굳어 버리자, 체이스가 고개를 갸우뚱하더니 말을 이었다.
“게다가 르데인 녀석이 계속 모습을 보이지 않는 것도 이상하고.”
“…….”
“혹시 둘이 싸우기라도 했어? 그래서 이렇게 힘들어하는 거야?”
잠시 유디트는 어떻게 대답하는 것이 좋을지 망설이며 말을 골랐다.
하지만 곧 아셀의 얘기를 솔직하게 털어놓는 것보다야, 르데인의 일 때문에 그런 거라고 핑계를 대는 것이 좋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고민을 마친 그녀가 이윽고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응, 사실 르데인과 좀 문제가 있었어. ……미안해, 괜히 같이 다니는 데 눈치 보게 만들어서.”
사실 체이스도 르데인과 함께 다니면서 나름대로 정이 들었을 텐데, 배려 없이 이런 상황을 만들어 버린 것이 못내 미안하기도 했다.
이걸 이제야 털어놓다니, 체이스에게는 진작 설명이라도 해 줄 것을.
하지만 체이스는 유디트가 왜 사과하는지 모르겠다는 듯, 아무렇지 않은 투로 말했다.
“내가 언제 눈치를 봤다고 그래? 그리고 유디트, 네가 잘못한 일도 아닌데 자꾸 사과하지 마. 분명 그 르데인 녀석이 문제를 일으켜서 널 귀찮게 했겠지.”
안 봐도 뻔하다며 체이스는 자세한 얘기도 듣지 않고 이런 자신을 옹호해 주었다.
참 고마웠지만, 동시에 가슴이 쿡쿡 찔려 오기도 했다.
체이스 몰래 아셀의 병문안을 갔던 일과, 단둘이 여름 파티에 가기로 약속했던 사실이 떠올라서였다.
체이스는 이렇게까지 신의를 지켜 주는데 나란 사람은…….
그렇게 생각하니 마음이 불편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만약 이 사실을 체이스에게 들키게 된다면 어떻게 반응할까.
화를 낼까, 아니면 예상외로 별 신경도 쓰지 않을까.
하지만 체이스는 아셀을 싫어하는 듯 보였으니, 그와 다시 붙어 다니는 것을 달갑지 않게 여길 것은 분명했다.
유디트는 속으로 한숨을 푹푹 내쉬며, 부디 그가 여름 파티 같은 것에는 관심이 없기를 바랐다.
그리고 그녀가 약혼자가 아닌 다른 남자와 파티에 참석했다는 소문이 그의 귀에 들어가지 않기를.
아셀은 워낙 이목이 쏠리는 유명 인사라 확신할 순 없었지만 말이다.
그녀는 뒤숭숭한 속내를 감추며 어색하게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그렇게 생각해 줘서 고마워.”
“……아니야, 별것도 아닌데 뭘.”
두 사람은 함께 교실을 걸어 나와 자연스럽게 교실 밖에 멈춰 섰다. 그리고 르데샤가 오기만을 기다리면서 대화를 이어 갔다.
“그런데 유디트, 나 한 가지만 더 물어봐도 돼?”
유디트가 체이스의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뭔데?”
“넌 요새 뭘 제일 좋아해?”
“……응?”
갑자기 이런 건 왜 묻는 거지?
유디트는 체이스의 저의를 몰라 눈을 끔벅거렸다. 그도 그럴 게, 그녀의 생일은 한참 남아 있었으니까 말이다.
체이스는 멋쩍은 듯 웃어 보였다.
“사실 저번에 네가 내 벌 청소를 도와줬었잖아. 그게 고마워서 보답을 해 주고 싶어.”
“그거라면 저번에 말하지 않았어? 당연히 해야 하는 일을 했을 뿐이라고.”
“그래도.”
체이스가 주저하며 말을 뱉었다.
“고마운 건 고마운 거니까.”
대답을 내놓을 때까지 체이스는 그녀를 빤히 바라보는 걸 멈추지 않을 기세였다. 이에 난감해진 유디트가 고민하다가 이내 답변을 내놓았다.
“나는 달콤한 간식이 좋아.”
간식 정도라면 구하기 힘들지도 않고 가격이 그리 비싸지도 않았다.
무난한 보답이 되리라고 생각해서 고른 것뿐인데, 그 말을 듣자마자 체이스가 입가에 엷은 미소를 띄웠다.
“달콤한 간식.”
마치 반드시 기억해 두겠다는 듯 유디트의 말을 따라서 중얼거리는 그의 모습이, 제법 다정해 보였다.
참 이상한 일이었다.
처음에는 그토록 날을 세우던 체이스가 어느새 제게 이렇게 친절해지다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