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게 다정하지 마세요 49화
* * *
르데인은 유디트를 만나 지금까지의 잘못을 사과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녀의 말대로 다른 목적을 품고 접근한 것을 사과하고, 괜찮다면 다시 보충반 수업을 듣고 싶으니 받아들여 달라고 할 셈이었다.
그런 그의 한쪽 손에는 화려한 금박으로 포장된 상자가 들려 있었다.
성의의 표시로 이 선물을 건넨다면, 제 마음이 진심이란 걸 알아주지 않을까.
그는 주먹을 꾹 쥔 채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교정이 조용한 것을 보니 모든 수업이 다 끝난 모양이었다.
르데인은 유디트가 이미 기숙사로 돌아갔을 거라고 예상하고는, 주저 없이 곧바로 여학생 기숙사 사감실로 향했다.
남자인 그가 함부로 여학생 기숙사에 발을 들일 수는 없는 노릇이었기에, 그 전에 깐깐하기로 유명한 사감의 허락을 받아야 했던 것이다.
어느덧 사감실 앞에 도착한 르데인은 긴장감에 침을 꿀꺽 삼켰다.
똑똑똑-.
정중하게 노크를 하고 사감실 문을 열어젖혔다.
뾰족한 세모 안경을 끼고 있는 사감이 고개를 돌려 르데인을 바라보았다.
“무슨 일이니?”
사감은 깐깐한 눈빛으로 르데인을 머리부터 발끝까지 훑어보았다.
“안녕하세요, 1학년 르데인 로지에나라고 합니다. 다름이 아니라 잠깐 면회하고 싶은 학생이 있어서…….”
“안 된단다. 포기하고 돌아가렴.”
사감이 휙 등을 돌렸다. 조금 굽은 그 등이 마치 철벽같았다.
하지만 여기까지 온 이상 르데인은 포기할 수 없었다.
르데인은 사전에 기숙사 사감의 뒷조사를 했기 때문에 그녀가 낭만적인 연애 소설을 즐겨 읽는다는 것을 파악하고 있었다.
곧장 르데인이 목을 가다듬더니, 최대한 애절한 목소리를 내며 연기를 하기 시작했다.
“-사실, 만나서 꼭 사랑을 고백하고 싶은 학생이 있어요.”
잠시 멈칫했던 사감이 돌아섰다.
“……방금 뭐라고 했니? 나이 때문인지 요즘 귀가 어두워서 잘못 들은 것 같구나.”
통했다.
르데인은 속으로는 쾌재를 부르면서, 겉으로는 여전히 우수에 젖은 촉촉한 눈동자를 했다.
“얼마 전에야 마음을 깨달았거든요. 그녀를 깊이 사랑하고 있단 걸.”
“그, 그렇다고 하더라도-.”
“하지만 그걸 깨닫기도 전에 전 이미 그녀에게 너무나도 큰 실수를 저지르고 말았어요.”
사감이 중간에 말을 끊으려고 했지만 르데인은 굴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처음에는 상당히 불순한 의도를 가지고 접근했거든요. 우등생인 그녀를 방해할 목적으로요. ……제가 나쁜 놈이었죠.”
“어떻게 그런 고약한 짓을.”
어느새 자신의 이야기에 감정 이입을 한 사감이 르데인을 향해 입을 떡 벌렸다.
그에 르데인은 고개를 푹 숙이며 혼잣말하듯 중얼거렸다.
“하지만 그녀와 함께하는 동안 전 어느새 진심이 되어 버리고 말았어요.”
“저런!”
어느새 르데인의 눈에서는 닭똥 같은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그는 팔을 들어 제 가슴을 내리누르며 말했다.
“이젠 하루라도 빨리 이 마음을 그녀에게 털어놓지 않으면 곧 죽을 것만 같아요. 그녀가 제 심장을 빼앗아 가 버렸으니까요.”
스스로도 무척 창피했지만, 다행히 효과가 있었다. 이제 사감은 입까지 틀어막고 르데인의 행동을 숨죽여 지켜보고 있었으니까.
이제 곧 있으면 끝나니까 조금만 더 참자.
스스로를 달래며 르데인이 입을 열었다.
“하지만 그녀는 지금 저를 계속 피하고 있어요. 이대로 저를 영영 보지 않을까 봐. 그래서 사이가 멀어지게 될까 봐 두려워요.”
“…….”
“그래서 오늘 꼭 그녀를 만나 이 선물을 주면서 사과하고 제 마음을 솔직하게 고백하고 싶어요. 안 될까요?”
손에 들고 있던 금박 상자를 눈앞에 내보이자 어느덧 사감의 눈동자에 물기가 어렸다.
르데인의 딱한 사정을 들은 사감은 금세 마음이 약해지고 말았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 하더라도 규칙을 깨고 남자인 르데인을 여자 기숙사 안으로 들여보낼 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녀가 곰곰이 고민하더니 르데인에게 물었다.
“그 애의 이름이 대체 뭔데 그러니?”
“유디트입니다, 사감 선생님.”
“유디트, 유디트라……. 아니면 내가 지금 말을 전해서 불러오는 것은 어떻겠-.”
그때였다. 막 창문 밖을 지나치고 있던 한 소녀가 사감의 시야에 들어왔다.
검정색 안경테를 쓴 채 쿠키 봉투를 들고 있는 한 소녀, 바로 유디트의 룸메이트인 한나였다.
사감은 급하게 창문을 열어 그녀를 불러 세웠다.
“한나!”
다행히 큰 목청 때문에 한나가 걸음을 멈추었다. 사감은 재빨리 그녀를 향해 안으로 들어오라고 손짓했다.
곧 르데인의 앞에 한나가 영문을 모르고 서게 되었다. 사감이 그런 그녀의 어깨를 붙잡으며 르데인을 향해 말했다.
“르데인, 이 아이가 바로 유디트의 룸메이트란다.”
사감은 선심을 쓰듯이 말을 이었다.
“규칙상 너를 여자 기숙사 안으로 들여보내 줄 순 없지만, 한나에게 유디트를 기숙사 밖으로 불러내 달라고 요청해 보는 게 어떻겠니.”
“그렇군요,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그때까지도 갑자기 끌려온 한나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고 있다가, 이어지는 대화를 듣고 상황을 대략 파악했는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에 사감이 한나의 귀에 대고 사정을 설명해 주었다.
“이 아이가 유디트에게 꼭 전하고 싶은 말이 있다고 하더구나. 한나, 혹시 지금 유디트를 기숙사에서 불러와 줄 수 있겠니?”
“네?”
한나는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유디트는 아직 기숙사에 오지 않았는걸요.”
“……어머, 그러니?”
“음…… 하지만 유디트가 돌아오면 제가 대신 말을 전해 줄 순 있을 것 같아요.”
“하지만 이 아이가 전하고 싶은 말은 꽤나 개인적인 것 같던데.”
사감은 잠시 고민하는 듯하더니, 르데인을 향해 말했다.
“어떠니? 한나에게 사정을 설명하고 선물을 전하고 가든지, 아니면 계속 바깥에서 기다리든지 네가 원하는 대로 정하렴.”
그리고 그것만으로도 고맙다는 듯, 르데인은 사감을 향해 깊이 고개를 숙여 보였다.
* * *
함께 사감실을 빠져나온 한나와 르데인은 나란히 걸으면서 대화를 나누었다.
도움을 요청하면서 아예 사정을 비밀로 할 수도 없었기에, 르데인은 그녀에게도 자신의 목적에 대해 약간이나마 털어놓기로 결심했다.
그는 자신이 유디트에게 불순한 목적으로 접근했고, 그걸 유디트가 알게 되어 사과하고 싶다는 논지로 간략하게만 설명했다.
“……일이 이렇게 된 거예요.”
“그렇구나.”
“그래서 말인데…….”
르데인은 침을 꿀꺽 삼켰다.
“저는 가능하면 유디트 선배님을 직접 만나 뵙고 사과를 드리고 싶어요. 혹시 선배님이 오실 때까지 기다려도 될까요?”
처음에는 난색을 보이던 한나였지만 르데인이 끈질기게 부탁하자 곧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알겠어. 어차피 늦지 않을 테니 그렇게 오래 기다리진 않아도 될 거야.”
그리고 그녀가 잠시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이 침묵을 지켰다.
“…….”
그러자 분위기가 묘하게 어색해졌다. 유디트를 제외하면 두 사람은 딱히 교집합이 없었기에 금세 말이 끊기고 말았다.
뭐, 딱히 한나와 나눌 대화거리도 없었기 때문에 르데인은 차차리 잘된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저 멀리 기숙사 건물이 보일 무렵, 한나가 조심스럽게 입을 떼었다.
“……그런데 혹시나 해서 묻는 건데, 너 설마 유디트를 짝사랑하고 있는 거니?”
짝사랑, 그 짤막한 단어에 르데인의 드높은 자존심이 상했다.
하지만 주변에서 이렇게 빠르게 눈치를 채는 걸 보면 확실히 제 감정이 티가 나는 모양이라고 생각하며 르데인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네, 맞아요. 선배님은 유디트 선배님과 친분이 있으시다고 하셨으니까 도와주신다면 정말 큰 도움이 될 거예요.”
르데인은 처연하게 눈을 내리깔았다. 그리고 조금이라도 인정이 존재하는 사람이라면 도와주지 않고는 못 배기는 대사까지 덧붙였다.
“물론 곤란하실 수도 있으니 강요는 하지 않겠지만요.”
이렇게까지 했는데 한나는 이상하게도 말이 없었다.
설마 여기서 거부하는 건 아니겠지?
잠시 불안해졌으나 곧 한나의 입술이 열렸다.
“내가 도와주는 건 아무런 문제가 없어. 하지만.”
한나는 입술만 달싹거렸다. 뭔가 망설이는 기색이었다.
“하지만?”
“하지만 사실 유디트는-.”
한나가 또 입술만 달싹거렸다.
답답했다. 왜 말을 하다 마는 거지? 일부러 사람을 약 올리려는 것도 아니고.
르데인은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빨리하라며 재촉하고 싶은 심정을 억누른 채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렸다.
그런데 그다음 한나의 반응은 더욱 그의 속을 답답하게 만들었다.
“아니야, 이건 내가 말해선 안 돼.”
“…….”
르데인이 기가 막힌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다는 걸 모르는지, 한나는 제 머리를 감싼 채 혼란스럽다는 듯 중얼거렸다.
“나는 대체 어떻게 해야 하는 거지? 신은 내게 왜 이런 가혹한 시련을 주시는 걸까.”
“선배님께서 뭘 고민하고 계신지는 몰라도 본디 신께서는 극복할 수 있는 시련만 주신다고 하셨어요.”
르데인은 우수에 젖은 눈동자를 하며 말을 이었다.
“그러니까 선배님이 괜찮다고 생각하시면 제게 알려 주셔도 괜찮아요. 비밀은 지킬게요.”
“그렇게 생각하니?”
“물론이죠.”
르데인의 말이 심금을 자극하였는지 어느새 한나의 여린 나뭇잎 같은 눈동자가 일렁거리고 있었다.